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데스나이트 가슈일 (2)
* * *
"현아!"
가슈일의 연계 공격에 허무하게 시험의 방 밖으로 퇴출당하여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누군가 다가왔다.
"어? 어…. 통과했어?"
집 나간 정신을 불러들인 사람은 푸른 장막의 빛을 받아 얼굴이 퍼렇게 보이는 엘리였다.
"응! 통과했어! 네 말대로 오우거 전사였는데.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니까! 오우거가 어찌나 크던지 다른 오우거에…."
엘리는 나를 보자마자 한껏 들뜬 기색으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는데 나는 그런 엘리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좀 전의 전투를 회상한다. 가슈일의 중얼거림과 함께 뻗어 나온 불길한 기운에 닿자마자 마나 폭주가 무력화되고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 후엔 목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몸의 감각이 일순간에 사라지며 의식이 끊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목을 베인 건가?'
아직도 따끔거리는 듯한 목을 매만져 봐도 매끈할 뿐이다. 얼핏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본 것도 같은데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상태창을 열어볼 틈도 없었어.'
능력치를 올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녀석의 알 수 없는 능력에 닿는 것으로 끝이었다.
'일단 능력치를 분배하자.'
이번 등급 시험에서 잔여 능력치를 아껴두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곧장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분배했다.
300에 달하는 잔여 능력치를 체력, 근력, 민첩, 마력에 각각 75씩 고르게 분배하자 전신에 가공할 힘이 깃들었다.
늘어난 비율은 두 배가 채 안 되었지만, 체감상 두 배 이상 전력이 급증한 느낌. 게다가 마나 폭주의 특성상 지금 상태에서 얼마나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지는 대략적인 예상조차 어려웠다.
'다시 가보자.'
"……게 도망 다니다가 결국 오우거 전사가 엘에게 숨통이 막혀서 쓰러졌어. 대단하지?"
'엘을 이용해 쓰러뜨렸다는 건가?'
중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엘과의 협공으로 오우거 전사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숨통을 막는 작전은 꽤 괜찮은 작전이지.
"정말 잘했어. 나보다 낫네. 엘리."
"응?"
"나 다시 한번 갔다 올게. 다음 몬스터는 드레이크야. 산성 브레스랑 돌진, 이빨 공격을 주로 사용하는 데 오우거 전사처럼 숨통을 막았다가는 엘이 산성 브레스에 녹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능력치는 들어가기 전에 미리 올려두고!"
"으, 응! 잘 다녀와!"
나는 엘리의 배웅을 받으며 시험의 방 내부로 곧장 진입했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개인 전투의 문을 열어젖히고 허망한 표정으로 엘리의 앞에 다시 섰다.
"현아…? 벌써 통과했어?"
엘리는 능력치를 분배하고 있었는지 허공을 바라보다 나를 발견하고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다가왔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하고는 다시 장막 안으로 몸을 던졌다.
"나, 다시 갔다 올게."
'말도 안 돼.'
분명 힘에서도 속도에서도 무구에서조차 내가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패배하는 이유는 녀석과 다시 검을 맞댄 순간 알 수 있었다.
찌이이익! 콰앙!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진 내 일섬은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 가슈일의 검에 부딪혔지만, 요란한 소리와 다르게 가슈일의 표정은 평안할 뿐이었다.
'내 검로를 예측하고 흘리고 있어!'
녀석은 내가 땅을 내딛음과 동시에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자세를 잡고 내가 허리를 틈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들어 발을 한 보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는 내 검로를 똑같이 따라붙으며 그 힘을 완벽하게 상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중얼거림.
"죽음의 손길."
불길하고 흉악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손은 벌써 두 번이나 당했기에 첫 격돌과 동시에 몸을 뒤로 빼내 피해냈다. 하지만 가슈일의 능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둠의 장막."
가슈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하늘로 날아올라 이 일대를 장악하는 시커멓고 끈적한 검은 장막을 만들어냈고.
나는 저 장막에 닿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급한 대로 검막을 형성했다.
사사사사삭우우우웅!
다행히 검은 장막이 검막을 뚫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일단 베어내서 막을 수는 있다는 얘긴데….'
"뤼오레. 너, 저런 몬스터 본 적 없어?"
글쎄, 저건 누가 봐도 인간 아니야? 조금 께름칙하긴 하지만.
"인간이 저렇게 강하다고?"
주인도 인간이잖아. 그리고 강하긴 하지만, 백염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건 안된다. 차라리 가슈일에게 목이 베이는 것이 낫지. 산 채로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래도 능력치가 오른 덕분인지 검막을 유지하는 데 드는 힘이 대폭 축소되어 여유가 있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다.'
라고 생각했었다. 검막을 거두기 전까지는.
생각을 정리하고 가슈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서서히 검막을 거둬들이자마자 검로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 하는 악독한 기운에 아연실색하며 다시 검막의 틈새를 메웠다.
