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0화 (50/62)

〈 50화 〉 플랑베르주

* * *

'여긴 어디지?'

습기가 느껴지는 어두운 공간 속에 눈을 뜨는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다.

"휴우…."

­ 방금 그 사람은 뭐야? 정상은 아닌 것 같던데.

"나도 몰라."

­ 그리고 여긴 또 어디야?

"레이드 전투 시험장. 너를 얻은 곳이야."

­ 나를 얻은 곳이라고?

[전투 ­ 레이드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함을 자랑하는 반투명한 창에 마력을 끌어올리며 자세를 고쳐잡는다.

'마나 폭주.'

"설명은 나중에 전투 준비해."

­ 알겠어.

화르르륵!

활활 타오르는 뤼오레를 들고 전방을 주시한다.

'어디에 있다는 거지?'

주변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숲속. 다만 평범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아닌 거대한 덩굴로 이루어진 숲이었다. 뤼오레의 청염에서 뿜어지는 불빛과 내 몸에서 발산하는 마나의 빛만으로도 주변의 정황은 바로 파악이 되었지만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내 의문을 해소해줄 창이 하나 떠오른다.

[플랑베르주]

­ 등급 : 11

­ 설명 : 마계에 서식하는 식물형의 대형 마물. 혹독하기로 유명한 마계 생태계에서도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개체로 성체가 된 플랑베르주는 하나하나가 아름드리나무를 훌쩍 뛰어넘는 굵기의 덩굴을 지녔고 그 강도는 강철을 우습게 뛰어넘는다. 기본적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린 채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형의 마물이지만 주식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피와 살이다. 그리고 자신이 잡아먹은 생명체에게서 기억과 유전적 정보까지 흡수하여 저장하는 플랑베르주는 자신의 덩굴을 변형하여 그 모습과 능력을 똑같이 따라 하여 적을 상대하므로 어떤 공격이 튀어나올지 예상하기가 힘들다. 또한, 잔뿌리나 가지 하나만 남는다면 땅속에 틀어박힌 채 다시 그 힘을 키워 전보다 더 강해지기에 완전히 처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나이를 먹은 개체일수록 더 강한 게 일반적이지만 간혹 운 좋게 전쟁터에 뿌리를 내려 정도 이상으로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니, 설명이 왜 이렇게 길어.'

다 읽긴 했다만 어느새 10초의 시간은 모두 흐른 뒤였다.

'이 전체가 몬스터라는 건가?'

주변을 넓게 감싸고 있는 거대한 덩굴 숲 전체가 몬스터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어젯밤에도 식물형의 대형 몬스터인 에이션트 우드풀과 맞닥뜨리긴 했지만 같은 대형임에도 그 크기가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꽤 고전했던 염귀보다도 한 등급 위의 몬스터. 등급이 하나씩 오를 때마다 크나큰 격차가 존재했기에 얼마나 강할지는 부딪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긴장감 속에 사방을 경계하는데 주변은 놀라우리만치 고요하기만 하다.

"뭐지…?"

스윽.

"어이, 거기 작은 인간."

"……!"

찌이익! 화르르륵!

나는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기는 날카로운 소리, 고작 날붙이를 휘둘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오싹한 소리가 허공을 스치며 청염이 토해내는 화음이 그 뒤를 따랐다.

소리와 기세만으로도 상대를 찢어발길 것 같은 일격이었지만, 손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워워! 진정하라고!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덩굴 하나가 꿈틀거리며 허공에 뻗어 있었고 덩굴의 중앙에는 둥그렇게 사람의 얼굴이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덩굴이 바닥에 내려앉더니 머리부터 시작해 다리까지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덩굴의 앞부분이 은빛의 갑주를 걸친 기사의 모습으로 변하고 나자 뒷부분은 떨어져 나가며 뒤편의 덩굴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때, 제법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아? 아, 말투도 고쳐줄까? 아직 당신을 해치고 마음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지금은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넌 뭐지?"

지금껏 몬스터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경각심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제 이름을 묻는 것이라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종족을 묻는 것이라면 플랑베르주라 불리는 편입니다. 저도 하나 묻겠습니다. 이 공간은 뭐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 잠시 말문이 막힌다.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은 매우 짧았다.

"여긴 레이드 전투 시험장이야."

"레이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전투 시험장이라면 인간이 전투에 관한 시험을 치르는 곳이란 겁니까?"

"그렇지."

"제가 왜 그런 곳에 있는 거죠?"

"나야 모르지. 넌 어디서 온 거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제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된 건지도. 지금 확실한 건 당신을 죽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머릿속 울림뿐."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 울림이라고?"

