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불의 정령 뤼오레
* * *
6등급 레이드 전투 대기실.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에 별안간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기실의 인원을 생각했을 때 상당한 숫자였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허탈함이 엿보였다.
"와…. 난이도 진짜 미쳤는데?"
"이건 깨라고 만든 게 아닌 것 같아."
"난 보스 얼굴도 못 봤다…."
"나도."
"나도 못 봤어."
"나도."
"아니, 누구 본 사람 없어?"
"내…가 봤어."
그들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전신을 검은색 나노 슈트로 두른 남자로, 이름은 김우석이었다.
"어떻게 생겼냐?"
"보긴 봤는데 정말 스치듯이 잠깐 본 거라서 이걸 봤다고 하기도 애매하긴 한데. 온몸이 돌과 용암으로 된 거대한 괴물이었어. 크기는 거의 아파트만 하던데?"
김우석이 자신의 기억이지만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하자 다른 사람들이 크게 놀란다.
"세상에! 크기가 아파트만 하다고? 대체 얼마나 큰 거야?"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야? 지형지물을 몬스터로 착각했다든가."
"나도 모르겠다. 분명 내 눈으로 본 건데도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어쨌거나 16인 레이드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들어가자마자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버리는 환경이라면 도저히 깰 수 없으니까. 8인 레이드나 4인 레이드로 내려가는 게 어때?"
로브에 보석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여자, 김민주가 제안을 하자 미스릴 갑주를 걸친 남자 박지훈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어떤 환경인지 알았으니까 준비해서 도전해볼 만하지 않아? 뜨거운 환경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시험의 방으로 돌아가서 상점에서 열을 막아주는 약품이나 장비 같은 걸 구매하는 거지."
"흠…."
"그래, 도핑 새로 해서 도전해보자. 여태까지 한 번에 올라온 것도 아니잖아."
"맞아, 의외로 열기만 제압하면 별거 아닐 수도 있어."
"근데 그 사람은 포기했나 보네."
"그러게. 안 오네?"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구나."
김민주는 장비는 형편없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가졌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그때 김우석이 다시 손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데…."
"그거?"
"그 사람 말이야. 유현이라는."
"그 사람이 왜?"
그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며 자신의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안 받는 거 같더라고."
"뭐?!"
"왜, 뭐라도 본 거야?"
"마찬가지로 뭘 봤다고 하기는 그런데…. 우리가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외치기는 했어. '다들 마나를 운용하세요!' 였나?"
"어? 그건 나도 들었는데?"
"나도 어렴풋이 들은 것 같아. 소리 지르느라 바빠서 제대로 들은 건 아니지만."
"나도 얼핏?"
"몬스터에 대해선 내 기억이 확실하진 않은데 그 사람이 우리 앞에서 외친 건 확실해. 몸에서 푸른빛을 뿜어대고 있었어. 근데 딱 거기까지야 내가 본 건."
"그럼 그분 혼자서 지금 싸우고 있는 거 아니야?"
김민주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자 다들 코웃음을 쳤다.
"에이, 그럴 리가. 이미 죽었겠지."
"뭐, 열기를 막는 도구라도 가지고 있었나 보지."
"그래, 열기를 버텼다고 해도 혼자서 뭘 하겠어. 애초에 16인이 함께 잡아야 하는 몬스터일 텐데."
"비장의 한 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힘들지 않을까?"
"킥, 그리고 마나를 운용하라는 게 뭔 개소리냐? 마나를 운용한다고 열기를 막는 게 가능한 줄 아나? 마나가 무슨 만능도 아니고."
그녀는 자신과 유현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반발을 하고는 장비가 부족한 그를 깔아보며 버스를 태워준다는 식으로 비아냥댔던 오진석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오진석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말을 이었다.
"하여간 자기가 아는 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까. 이래서 책을 많이 읽으라잖아. 책 한 권만 보는 사람은 바보가 된다고."
'그게 적절한 비유가 맞냐? 게다가 해석도 틀렸어. 아마도 책을 한 권만 본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어휴, 우리는 그런 바보가 되지 말고 얼른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보자."