검막 밖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뤼오레의 청염이 뒤섞인 채 서로의 힘을 겨루고 있었다. 그러나 뤼오레의 청염이 차지하는 공간은 한계가 있었고 가슈일의 어둠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검막을 형성하기 위해 휘둘러진 검로를 따라 검염이 사방으로 길게 뻗어 나가지만 이미 사방을 잠식한 어둠에 둘러싸여 금세 사그라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밖은 어둠밖에 없어. 어둠이 청염을 압도하진 못하지만, 청염 역시 어둠을 압도하진 못해. 어둠이 청염을 집어삼키면 청염은 어둠을 녹여내고….이런식으로는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되겠지만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어둠은 끝이 보이지 않아. 어둠을 밀어내려면 백염을 써야 돼, 주인.
"하아!"
가슈일은 염귀와 같은 등급인 데다 플랑베르주보다는 한 단계 밑이다. 게다가 등급 시험을 통과하며 얻은 잔여 능력치로 가파른 성장을 이뤄냈는데, 이렇게나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성의 문제니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어. 저 녀석이 덩굴 괴물과 싸웠다면 금세 쓰러졌을걸? 덩굴 채찍과 몬스터를 막는 데 급급하다가 쓰러졌겠지. 뭐, 주인도 내가 없었다면 똑같았겠지만. 어쨌든 지금 주인으로선 백염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놈을 이길 수 없어. 신체적으로는 앞설지 몰라도 경험이나 기술의 차이가 극심하다고. 이기고 싶으면 마력을 불어넣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가슈일을 처치할 방법은 백염밖에 없었다.
'아, 미치겠네.'
그 극악무도한 열기를 다시 받아들일 생각을 하자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건 다시 도전해도 백염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가슈일을 압도할만한 검술을 갖추거나 저 요상한 능력들을 상쇄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않는 이상 녀석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건 단기간에 갖출 수 없는 종류의 힘.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수하고 뤼오레에게 마력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이 이후로는 진짜 백염을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뤼오레에게 부탁한다.
"그럼 간다. 최대한 내게서 떨어뜨려 줘."
알겠으니까 잘 버텨보라고!
우우우웅!
무서운 속도로 내가 쏟아붓는 마나를 먹어치우기 시작한 뤼오레는 빠르게 주변의 열기를 상승시키며 그 색을 하얗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윽!"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신음을 토하며 검막을 거두자 짙은 어둠이 백염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어둠이 개이자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있던 가슈일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린 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드러냈다.
"크큭!"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건 너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백염이 뿜어내는 빛과 열기가 정점에 달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뤼오레에게 주입하는 마나를 제외한 모든 마나를 육체의 보호에 치중한다.
화르르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의 일렁거림이 마나를 통해 전해지고 이어 뤼오레가 그 전신을 하얗게 불태우며 크게 외치자.
백염열옥대천(白???大?)!!!
콰르르르르르륵!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죽음의 대지 일대에 퍼져 나갔다. 감은 두 눈을 파고드는 뜨거운 섬광에 눈을 더욱 질끈 감고 이를 악 다물었다.
"크으으으!"
지난번의 경험으로 비명을 지르는 건 고통을 재촉할 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신경이 녹아내리는 고통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참아냈다.
'뒤져라!!'
어서 빨리 백염이 가슈일을 집어삼키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귓가에 거슬리는 쉰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윽! 악신의 보호막!!"
아, 아니?! 저게 무슨?!
뤼오레의 당황한 목소리를 끝으로 백염이 가슈일을 뒤덮는 게 느껴졌다.
'불안하게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백염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 오른팔이 모두 녹아내리고 바꿔 쥔 왼팔마저 녹아내리며 왼쪽 어깨와 가슴 전반이 모두 녹아내릴 때까지도 시험에 통과했다는 메세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콧날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살점과 함께 심장이 녹아내리며 의식이 끊어졌다.
털썩.
다시 현실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몸을 벌벌 떨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등급 시험 중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후유증으로 이 같은 증상을 보이는 이는 많았기에 주변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극심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나 같은 경우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몇 번의 심호흡으로 떨림은 멎었지만, 몸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씨발, 안 해."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욕지거리가 최근 들어 과도하게 늘었다. 이제 욕지거리가 나오는 일은 이쯤에서 멈추고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이런 고통스러운 삶은 익숙해지지도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누워 고통스러운 기억을 하나씩 떨쳐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을 정리한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집에 가서 푹 쉴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금도 충분해.'
지금도 충분히 강했다. 여기서 무리하게 등급 시험을 진행하는 것은 심력의 소모만 극심할 뿐이었다. 물론 등급 시험을 통과하고 났을 때의 성취감 또한 극대했지만, 당장 누군가 우리를 노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하아."
'그래도 던전은 돌아야겠지?'