"예, 이곳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강렬한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레이디를 차지하고자 하는 들끓는 사내의 마음과도 같달까요? 본능적으로 뻗어 나가려는 손길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이렇게 신사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이 끓어오르는 욕망은 도저히 참아내기가 힘들군요."

머리를 부여잡은 손을 내린 그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곳을 만들어낸 존재는 대체 누구죠?"

명백한 이상 증세였기에 다시 경각심을 끌어올리며 녀석의 행동을 주시한다. 이미 마나 폭주는 충분히 끌어 올린 상태. 조금만 더 끌어올리면 육체가 붕괴하는 단계에 들어서기에 힘을 조절하며 답한다.

"아이반."

사실 아이반도 자신을 시스템의 관리자이자 지구의 담당자라고 하였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이반?"

"나도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어. 아마 신적인 존재일 거라는 추측 밖에는."

"신이라…."

녀석의 중얼거림과 함께 두 손의 떨림이 멎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네. 이 속삭임이 신의 목소리라면 거부할 수 없잖아?"

샥! 쿵! 데구르르.

일변한 분위기에 곧장 검을 출수하자 기사의 모습을 한 플랑베르주는 단번에 목이 베여 그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머리를 잃은 몸이 앞으로 무너지는 순간 자리를 박차며 일순간 덩굴로 이루어진 벽에 다다라 그대로 크게 검을 휘두른다.

슈우욱! 콰아앙!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플랑베르주의 덩굴들이 반으로 잘려나간다. 덩굴이 반으로 잘려나가며 그 앞쪽은 반듯하게, 뒤쪽은 충격파에 곤죽이 되어 어그러졌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잘려나간 덩굴의 벽 뒤쪽에는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는 덩굴의 벽이 겹겹이 존재했고 뒤편의 덩굴이 잘려나간 덩굴의 벽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크흐흐! 아프잖아! 그럼 어디 놀아보자고."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메워져 가는 벽을 향해 번갯불처럼 빨라진 검을 연신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빠르게 휘둘러진 검격에 두꺼운 덩굴의 벽이 몇 겹이나 찢겨 크게 패였지만 여전히 밖은 보이지 않는다.

수수수숙!

그리고 녀석도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거대한 채찍 같은 덩굴이 무려 수십 갈래로 휘둘러져 오자 벽을 뚫어내는 행위는 더 이상 시도치 못하고 숨 쉴 틈도 없이 덩굴을 쳐내기 바빴다.

쾅쾅쾅쾅쾅쾅!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철같이 단단한 덩굴조차도 내 검을 버티지 못하고 베어진다는 점.

덩굴을 잘라내고도 모자라 뒤편의 벽에 충격파를 만들어내며 덩굴 벽 곳곳에 움푹 팬 자국이 생겨났지만, 과연 타격이 들어가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내 검에 잘려나가며 뤼오레의 청염에 절단면이 녹아내린 덩굴 조각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축 늘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력이 늘어난 만큼 마나 폭주의 힘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힘을 강하게 내면 낼수록 그 소모도 빨라지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마나 폭주는 마나를 체외로 방출하기보다는 체내에서 폭발시키는 종류의 힘이어서 그 힘에 비해 소모 효율이 좋은 편이었지만, 지금도 체내의 마나가 실시간으로 빠르게 타들어 가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슈악! 쾅!

덩굴을 베어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덩굴을 베어내고 베어내도 끝없이 새로운 덩굴 채찍이 쇄도해 들어온다.

거기다 잘려나간 덩굴이 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땅의 면이 고르지 못하게 변하고 있어 보행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쒸익!

"헙!"

덩굴을 잘못 디뎌 헛바람을 들이키며 공격을 피해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스치듯 지나간 덩굴의 충격파가 몸에 두른 마나를 찢고 얼굴에 긴 자상을 남긴다.

주륵.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 팔이나 다리에 상처가 났다면 힘을 줄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에 상처가 조금씩 벌어져 터져버리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점점 생각해질 게 많아졌다. 발달한 오감과 함께 기감을 퍼뜨려 사방에서 정신없이 찌르고 휘둘러져 오는 덩굴과 바닥의 면적까지 계산해 나가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을 때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됐다.

"크르르르!"

"쿠워어어어!"

"갤갤갤갤갤!!"

'저건 또 뭐야.'

벽의 덩굴이 변형되며 몬스터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몬스터의 생김새가 하나 같이 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오우거의 두 배는 됨직한 푸른 피부의 외눈 거인이 바닥에 떨어진 덩굴을 집어 들며 뛰어오고 온몸이 알록달록한 거대한 두꺼비같이 생긴 몬스터가 혀를 길게 내밀며 검녹색의 침을 내뱉고 몸에 붉은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검은 개가 자신의 입을 벌려 불길을 토해낸다.