그 이야기는 오직 하나의 책만 읽고 그 속의 내용을 맹신하여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유현이라는 사람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의 눈과 마주칠 때면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던 것이다.
'어휴, 멍청이. 한숨은 내가 나온다. 자기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으스대는 오진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필요에 의해 함께 하고 있기도 했고 괜찮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떤 무리든지 간에 사람이 많아지면 불편한 사람은 꼭 있었다.
"그래, 다들 준비해서 모이자."
잠시 후 시험의 방에서 방염의 기능을 갖추게 해주는 냉각수와 빙설액을 몇 개씩 갖춰온 그들은 먼저 비약을 마시고 이어서 냉각수를 들이키며 자신의 몸 위로 빙설액을 흩뿌렸다.
[냉각수]
등급 : 7
설명 : 복용 시 체온을 급격히 낮추어 열대 기후에서도 온종일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다. 단, 부작용으로 심각한 배탈을 겪을 수 있다.
[빙설액]
등급 : 7
설명 : 공기와 맞닿으면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해 열기에 쉽사리 녹지 않는 얼음 알갱이를 형성하는 특수 용액. 동상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아서는 안 된다.
냉각수를 복용하고 빙설액을 몸 위로 뿌리고 나자 엄청난 한기가 몰아치는지 다들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으, 으어, 어어! 이, 이거 들어가기 저, 전에 어, 얼어 죽겠는데?"
"미, 미쳤다, 개, 개 추워!"
"에,에에엑…! 빠, 빨리 들어가자!"
공격대장을 맡고 있던 김민주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손을 덜덜 떨며 포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드 전투(6등급 16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공격대원들의 의사를 확인합니다.]
[수락 중(2/15)]
[수락 중(8/15)]
[수락 중(15/15)]
[수락 완료. 레이드 전투(6등급 16인) 포털을 개방합니다.]
조금 전보다 인원이 한 명 줄었지만, 전과는 다를 것이다. 몸을 뒤덮은 극한의 한기에 다들 그런 생각을 했다.
"흐아아! 살겠다!"
"딱 좋은데?"
"좋아! 가보자고!"
[전투 레이드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2번째 도전입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염귀]
등급 : 10
설명 : 용암이 흐르는 화산 지대에 서식하는 자연형의 대형 몬스터. 온몸에 흐르는 용암을 이용해 자신의 먹잇감을 녹여 영양분을 흡수한다. 자연형의 몬스터답게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분리하는 공격을 일삼는다. 약점은 오로지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핵을 파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어, 어어…?"
"에…? 10등급……?"
"저걸…. 잡으라고…?"
6등급 시험의 방에서 그들이 경험할 몬스터의 등급은 본래라면 7등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드 전투 시험은 힘을 합하여 그보다 윗 단계의 몬스터를 잡는 시험. 그렇기에 4인용 시험은 8등급, 8인용 시험 9등급, 16인용 시험에선 무려 10등급의 몬스터가 나타난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등급인 6등급보다 무려 4단계나 차이가 나는 몬스터가 나타나는 셈이지만 6등급 시험에 도전한다는 건 7등급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니까 3단계의 차이가 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7등급은커녕 온전한 6등급이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이 있었으니 실질적으로는 4단계 이상의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등급의 격차란 실로 커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수록 그 차이가 극심해지기에 등급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그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차이가 났다. 물론 등급이라는 게 전투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게의 몬스터는 그 능력이 전투에 치중되어 있었고 시험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당연지사 그 등급에 걸맞은 전투력을 갖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6명, 지금은 15명이지만 그만한 인원으로 4단계나 차이가 나는 몬스터와 전투 행위를 한다는 건 굉장히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야말로 자살행위. 오히려 그 숫자를 늘려 제곱으로, 그러니까 4, 8, 16인처럼 공격대의 숫자가 배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4, 16, 256인으로 제곱으로 인원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결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숫자의 우위에 있다고 한들 개미가 코끼리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코끼리의 뒹구름 한 번이면 개미 떼는 자신이 무엇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터져나가고 말겠지. 그 과정에서 코끼리의 힘이 소모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레이드 전투의 효율을 따진다면 인원이 적어지더라도 등급의 차이가 적은 쪽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초행자였으니.