상점 창에 쌓여있는 업을 봐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300만을 넘는 업이 쌓여있지만,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값은 등급이 오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7등급과 6등급의 물품들은 그런대로 사볼 만한 가격대였지만 5등급만 되어도 가격이 후덜덜했다. 내가 엘리에게 전해준 마력이 깃든 반지만 해도 5등급의 장신구인데 30만 골드나 되었고 다른 5등급의 무기나 방어구를 보면 100만 업을 호가하는 상품도 많았다. 내가 가진 300만 업으로 살 수 있는 최대치는 4등급 최상위의 무구 정도.
그 정도만 해도 굉장히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2등급에 위치한 무구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HMNS]
등급 : 2
설명 : H하이퍼 M머슬 N나노 S슈트. HMNS는 사용자의 신체 구조를 파악하여 물리적 행동에 제약이 없는 맞춤형으로 외형을 변형하며 적의 타격 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급소 부위는 물론 몸 전체에 미스릴과 마석으로 만들어진 '초마나 합금' 재질의 강화 나노 봇이 탑재되어 있어 외부의 온갖 충격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며, 부상을 치료한다.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용자라 하더라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이 나노 슈트의 반응속도는 5 마이크로초대로, 사용자의 인지 능력만 충분하다면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이는 괴랄한 능력을 맛볼 수 있다.
또한, 방사능이 가득하거나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고도의 환경적응능력이 탑재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활용성이 뛰어나며 과도한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뇌만 멀쩡하다면 뇌파를 통해 슈트가 구현해 낸 하이퍼 머슬이 부상을 무시한 채 활동할 수 있게 해주고 마찬가지로 뇌만 멀쩡하고 시간과 동력만 충분하다면 심장이 터진다 해도 출혈을 막고 심장 대신 체내에 혈액과 산소를 공급하며 되살릴 수 있다.
그 외에도 뛰어난 전파 송수신 기능으로 수십 킬로미터 밖의 아군에게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고 자신의 상황을 360도 전 방향으로 촬영하여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기, 열, 방사선 에너지를 동력원으로 하며 단점으로는 극저온에는 다소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과 다른 종류의 나노 슈트와 다르게 한 번 착용하면 벗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고 상당한 부피와 무게로 인해 체내로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2등급의 방어구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설명을 읽은 게 이 정도다. 세상에, 심장이 터져도 생존할 수 있는 나노 슈트라니. HMNS의 가격은 무려 3천만 업. 지금 내가 지닌 업의 열 배에 달하는 수치였기에 아직은 살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2등급이 이렇다 보니 1등급의 무구는 얼마나 가격이 나갈지 상상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라 던전을 도는 것만은 게을리할 수 없었고 오히려 현존 최고라는 5등급의 던전을 내가 찾아 나서야 할 판이었다.
"꺄아아악!"
상점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산중을 울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비니를 뒤집어쓴 여성이 나타났다.
'떨어졌구나.'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엘리는 자신이 시험의 방 밖으로 퇴출당했는지도 모르고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어제는 지식의 시험이었기에 떨어져도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지만, 오늘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시험이었기에 떨어지며 받은 정신적 충격이 꽤나 클 듯했다.
엘리가 계속 비명을 지르게 두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나 엘리에게나 좋지 않을 것이기에 가볍게 땅을 딛고 다가가 그녀를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꺄아아…아? 혀, 현아? 나…. 살아 있어……?"
엘리는 온기를 느꼈는지 비명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혀 있는 게 몹시 서글퍼 보였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그럼 살아있지. 이제 괜찮아."
"흐아아앙! 나 또, 나 또 죽는 줄 알았어! 흐아아앙...!"
그러나 엘리가 내뱉은 '또'라는 말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며 괜스레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아, 어쩌지?'
조금 전까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생각으로 편해졌던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졌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하려면 입몽이든 등급 시험이든 간에 전력의 상승을 게을리해선 안 됐다.
"안 죽어, 바보야."
그러나 고통 속에 몸을 던지는 것도 싫었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흐아아앙!"
'고통스럽지 않은 한에서 최선을 다하자.'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엘리를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저번 주부터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클리어되지 않은 2등급 던전이 개방되어 전국적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례적인 '이도향촌' 현상으로 1등급 던전의 개방은 순조롭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2등급의 던전은 위험도가 크게 상승하기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는데요. 미리 예견된 던전 개방 사태를 방치하고 전문가들의 의견 피력에도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던 정부는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긴급 대책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대책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국적으로 번진 혼란은 여전한데요. 지금, 이 시각 김범도 초자연현상 연구소장님과 함께 정부가 긴급 발의한 대책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
요즘의 뉴스는 죄다 던전 개방 사태에 대해 다루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 채널을 돌렸다.
'예능이나 보자.'
적당히 재밌어 보이는 예능에서 채널을 멈추고 티비 앞의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한 후 엘리를 불렀다.
"엘리, 컴퓨터 그만하고 나와서 밥 먹어!"
"잠깐만! 나 한타 중이야!"
'이런, 실수했다. 게임 끝나는 거 기다렸다가 차렸어야 했는데.'
던전 개방 사태는 이처럼 평범한 시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엉, 그 판 끝나면 바로 나와.“
나는 평범한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