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미친놈
* * *
창가의 블라인드를 뚫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집안 가득 퍼져나가며 그 온기를 드리우고 있을 때 나는 서서히 잠에서 깼다.
아직 나인의 기억으로 인해 복잡해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일부러 입몽을 하지 않았더니 잠든 사이에 기억이 조금은 정리된 듯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좀 더 잘까?'
그러나 머리의 가벼움과는 별개로 습관적인 고민이 발생한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으레 하던 생각이 이제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하지만 잠을 더 잘지 말지 고민을 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맑아 머리 위로 두 팔을 길게 뻗는다.
"으아……아! 하암!"
밤새 굳어있었을 몸에 혈류가 돌며 활력을 불어넣자 기분 좋은 상쾌함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끄아! 잘 잤다."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대충이나마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내 방과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가글과 세안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상점에서 음식을 구매하는 게 다였지만.
똑똑.
"엘리, 일어나."
"우웅…."
원래는 손님용 방으로 빈방이었으나 이제는 엘리가 쓰고 있는 방문을 두드려 그녀를 깨운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땐 사용하지 않던 식탁 위에 상점에서 구매한 음식을 배치하고 있자 어제 백화점에서 구매한 분홍색 잠옷을 입은 엘리가 눈을 비비며 방을 나왔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엘리에게 오거환을 복용시키면서 몸이 너무 커져 구매한 옷들이 맞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무슨 원리인지 근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엘리의 몸은 그리 커지지 않아 내가 우려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한 볼륨감이 추가되어 옷의 맵시가 더욱 살아난 느낌.
"여기 앉아서 밥 먹어."
"우와! 배달시켰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테이크에 반쯤 감겨 있던 엘리의 눈이 크게 떠진다. 나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
"아니, 상점으로 샀어."
"우와아…! 상점이란 거 정말 신기한 것 같아! 어떻게 이렇게 슝! 하고 음식이 나타나게 하지?"
"마법 같은 거 아닐까? 이거 받아."
엘리가 내게 포크와 나이프를 받아들며 자리에 앉자 그녀의 정수리에 앉아 있던 엘이 몸을 변형하여 그녀의 얼굴을 쓱 훑었다. 그러자 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세안이라도 한 것처럼 맑아졌다.
"히히. 고마워, 엘!"
엘리가 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엘이 기분 좋은지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다시 엘리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곧장 나갈 채비를 해 집 밖으로 나섰다. 아무리 일요일이라 해도 밖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집 밖을 나오자마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주말이라고 집에서 쉬었을 사람들까지도 모두 밖으로 나온 듯했다.
"야야, 저기 봐봐!"
"어디, 어디?"
"저기 아파트 입구 쪽에!"
"헐…. 진짜 역대급이다."
"요즘 사람들 외모가 물올랐다더니 저 사람들은 진짜 장난 없네."
"저런 사람들이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고?"
"머리 봐, 미쳤어! 존나 이뻐!"
"여자도 개 이쁜데 남자 미모 무엇? 우리보다 훨씬 이쁜 듯?"
"아, 남자가 저렇게 이쁘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큰일이다, 큰일."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나무 그늘에 모여서 우리를 주시하며 나누는 대화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라 그런지 몰라도 나와 엘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는 순간까지도 찬사를 금치 못했다.
'그 정도로 바꼈나?'
어제 낮에 돌아다닐 때만 해도 엘리의 은발이 워낙 눈에 띄어서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그때는 내 얼굴이 바뀌기 전인 데다 엘리도 비니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시선이 덜 했는데 오늘은 엘리뿐만 아니라 나까지 주목받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호들갑에 다른 이들도 곁눈질로 우리를 슬쩍 보는 게 느껴졌으나 다행히 그런 상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들 저마다의 관심사에 빠져든 것이다.
"아, 오늘 업 천 이상은 벌고 싶은데."
"그러려면 1등급 던전을 7번은 돌아야 할 걸?"
"……이래가지고 가능하겠냐?"
"그러니까. 아, 유튜브 보니까 2등급 던전 한 번이면 퀘스트 보상만 천이라던데."
"2등급 던전은 무리지. 그런 괴물을 어떻게 잡아. 튜토리얼로 얻은 능력치로는 어림도 없겠더만."
"후우! 그래서 너도나도 1등급 던전으로 몰리는 거잖아. 하루 빡세게 돌아서 천 업만 벌어도 현금으로 환산하면 백만이나 되니까 말이야."
