〈 53화 〉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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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동안, 세상엔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중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나에게 지난 한 달은 무료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로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고통을 받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의지를 다지고 난 후 며칠간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여러 지역의 던전 클리어와 8등급 이하의 전투 시험을 모두 통과하는 등 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 처음의 결심은 점점 무뎌졌고 나는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고통이 예상되는 9등급 이상의 시험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고 던전은 집 주변의 던전만 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지난 한 달간 100만이 넘는 업이 추가로 쌓였지만, 아직 2등급의 무구를 구매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2주 정도가 흘렀을 때부터는 어느 정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 다시 입몽을 시작했지만, 어째선지 입몽하여 겪는 상황마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농부가 되어 밭을 일구는가 하면, 웬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했다. 악덕 영주가 심술이라도 부렸으면 조금이나마 덜 심심했을 텐데 능력이 출중함은 물론이요, 인덕까지 겸비한 영주는 얼굴을 볼 일조차 없었고 오히려 영지민들에게 추앙까지 받고 있었다. 차라리 나무가 된 게 흥미진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보상으로는 수확한 농작물과 내가 꽃 피우며 맺은 열매 등을 얻었지만 별다른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소소한 지식과 몽환석 2개를 추가로 얻게 되었다.
몽환석은 아직 사용할만한 사람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보유만하고 있었는데 엘리야 이유가 있었다지만 메리와 아던, 레이첼과 헤릭스 등을 현실에 소환하는 것은 그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될수 밖에 없었다. 아, 헤릭스라면 이곳에서의 삶을 극히 반길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은 녀석이 처음이었지.'
암살자 길드, 그림자 매의 온갖 정보를 거르고 취합하며 밤낮없이 일해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헤릭스라면 현실의 평온한 삶을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남의 의지를 내 멋대로 제단할 수는 없었다.
'의외로 일을 즐기는 유형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회사에서 연락이 와 회사에 방문하여 퇴직원서를 작성함으로써 실직적인 퇴사를 마쳤는데 내 퇴직 원서 작성을 돕던 인사팀의 사원이 이르기를 이번에 나처럼 퇴직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퇴사한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다고 하던데….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계약직을 더 뽑던가 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티비나 인터넷의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질적인 현상이 야기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기삿거리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문제들은 바로 범죄였는데 뉴스에 따르면 능력을 사용한 범죄가 급증했으며, 이에 따라 경찰에서는 경찰 내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능력자들을 따로 추려 특수능력사건 전담반을 새롭게 창설하였고 법무부에서는 능력 범죄에 관한 3대 법안을 발의하여 국회에서 이를 긴급 승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사용한 범죄는 사그라들 줄 몰랐는데 일주일 전부터 다시 등교하기 시작한 학교에서는 등교를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능력을 사용한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졌고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폭력 조직 간의 이권 다툼으로 건물 서너 개가 붕괴한 사건도 있었다. 또한, 차마 서술하기조차 힘든 반인륜적인 성범죄들이 기승을 부려 전 국민이 강력한 처벌을 호소하기도 하는 등 난리도 그냥 난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가 온갖 범죄가 횡행하는 범죄 국가가 된 듯했지만, 해외에서 벌어지는 조직적인 범죄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범죄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해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능력을 활용한 조직적인 테러, 인신매매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규모와 악랄함이 차원이 달랐다. 단적인 예로 미국의 타임스퀘어 일대가 테러로 인해 주저앉는 사건이 있었는데 추정되는 사상자만 5만 명을 훌쩍 넘어선다고 한다. 아비규환이 된 타임스퀘어는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는데 그 참상을 겪은 미국 정부는 능력 범죄 근절을 선언하며 능력 범죄자에 한해 그 죄질이 경미한 경우라도 무조건적인 사형을 집행하기 시작해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똑똑똑!
"누구세요?"
물론 상태창과 능력, 던전 등이 나타나고 사건, 사고만 존재하는 악순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범죄라는 게 유독 눈에 띄어서 그렇지 오히려 아이반이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지원'이 되는 순기능의 역할이 더욱 컸다. 일례를 들기에는 그 종류와 양이 무척 많았는데, 우선 상태창이 나타나며 능력치를 올려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현대의 의술로는 고치지 못했던 불치병조차 하나씩 정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업을 통해 상점에서 사들이는 물건들과 던전에서 들고나오는 전리품, 몬스터의 사체 등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자원이 되어 새로운 미래 에너지로 급부상하며 대기업들은 이미 그와 관련된 사업을 빠르게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능력을 이용해 선량한 시민들에게 온갖 피해를 준 범죄자들과 달리 그런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힘과 능력을 사용하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을 돕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삶이 어려운 사람들, 법의 사각에 놓여 궁지에 몰린 사람들과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뉴욕 타임스퀘어 테러 사건의 '에리카 나스타시'였다.
그녀는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 즉 염력을 다루는 능력자로 대규모 분진 폭발을 일으킨 테러범들을 일거에 제압하고 무너진 건물을 들어 올리는 어마어마한 염력으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의 구조 작업을 도와 화제가 되었는데 그 뜨거운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 현재는 아메리카 히어로라 불리며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그녀에게는 여러 방송사의 출연 요청과 더불어 여러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러브 콜이 쏟아지고 있지만, 에리카는 그 모든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어 팬들의 아쉬움이 크다고 하는데 그런 그녀가 어째서 한국에, 그것도 내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초인종은 왜 안 돼?"
우리집 초인종은 오래전 고장 난 상태로 딱히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어 고치지 않고 있었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대뜸 그런 질문이 날라왔다.
"어…."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 실례지만, 들어가도 될까?"
"에?"