쿵! 치이이익! 화르르륵!

외눈 거인이 육중한 체중을 실어 휘두르는 덩굴을 가볍게 피해내며 그 목을 베어내고 두꺼비의 침 또한 피해낸다. 검녹색의 침이 나를 맞추지 못하고 옆의 덩굴에 닿자 그대로 덩굴이 녹아내린다.

'허, 참.'

그리고 5미터에 달하는 검은 개가 뿜어낸 불길은 뤼오레에게 빨려 들어가며 소멸했다. 가까이 와도 전혀 뜨겁지 않은 불길이었다.

'좋은데?'

그러나 내가 뤼오레와 속성력의 힘을 체감하고 있을 때도 상황은 점점 불리해져 갔다.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덩굴과 덩굴을 베어내는 와중에도 점차 불어나는 몬스터들은 하나 같이 고등급의 몬스터처럼 보였다.

사사사사사삭!

날렵해 보이는 길쭉한 회색의 몸이 자잘한 근육으로 뒤덮인 몬스터 여럿이 동시다발적으로 활시위를 놓자 덩굴의 공격 틈새로 날카로운 화살 공격이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나를 노려왔다.

채채채채채챙!

“후욱! 후욱!”

정말 정교한 활 솜씨였지만 그조차도 가까스로 쳐내며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검막을 사용한다면 사방이 아니라 전 방향에서 공격이 쏟아져도 모두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검막은 체력의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검막이 일격의 파괴력보다 속도에 치중한 기술이라지만, 그 속도가 검으로 막을 형성할 정도로 빠르게 휘두르는데 체력 소모가 낮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버티고는 있지만,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늘어나는 공격이 버거워져 결국 검막을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멸할 미래가 눈에 훤했다.

"하아."

'11등급은 무리였나?'

아직 잔여 능력치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잔여 능력치를 모두 투자한다고 해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좀 더 버틸 수야 있겠지만 마력을 두 배가량 늘린다고 해서 이 모든 몬스터와 덩굴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플랑베르주를 처치할 순 없었다.

애초에 염귀처럼 핵을 파괴한다고 해서 죽는 몬스터도 아니었고 잔뿌리, 가지 하나만 남아도 살아남는다고 하는데 그런 녀석을 검으로 처치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굳이 방법을 모색하자면 검을 무진장 휘둘러 가루에 가깝게 만드는 건데 아직 얼만큼이나 거대한지 추정조차 못 하고 있는 이 녀석을 가루로 만들 생각을 하니 고개부터 저어졌다.

­ 주인, 좀 힘들어 보인다?

그때 뤼오레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얄미운 표정으로 물었다.

"시끄러워."

지금 뤼오레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날아오는 화살과 덩굴을 쳐내고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 침을 피해내며 가까이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하나씩 베어낸다.

­ 어? 그런 차가운 태도, 곤란한데.

"……."

뤼오레의 말을 무시한 채 묵묵히 공방을 이어간다.

파바바바박!

­ 주인, 주인.

"……."

콰과과과광!

드드드드득!

이미 마음은 패배를 직감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공략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늘어나는 몬스터의 숫자를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이동을 하며 공격을 쳐내고 몬스터의 몸을 베어 넘긴다.

­ 주인주인주인주인주인주인주인.

'검막을 사용해 탈출을 감행해볼까?'

검막을 전개하며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이동 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만약 힘을 모두 소모할 때까지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끝이었지만.

게다가 탈출하고 나서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온다.

­ 나 방법이 있어!

'방법?'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껄렁한 태도를 지닌 거짓말쟁이 정령의 말 따위 신뢰할 수 없다.

"쿠워억!"

"크륵!"

레이드 전투는 좀 더 등급을 올린 후에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뤼오레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이 외친다.

­ 아, 진짜 방법이 있다니까! 그 이상 마력을 소모하면 내 능력은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끝나겠어!

'능력?'

­ 사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뭔데?"

속는 셈 치고 물었지만, 그녀는 이미 내 무시에 단단히 삐진 듯 두루뭉술한 답변을 해왔다.

­ 궁금하면 나한테 마나를 최대한 불어넣어 봐.

'어차피 이제 방법은 없어. 검막을 쓰다 죽나. 이 녀석한테 마나를 쏟아붓다 죽나 마찬가지야.'

치이익! 치익!

플랑베르주는 내가 침은 막지 않고 피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다른 몬스터보다 알록달록한 두꺼비 괴물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침 세례와 덩굴의 합공에 어쩔 수 없이 검막을 전개한다.