현재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게시글에 따르면 1등급 던전을 도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이 된다고 한다. 상점에는 여러 물품이 있는데 그중에는 가성비가 좋지 않은 음식 같은 경우도 있지만, 장신구나 재료 쪽에 있는 귀금속 같은 경우에는 가성비가 상당히 좋아서 1 업당 천원 꼴의 효율을 내는데 그렇게 되면 천 업만 벌어도 하루 수익이 백만에 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천 업을 벌기란 보통의 사람들로선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오늘로 7일 차가 된 이 시점에서 오우거나 구울 등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2등급의 던전을 돌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때문에 1등급의 던전으로 수요가 몰렸지만 던전의 리젠 시간이 있었기에 하루에 천 업을 벌기는 고사하고 500 업을 버는 것조차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던전 파밍(Farming)을 위해 도시에서 지방까지 내려가는 이도향촌(????)의 현상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 기사까지 보도되어 사람들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상관없지.'
이미 던전의 등급은 상관이 없어질 정도로 강해진 나다. 현재 발견된 던전 중 가장 등급이 높은 던전은 5등급이라고 하는데 던전 개방까지 걸리는 시간만 해도 1년에 달한다고 알려진 5등급의 던전은 놀랍게도 속속들이 클리어되고 있다고 한다.
'그 녀석들일까?'
실력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6등급의 레이드 전투 시험에서 무리를 짓고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5등급 던전 역시 인원의 제한이 있었는데 6등급의 인원이 열다섯이나 된다면 다섯씩 인원을 나눠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인원이 열다섯이 끝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 화려한 장비들은 역시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얻어낸 게 분명했다. 등급 시험으로 벌어들이는 업에는 한계가 명확했으니.
그런 걸 생각하면 고등급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은 내게도 필요한 일이었으나 아직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사실 급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제 이후로 너무 마음이 풀어진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여유를 부리다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경각심 또한 존재했기에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어?"
그런데 어제저녁을 생각했던 나는 눈앞의 던전을 보고 당황했다.
[던전 : 망자의 무덤 (2등급)]
던전 형태 : 던전형.
추천 인원 : 3~5인.
보스 유무 : 유.
현재 상태 : 입장 불가. (몬스터 리젠 중 01:34:22)
던전 개방까지 남은 시간 : 30일
"왜 그래?"
"던전이 클리어 됐어."
2등급 던전의 몬스터 리젠 시간은 정확히 2시간, 지금 남은 시간을 보아하니 26분 전에 누군가 이 던전을 클리어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2등급 던전을 찾는 족족 클리어되어 있었다.
[던전 : 놀 평원 (2등급)]
던전 형태 : 필드형.
추천 인원 : 3~5인.
보스 유무 : 유.
현재 상태 : 입장 불가. (몬스터 리젠 중 01:41: 37)
던전 개방까지 남은 시간 : 30일
'어제 저녁에만 해도 널널했는데.'
어제저녁. 엘리와 등급 시험을 치르러 노태산으로 향하는 동안 확인한 2등급 던전은 모두 입장 가능 상태였는데 오늘 아침은 무슨 일인지 하나 같이 클리어된 상태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래도 2등급에 오른 사람들이 꽤 생겨난 모양이다고 생각하던 찰나 이제 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어?"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오른손에는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청년, 우주혁이었다.
"야, 주혁아!"
"…예? 절 아세요?"
내가 반갑게 이름을 부른 것과는 상반되는 당신이 대체 누구시길래 나를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우주혁의 반응은 예상했던 바였다.
"나야, 나! 유 현."
"혀, 현이 형이라고요?"
"그래, 모습이 많이 변했지? 다른 사람들도 못 알아보더라."
"아니야, 괜찮아. 너도 전에 봤잖아."
"……뭐하냐, 너?"
갑자기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올려 팔과 이야기를 나누는 우주혁을 황당하게 바라보자 녀석이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인다.
"아, 이 친구가 말을 걸어서요."
"말도 걸어? 전에는 안 그러던데."
"아…. 보통은 잠들어 있긴 한데. 오늘은 형을 만나는 순간 갑자기 깨어났네요."
"갑자기?"
"네…. 갑자기…하하…."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에 묻지 않으려다 직감적으로 알아야 할 것 같아 물었다.
"뭐라고 하는데?"
"그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잠시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그러나 우주혁의 입을 열고 내뱉어진 말은 전혀 예상외였다.
"형이 너무 강하다고. 조심하라고 하네요."
"뭐…?"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지금은 감당이 안 된다고…."
'지금은 이라….'
나중엔 감당할 수 있다는 건가?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 네 친구 좀 이상하다."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저는 세상에 정상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형. 물론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정상인 척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완벽한 사람은 본 적 없거든요."
'뭐야,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의 가치관을 늘어놓자 속으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뭐, 완벽하면 그게 신이지. 사람이겠냐? 그렇지만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저 다를 뿐이지."
"그저 다를 뿐이다…. 좋은 말이네요!"
