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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1화 (51/62)

〈 51화 〉 데스나이트 가슈일 (1)

* * *

내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아무런 소음도 없이 공허함만 감돌고 있는 시험의 방 내부였다.

"하아…."

'끔찍했다, 진짜.'

몸은 말끔하게 레이드 전투에 돌입하기 전 상태로 돌아왔지만, 정신은 피부부터 시작해 근육과 신경이 녹아내리던 고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후아아아. 좀 쉬자."

나는 바닥에 털썩 누워 천장에 별처럼 수놓아진 작은 발광석들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저거 뗄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자 전에 뤼오레와 실랑이를 벌일 때 바닥이고 벽이고 간에 아무런 손상이 없던 것이 떠올랐다.

'역시 안 되겠지? 상태창.'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확인해보니 레이드 전투 시험에 들어가기 전 상태로 돌아와 능력치와 잔여 능력치가 원상태로 복원되어 있었다.

'후우. 이 능력치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뤼오레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똑같이 마력을 올리는 게 맞았지만, 뤼오레의 능력은 사용하면 사용자조차 사망에 이르는 일종의 자폭기였다. 내가 죽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끔찍한 고통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체력을 올린다고 해도 견디는 힘은 미미하게 올라갈 뿐이라 체력을 올리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인벤토리.'

화르르륵.

­ 어? 주인! 말짱해졌네?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곳은 일종의 가상 공간이야. 죽어도 죽지 않고 다쳐도 원래 상태로 이곳에 돌아올 뿐이지."

­ 가상 공간이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란 건가? 아니, 신위적(??)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 만들었을 리는 없을 테니.

"그런 건 됐고, 아까 네가 사용한 능력. 그……백염열옥대천? 그거 버티려면 어떻게 해야 돼?"

­ 포기해.

뤼오레는 검에서 자신의 얼굴을 형상화하며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

"뭐?"

­ 백염을 견딜 생각은 포기하라고.

"왜?"

­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불꽃이 아니야. 그런 걸 생각할 시간에 검이나 더 수련해. 주인으로선 검술을 갈고 닦는 게 최선이니까. 내 능력을 발휘하는 건 청염으로 만족하고.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했지만, 나는 백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등급이 높고 강한 몬스터와 싸우게 될 텐데 좀 전처럼 마력 폭주나 내가 지닌 능력만으로는 처치할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를 마주하게 된다면 또다시 백염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나는 몬스터와 함께 자멸하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현실이라면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가겠지만.'

어쨌든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백염을 온전하게 다루는 방법을.

"아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뭐라도 좋으니까 알려줘."

­ 맞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근데 그렇게 누워있으면 아는 것도 알려주기 싫은걸?

"아, 알았어. 일어날게."

­ 흐음…. 방법은 두 가지…. 아니, 세 가지라고 해야 하나? 그래, 세 가지로 하자.

내가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자 뤼오레는 아예 몸 전체를 구현하여 허공을 유영하더니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가지면 세 가지지 세 가지로 하자는 뭐야? 그리고 방법이 세 가지나 있는데 그렇게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한 거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뤼오레가 나를 매서운 눈으로 흘겼다.

­ 뭐야, 그 표정? 방금 미간이 꿈틀대던데?

"엥? 내가? 아, 아까 겪은 일 때문에 조금 피곤해졌나 봐."

'귀신같은 녀석.'

정령이 다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눈치가 귀신같이 빨랐다. 그러나 나도 잡아떼는 건 자신 있었기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 그럼 잘 들어. 두 번 설명하기는 귀찮으니까.

"응."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

­ 첫 번째 방법은 주인도 짐작했겠지만, 불의 속성력을 올리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백염도 불이기 때문에 속성력만 충분히 받쳐준다면 견디는 건 문제가 없지. 아마 불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속성력만 얻는다면 백염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몸을 녹일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말 했지?

"어?"

­ 불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속성력을 가지려면 불구덩이 속을 수백 년은 굴러야 한다니까?

"아…."

처음 뤼오레와 대화를 나눌 때 들었던 이야긴데 그새 까먹고 있었다.