에리카의 유창한 한국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녀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염력을 발동하여 나를 밀어내려 하자 자신과 다른 기운에 자연스레 일어난 마력이 강한 반발력과 함께 염력을 막아섰다.
"와우! 역시 대단하네. 다시 말하지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오빠."
"오빠?"
에리카는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밀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에리카의 뒤에 서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여자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린 채 집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유창한 한국말만큼이나 한국의 문화를 꿰고 있는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내가 예의를 지적하는 일은 없었다.
"뭡니까?"
그래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태연하게 소파를 차지한 두 사람에게 묻자 에리카가 양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후아! 내 이름은 에리카 나스타시. 얜 내 동생, 제니퍼 나스타시. 소개를 이어가기 전에 차 한 잔만 줄래, 오빠? 먼 길을 와서 그런가, 목이 마르네."
"……."
오늘 처음 본 게 분명할 텐데 대뜸 오빠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부탁을 해오는 당돌함에 할 말을 잃었다. 미국에 살면 다 저런 건가?
집에 차라고는 복숭아 아이스티와 유자차밖에 없어 별다른 고민 없이 아이스티 두 잔을 타왔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잔을 받아드는 두 사람을 보니 확실히 자매가 맞았다.
'아니, 근데 이 사람들이 갑자기 여긴 왜 왔냐고.'
영어라면 진작에 포기한 나다. 미국은커녕 제주도도 밟아보지 못한 나에게 미국인과의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텐데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에리카 나스타시가.
'내가 눈에 띄는 활동을 했었나…?'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런 적은 없다.
"아씨, 궁 빨리 안 쓰냐고!!!"
그때 내 방에서 엘리의 화난 음성이 들려왔다.
"음…?"
"집에 다른 사람이 있었어?"
그녀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왜요?"
"그런 말은 없었잖아?"
"응….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뭔가 잘못됐다는 듯 서로 심상치 않은 눈빛을 주고받고는 방으로 다가가려는 그녀들을 향해 팔을 벌려 제지했다.
"안 돼."
"현아! 누가 왔어?"
"밖에 절대 나오지 말고 게임하고 있어!"
"응!"
"잠깐만, 얼굴 좀 볼게."
"안 된다고."
지금 엘리는 엘프의 귀가 드러난 무방비 상태라 절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번엔 에리카가 몸을 밀어내도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되려 노려봤다. 살기라도 뿜어낼 기세로 노려보자 움찔한 그녀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아, 얼굴 좀 본다고 뭐가 닳아?"
"니들이 얼굴을 왜 봐야 하는데?"
"그건…."
"그건 제가 예지 능력자이기 때문이에요, 유현 님."
"……으응?"
갑자기 황당무계한 소리를 듣자 신경 회로가 잠시 꼬인 듯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이름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집까지 찾아온 거 보면 이름 정도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알아냈을 것 같긴 하지만, 그 이유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예지 능력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물러서. 방 안에 누가 있는지는 궁금해하지도 말고 여기 찾아온 이유부터 설명해."
"우린 도우러 온 거라고!"
"에리카, 진정해. 우선 소파에 앉자."
다시 소파에 앉은 에리카와 제니퍼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예지 능력자입니다."
제니퍼가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서두를 뗐다.
"세상이 바뀌고 나서 깨어난 제 능력은 저와 관련된 것이라면 가까운 미래부터 시작해 먼 미래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능력의 특성상 제가 원하는 것만 볼 수는 없지만요. 그런데 제가 능력을 각성하고 가장 처음 본 것이 바로 미래의 당신, 유현의 모습이었습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미래에 당신은 에리카의 동료였어요. 에리카 주변엔 뛰어난 동료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유현 님은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죠."
'미국에도 사이비가 있나?'
"그래서?"
돈을 내라고 하면 당장 내쫓을 심산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신은 아마도…. 동료들의 기둥이자,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해요."
무언가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표정은 그럴싸하네.'
연기라고 생각하고 보는데도 감쪽같은 표정과 잔잔한 목소리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당신이 죽자, 구심점을 잃어버린 에리카와 동료들은 순차적으로 와해되더니…. 결국, 파멸에 이르렀어요. 여기서 파멸이란 단순히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죽음은 곧 세상의 종말을 뜻해요."
"하하하! 아, 나 웃기네."
"……."
"이거 안 웃으려고 했는데 안 웃을 수가 없잖아? 뭐, 내가 죽는 거야 세상이 이 모양이니 뭐 죽을 수도 있겠지. 근데 말이야. 고작 나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멸망한다고? 푸하하, 여보세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아왔어요. 나는 내가 잘 아는데 중심이니 기둥이니 그럴만한 그릇이 못 돼. 내 삶 살기도 바쁘다고."
"……이 사람 확실해?"
에리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니퍼를 돌아보자 제니퍼가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확실해. 예지로 본 성격과는 좀 다르지만. 아마도 우리의 말을 의심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우린 아직 동료가 아니니까."
제니퍼가 종말을 언급한 후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궁금했다.
"내가 미래에 죽는다는 얘기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결론이 뭐야?"
"저희는 당신이 죽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리고 미래에서 당신이 내뱉은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미래의 내가 내뱉은 말?'
"…그게 뭔데?"
제니퍼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며 또박또박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유현, 이 병신같은 새끼야. 노력 좀 해라, 제발. 오래 살고 싶어서 환장한 새끼가 뒤지고 싶어서 노력을 안 하냐? 시간 있을 때 노력하라고 제발!"
제니퍼가 내뱉은 말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비수를 박아 넣은 듯 짜릿했다.
"이, 이…!"
이건 진짜다. 이 녀석들 말이 정말 사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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