사사사사사우우우웅!

공기조차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체력이 굉장한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다 끄집어내 뤼오레에게 불어넣는다.

­ 그럼 시작한다.

그 말과 동시에 검에서 어마어마한 흡입력이 발생하며 내가 마나를 불어넣는 족족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염으로 인해 푸른색을 띠던 검막이 점차 하얗게 변해가며 몸을 녹일듯한 열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 끄응. 많이 부족한데. 역시 주인이 힘을 너무 썼나 봐. 아니, 처음부터 사용했다고 해도 불가능했으려나.

"큭! 마나만 더 있으면 되는 거야?"

무언가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분명했기에 물었다.

­ 그렇긴 한데. 없는 마나가 원한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려고?

'그 없는 마나도 생겨나는 기적이 있지. 상태창.'

나는 상태창을 불러 남은 잔여 능력치 중 80을 마력에 분배했다. 그리고 곧장 새롭게 불어난 마나를 뤼오레에게 밀어 넣었다.

­ 우, 우오옷!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됐고, 빨리 뭐라도 해봐!"

­ 알겠어! 그럼 잘 보라고! 이 몸의 진정한 힘을!

마나를 계속 불어넣자 흰색과 푸른색이 섞여 백청색을 띠던 불꽃이 완연한 백색으로 뒤바뀌며 강렬한 열기를 뿜어낸다.

"크아아악!"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손이 정말로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검막의 전개를 멈추고 남은 모든 잔여 능력치를 체력에 분배했다.

'이러다 내가 먼저 뒤지는 거 아니야?'

체력이 50이나 추가되었음에도 피부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어 그 위에 마나를 덮어 이중으로 보호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여기까지였기에 그대로 통각을 차단하자 다행히 만드라고라 때와는 달리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숨조차 멈추고 검을 옆으로 뻗은 채 고개를 돌려 열기를 최대한 멀리하고 오로지 기감만으로 주변을 파악한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백염에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공격이 모조리 녹아내리고 있을 때 뤼오레가 큰소리로 외쳤다.

­ 백염열옥대천(白???大?)!!!

콰르르르르르르르륵!!!

그 외침과 동시에 검으로부터 눈부시게 새하얀 불꽃이 폭발하며 비산하기 시작하자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아악!!! 하, 크하아아악!!!"

신경이 녹아내릴 때는 통각 차단도 소용없는지 곡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나를 포함한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비명을 지르는 중간에 헛웃음이 터져버렸다.

­ 주인 버텨!

'이걸 어떻게 버텨!!!'

물론 퍼져나가는 백염은 온전히 뤼오레의 제어하에 있어 불티 하나 일절 닿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몸에 나 있는 털이란 털은 다 녹아내렸고 입고 있던 옷마저 피부와 함께 녹아내려 신체 일부가 되어버렸다.

가장 심각한 건 검을 든 채 오른쪽으로 쭉 뻗어 있는 오른팔이었는데 피부는 물론이고 밑에 있던 근육과 신경까지 모조리 녹아 한데 엉켜있었다. 신경이 녹아 들어갈 때의 고통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는데 이미 눈꺼풀이 반쯤 녹아내려 눈물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한 채 눈 안에 쌓여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기절을 했어도 수십 번은 했을 것이다. 그나마 고문을 수없이 겪은 나인의 기억 덕분에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언제 놓아버릴지 몰랐다. 아무리 나인이라도 이만한 고통을 느낀 적은 없었으니.

게다가 지금 검을 지탱하고 있는 건 신체의 힘이 아니라 마력이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뼈를 타고 흐르는 마나를 운용해 검을 붙잡아 놓으며 아직도 뤼오레에게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재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하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내게는 1초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나 폭주로 가속화된 사고가 이럴 때는 독이 된다는 걸 체감하며 이 끔찍한 고통이 어서 끝나길 바랐다. 그것이 몬스터가 아닌 내 죽음일지라도.

'잠깐만, 신경과 신경계에 흐르는 마나만 빼내면 되잖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신경과 신경계에 흐르는 마나를 빼내 그것을 몸 위에 추가로 덧입히자 느릿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빠르게 흐르며 열기도 티끌만큼이지만 나아졌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어느 순간 숨이 탁 트이는 문구가 좌르륵 떠올랐다.

[전투 ­ 레이드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7000업이 지급됩니다.]

[등급 외의 시험이기에 등급은 상승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참여자의 인벤토리에 전리품이 자동으로 수납됩니다.]

[보스 몬스터의 처치 기여도에 따라 업이 차등 지급됩니다.]

[2127352업이 지급됩니다.]

나는 그대로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