­ 뭐, 용암에 몸을 던진다면 수백 년이 수십 년으로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용암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

"허어…. 그럼 두 번째는?"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 두 번째는 뭐, 그 반대지. 불의 속성력과 반대되는 혹은 상쇄할 수 있는 속성력을 성장시켜 몸 주변에 두르는 거지. 물론 수준은 불과 마찬가지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하고. 속성력의 종류는 물, 얼음, 흙 중에 하나.

"물, 얼음, 흙?"

­ 되도록 얼음의 속성력인 게 좋겠지.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은 얼음의 속성력을 그만큼 성장시키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불 속성력에 집중하는 게 나을걸?

"세 번째는 뭔데?"

이렇게 되면 세 번째 방법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 마지막 세 번째는…. 사실 말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뭐라도 말해보라고 해서 말하는 거야.

"알았으니까 말해 봐."

­ 몸 자체를 단단하고 강하게 만드는 거지. 백염이 녹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그걸 어떻게 만드는데?"

­ 그건 나도 모르는데?

"……응?"

­ 백염을 견디는 방법을 알려준 거지. 그 방법의 세부사항까지는 나도 몰라.

"…알았다."

결국, 속성력을 늘리거나 몸 자체의 강도를 막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라는 소린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뤼오레가 불구덩이 속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단순히 불 속에 몸을 담근다고 해서 불의 속성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그 속에서 화기를 마나 속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과정도 순탄치 않을 게 뻔했고 사람의 몸이 두드린다고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게 아닌 만큼 육체의 강도를 올리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몸을 몇 년을 두드린다고 해도 고작 해봐야 특정 부위에 굳은살이 생기는 게 다일 것이다. 굳은살로 백염을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바닥에 딱 1분만 누워 아무 생각도 없이 호흡을 가다듬다가 몸을 벌떡 일으킨다.

'인벤토리.'

우선 인벤토리를 열어 습득한 전리품을 확인했다.

'또 마정석인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염귀를 처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정석이었다. 등급도 그대로 상급으로 개수는 오히려 줄어 2개. 게다가 최상급 마석은 나오지 않았다.

'식혈목? 강철보다 단단한 나무라….'

그리고 그다지 쓸모없을 것 같은 나무 재료 하나.

'이건 투구…?'

나무 재질로 되어 있는 별다른 특징 없는 둥근 투구의 설명은 이러했다.

[플랑베르주의 가면]

­ 등급 : 4

­ 설명 : 가면이라는 이름과 달리 투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 독특한 물품. 가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희귀한 능력은 사용자의 익명성을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이 된다. 가면을 착용 후 마력을 불어넣으며 사용자가 원하는 모습을 염상하면 그 모습으로 형태가 바뀐다. 강철을 뛰어넘는 강도를 지녔지만, 나무라는 특성상 불에는 다소 취약하다.

­ 제한 : 마력 10 이상.

"흠…."

­ 뭘 보고 있는 거야? 주인?

인벤토리에서 물품을 꺼내지 않은 채 살피고 있었기에 뤼오레에겐 허공을 보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플랑베르주의 가면을 꺼냈다.

"이걸 보고 있었어."

­ 그게 뭔데?

그리고 투구 형태의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마력을 불어넣으며 대상을 생각했다. 대상은 바로 눈앞에 있는 뤼오레.

눈에 보이는 것이 떠올리기도 쉬웠다. 마력과 생각에 반응하여 가면이 꾸물거리며 변화를 시작하고 피부에 착 달라붙는 묘한 느낌과 함께 변화가 빠르게 끝났다.

­ 으, 으에엑?! 뭐야, 그거?

"너랑 좀 닮게 변했냐?"

목소리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는지 굵직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쓰게 된다면 여자의 얼굴은 피해야겠다. 그리고 뤼오레가 한껏 구겨진 얼굴로 외쳤다.

­ 하나도 안 닮았거든?!

그녀의 윽박에 나는 핸드폰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똑같구만. 근데 얼굴은 비슷한데 저 타오르는 머리칼은 따라 할 수가 없구나.'

색은 비슷하지만, 전혀 타오르지 않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칼. 그 시원한 청색의 머리칼을 매만지다 가면의 형태를 원상태로 돌려 인벤토리 속에 집어넣는다.

이 가면은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때가 올 것 같았다. 흡족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 전리품을 확인한다.