"근데 혼자 돌고 있었던 거야?"
"네, 능력이 점점 익숙해져서 2등급은 혼자서도 충분하더라고요."
"이틀 전만 해도 부작용이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 그날 형이랑 같이 던전 돌고 난 후로 왜인지 부작용이 상당히 줄어들었어요. 어제도 혼자서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저녁때까지 혼자 열심히 달렸죠. 오늘은 더 괜찮아져서 흑화 정도는 이제 계속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오, 그래? 축하한다. 그럼 오늘 형이랑 같이 돌래?"
어차피 던전 퀘스트의 보상은 혼자나 다섯이나 동일하게 주어진다. 물론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습득하는 업의 양은 기여도에 따라 나누어지겠지만 그래도 업의 취득에서는 파티를 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좋아요! 근데 옆에 분은…?"
아직 애라 그런지 엘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이 풋풋했다.
"아, 사촌 누나야. 외국에서 와서 한국말은 못 해."
"어? 형 그거 몰랐어요?"
"또 나만 모르는 게 있었어?"
"파티창이나 귓속말로 대화하면 목소리가 통역돼서 들린대요. 그래서 언어가 달라도 친구나 파티만 맺으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 진짜? 한 번 해보자."
엘리가 오고 난 후 파티만 구성해 봤지 파티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아니, 형!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근데 우주혁이 구성한 파티에 참여하고 파티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우주혁이 매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먹냐?"
"등급이 7등급이에요!"
"아, 그거? 당연히 등급 시험을 봤으니까 올랐지."
"아니, 이틀 만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어, 가능하더라. 일단 파티 대화나 좀 해볼래?"
아아, 형 들리세요?
"나야, 잘 들리지. 엘리. 저 친구가 하는 말 들려?"
응, 들려! 안녕하세요!
아, 네. 누나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우주혁을 보고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큭, 쟤가 몇 살인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아마 나이로 따지면 우주혁의 부모님보다도 몇 배는 많을 테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뻘이었으나 보이는 외관상은 누나가 아니라 친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히히. 그래, 안녕! 이거 좋다. 이러면 한국어 공부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음, 뭐 그래도 배워놓는 게 좋을걸?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파티 대화나 귓속말로 대화할 수는 없잖아. 편의점에 가서 친구 신청하고 파티 신청하고 있을래?"
아, 그럼 해야겠네. 그래도 금방 잘할 자신 있어.
"그래. 얼른 적응하렴."
근데 누나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현이 형보다 누나시면….
'아, 나이는 딱히 생각 안 해봤는데…. 음…. 내가 28살이니까 서른은 좀 그렇고 29살이면 되겠다.'
"엘리는 29살이야. 나보다 누나지만 나랑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고."
와, 그 나이로는 안 보이세요.
웅, 고마워. 이름이 주혁이?
아, 넵! 우주혁입니다.
"이제 진짜 돌아보자. 근데 남은 던전이 있을까 모르겠네."
저쪽으로 가면 제가 아직 안 들어간 던전이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빨리 가보자!"
가자, 가자!
그렇게 우리는 셋이서 던전을 돌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주혁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에는 입장 가능한 던전이 종종 있었고 그곳에서 등급 시험과 오거환으로 늘어난 엘리의 힘을 파악하고 익숙해졌다던 우주혁의 힘도 파악했다.
3등급으로 올라서며 얻은 30의 잔여 능력치를 마력에 모두 투자하고 내가 준 마력이 깃든 반지까지 착용한 엘리는 정령인 엘의 크기를 2미터 가까이 늘릴 수 있었고 오거환으로 향상된 강인한 근력과 마력을 융합하여 화살에 마나를 담아 쏘아 보냈는데 그 위력이 일격에 2등급의 몬스터가 절명할 정도였다.
우주혁 역시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붕대를 벗어내고 능력인 흑화를 사용하였는데 확실히 던전에 있는 내내 계속 사용하였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내친김에 저번에는 누가 이미 클리어하기도 했고 아직 서로의 능력이 미숙한 상태라 들어갈 생각을 못 했던 먹자골목 중앙의 3등급 던전까지 클리어하고 나자 시간이 12시가 거의 다 되었다.
"저 사람들 지금 셋이서 3등급 던전을 깬 거야?"
"미친, 대박이다! 야야, 사진 찍어!"
나는 3등급 던전을 빠져나오고 나서 들려오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대화 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들 따라와."
어, 어디로요?
"그냥 따라오면 돼."
그리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내기도 전에 자리를 박찼다.
"어어? 사라졌다."
"아, 사진 못 찍었는데."
내가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진이 찍혀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괜히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피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형, 갑자기 왜 뛰신 거예요?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길래."
아….