[폭주하는 어둠의 지팡이]

­ 등급 : 2

­ 설명 : 마계의 고위 마물 플랑베르주의 몸체를 뼈대로 한 지팡이. 기본적인 뼈대부터가 마기를 품고 있으며 지팡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그니움은 강대한 마기를 품고 있어 자격이 되지 않는 자가 이 지팡이를 들면 미쳐버리고 만다. 지팡이의 에너지원인 마그니움에는 마기의 응집과 흐름을 원활히 하는 유도·응집 마법이 새겨져 있어 마기를 활용한 마법이나 능력을 사용 시 발현 속도가 상승하며, 마기를 증폭시키는 고위급의 증폭 마법이 새겨져 있어 마법 또는 능력의 위력이 대폭 상승한다.

­ 제한 : 마(?)력 100 이상의 마기 사용자.

"흐음…."

전리품은 그게 끝이었다. 등급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더 많은 더 좋은 전리품이 떨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염귀가 8개의 전리품을 떨어뜨린 데 반해 플랑베르주는 한 등급 더 높은 등급에도 5개의 전리품만을 떨어뜨렸다. 질도 더 떨어졌고.

'이번엔 전투에 도움 될만한 건 없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리품의 정산은 그것으로 마치고 등급 시험을 마저 치렀다.

[전투 ­ 개인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7000업이 지급됩니다.]

[7등급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이 8이 되었습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5칸 늘어납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80이 지급되었습니다.]

[상점의 이용 가능한 물품이 갱신됩니다.]

11등급의 몬스터를 상대하다 8등급의 몬스터를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력 폭주를 사용하지 않고 잡는 건 불가능했고.

[전투 ­ 개인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8000업이 지급됩니다.]

[8등급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이 9가 되었습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5칸 늘어납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90이 지급되었습니다.]

[상점의 이용 가능한 물품이 갱신됩니다.]

9등급의 몬스터는 마력 폭주를 사용하고서도 꽤나 고전했다.

그리고 10등급.

[전투 ­ 개인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메마르고 황폐한 죽음의 대지 위에 악랄한 기운을 뿜어대는 흑색 갑주의 기사가 서 있다. 같은 등급의 몬스터, 거대한 용암 덩어리였던 염귀와 비교하면 굉장히 왜소한 몸집이었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 이상이었다.

[데스나이트 가슈일]

­ 등급 : 10

­ 설명 : 데스나이트 가슈일은 어둠에 굴복하여 타락한 성기사다. 마스터 급에 이르러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그가 어째서 타락하였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다. 타락과 함께 사라져버린 고결한 신성력대신 파괴적 성향이 짙은 악마력이 몸을 차지한 덕분에 생명체에게 이로운 영향을 끼치던 그의 모든 능력은 생명체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살고 싶다면 도망쳐라. 죽음의 기사가 그대의 목숨을 앗아갈 테니….

'데스나이트 가슈일?'

생각하기에 앞서 마력을 끌어올리며 단숨에 마나를 폭주 상태로 만든다. 만드라고라의 복용 이후 발달한 마나 회로로 인해 5초면 한계치까지 폭주시키는 게 가능했다.

시간을 재며 기감을 퍼뜨려 나와 가슈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무형(無?)의 벽을 감지한다. 그리고 벽이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자마자 자리를 박찼다.

영월공의 묘리를 담아 가볍게 날아올라 가락크 도끼술의 무겁고 패도적인 힘을 검에 접목하여 내리찍는다.

콰앙!

그러나 가슈일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내 검을 흘려내고는 쇠를 긁는 듯한 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죽음의 손길."

검은색 장갑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급하게 몸을 비틀어 피해 보지만 그가 손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흉악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만다.

탓!

곧장 몸을 뒤로 날리지만 이미 늦었다.

"큭!"

'뭐지?'

기운에 닿자마자 폭주하던 마력이 급격히 사그라들고 육체의 힘이 빠른 속도로 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느려진 만큼 무척이나 날래 보이는 흑검이 흐릿한 잔상과 함께 스쳐 지나가자 목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고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하늘과 뒤통수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을 끝으로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것이 내가 타락한 성기사, 데스나이트 가슈일에게 당한 첫 죽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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