왜? 사진 찍으면 안 돼?
단번에 이해한 우주혁과는 달리 엘리는 의문을 재기했다.
"우리는 방금 3등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잖아. 강한 게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어."
왜? 강하면 대우가 좋은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만 좋은 대우에는 그만큼 책임이 따르니까 귀찮아져. 그리고 우리가 유명해지면 네 정체가 밝혀질 위험도 올라갈 텐데 내가 정체가 드러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히, 히익! 무조건 강한 건 숨겨야겠네!
과도하게 놀라움을 표하는 엘리를 보고 피식 웃고 있을 때 잠깐 잊고 있던 존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두 분이 무슨 대화를 하고 계신 거죠?
"아무것도 아니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 정체 같은 건 없어! 의심하지 마!
차라리 의심하라고 말하는 게 덜 의심스러울 것 같은 엘리의 첨언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하! 야, 그렇게 말하면 더 의심해."
아하하핫. 맞아요. 누나. 의심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의심스러워요.
히잉!
"하하하하!"
하하하!
혼자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 덕분에 한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던 우리 파티는 큰길에서 잠시 해산했다. 나와 엘리는 어제 김지원과 약속한 점심 약속 장소로 향했고 우주혁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다시 모였을 때는 김지원을 포함한 4인 파티로 다시 던전을 돌았고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둑해질 즈음엔 네 명 모두가 친해져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통금이 있는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엘리는 어제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세계수의 앞에 섰고 나는 7등급의, 엘리는 3등급의 시험의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시험의 방에 입장하자 마자 곧바로 레이드 전투의 문을 열었는데 대기실에선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가 자신의 검을 갈고 있었다.
스윽.
"아, 안녕하세요."
"……."
딱히 인사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검을 갈던 행위를 멈춘 남자가 물 흐르듯 검을 검집에 착검하며 몸을 일으키자 얼떨결에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세를 잡더니.
"…타앗!!!"
이윽고 기합과 동시에 벼락같이 출수한 남자의 검이 내 허리를 베어왔다.
"으악! 뭐야!!"
콰앙!
허리를 활처럼 꺾어 검을 피해내자마자 반사적으로 뻗어 찬 발차기에 얻어맞은 남자가 대기실의 벽면으로 날아가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더니 주룩 미끄러져 추락한다.
"저, 저기 괜찮아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찔거리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자 남자의 몸은 잠시간 꿈틀대더니 곧 사라졌다.
"뭐야, 대체?"
너무도 돌연히 벌어진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남자가 다시 대기실에 나타났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뤼오레를 꺼내 들며 경계하고 있을 때 남자가 느닷없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협! 귀공의 무공에 크게 탄복하였소! 좀 전의 무례는 이렇게 사과드리리다!"
"아,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그리고 이내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린 남자는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로 물었다.
"…용서하셨소?"
"예?"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살짝 숙여 포권을 취하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고맙소. 출중한 무력(?力)만큼이나 그 아량 또한 하해(??)와 같구려. 실로 경탄하고 탄복할 수밖에 없는 인물. 귀공을 만난 걸 내 인생의 업적으로 삼고 앞으로의 무도를 더욱 고강하게 갈고 닦도록 하겠소."
"……."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공의 출신과 성명을 물어도 되겠소? 본인은 소림의 진소룡이라 하오."
'소림? 소림이면 그 민머리 승려들이 사는 곳 아니야?'
"소림인데 왜 머리가……?"
"대머리는 싫다고 하였더니 소림사에서는 쫓겨났소. 하지만 내 근본은 틀림없는 소림이 맞소."
'이거 미친놈이네.'
소림사의 승려가 머리가 밀기 싫다고 쫓겨났다면 두말할 것 없는 미친놈이 맞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출신과 성명을 물어도 되겠소?"
집요하게 물어오는 진소룡의 두 눈엔 흔들리지 않는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 이름 알려주기 싫은데.'
이름 하나 알려준다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지만 저 광기 어린 시선을 받고 있으면 이름 하나만으로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 죄책감은 없다.'
[능력 : 영월공을 습득하였습니다.]
결국, 진소룡의 고집스럽고 끈질긴 시선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마나를 운용해 몸을 가볍게 만든 나는 그대로 영보를 밟아 그의 뒤를 점하고 있는 힘껏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미친놈한테 알려줄 이름 따윈 없어!'
그대로 머리가 터져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진소룡의 몸뚱어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공격대를 구성해 붉은 포털로 손을 뻗었다.
[레이드 전투(7등급 16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공격대원들의 의사를 확인합니다.]
[수락 중(1/1)]
[수락 완료. 레이드 전투(7등급 16인) 포털을 개방합니다.]
"대협!!!"
나는 곧장 포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