그리고 처음을 개척하는 자에게는 남들보다 앞서가는 즐거움도 물론 있겠지만 그만큼의 고통 또한 따르기 마련이었다.
"아, 안돼!!"
"꺄악!"
콰아아아앙!!!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열기가 이글거리는 화산 지대에 널리 울려 퍼졌지만, 그 굉음을 들어줄 자는 오로지 굉음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염귀뿐이었다.
염귀가 침입자들의 몸에 뿌리내려 양분을 흡수하고 있을 때, 드넓은 화산 지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험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각 수많은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느릿하게 나아가고 있을 때 홀로 앞서 나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
"오, 마이 갓!"
막대한 수치의 업에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아니, 이렇게나 준다고? 상점.'
[시험장 내부에선 상점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상점 이용 불가 메세지에 포털을 통해 시험의 방으로 돌아가 업을 확인하니 쌓여있는 업이 10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상점 등급 6]
ㅁ 업 : 1028302
무기
방어구
장신구
소모품
채집 도구
제작 도구
책
재료
"허…. 허허! 허허허허!"
고작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벌어들인 업의 양에 재차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막으려면야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지만 입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을 필요는 못 느꼈다.
"푸하하하, 파하하하하하!"
'밖에서 이렇게 웃었다가는 또 미친놈 소리나 듣겠지.'
전에 전과가 있었기에 한층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시원하게 웃어두자.'
"끄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꽤 오랫동안 웃음을 쏟아내고 나니 딱히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뭔가 스트레스가 풀린 듯한 느낌이다.
"아으, 하하. 너무 웃었네."
사실 그렇게까지 웃음이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있다 보니 정신줄을 잠시 놔버린 모양이다.
거기다 웃느라 잠시 깜빡했지만 웃을 일은 이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인벤토리.'
"와아, 뭐야. 이것들."
1등급 던전과 2등급 던전을 돌며 불필요한 전리품은 딱히 담아두지 않았기에 인벤토리 속은 텅텅 비어있었는데 지금은 25칸까지 늘어나 버린 인벤토리가 거의 반절이나 차 있었다.
"상급 마정석 3개에, 최상급 마석 하나, 마력이 깃든 반지는 등급이 5에…. 마력을 10이나 올려준다고? 아, 100 이상은 효과가 없구나…."
마력이 깃든 반지는 미스릴 베이스에 월석이라는 크기는 작지만 마석의 배에 달하는 마나를 품고 있는 돌 조각이 박힌 반지였는데 월석에 담긴 마력을 착용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착용에 제한은 없었지만, 효과에 제한이 있었다.
'비약도 그렇고 효과에 제한이 있는 게 좀 있네. 이건 엘리한테 줘야겠다. 근데 이해가 안 가네.'
분명 착용자가 반지에 깃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마법이 걸려있다고 하는 데 단지 마력이 많다는 이유로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임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마력이 깃든 반지를 껴보았다.
"아."
끼는 순간 느껴졌다. 어떠한 원리로 마나가 전달되는지 왜 나에겐 효력이 없는지도.
내가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순간 월석에 응축되어있던 마나가 미스릴로 퍼지고 이내 내 피부를 뚫고 들어오려는 듯한 힘이 느껴졌지만, 결코 뚫지 못했다.
'내 마력이 너무 강해.'
내 몸 안에 응축된 마나의 양은 이미 몸 전체를 포화할 지경에 이르렀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체내에 흐르는 마나의 양이 많다 보니 마나의 밀집도가 높다고 해야 할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나로부터 상당한 반탄력이 존재했는데 반지에서 마나를 전하는 힘이 그 반탄력을 뚫지 못하고 반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월석의 마력이 소모된 상태였다면 내 마력이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부 마력의 반탄력이 강했다.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 뒤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쓰기보다는 엘리에게 주는 것이 맞았다.
'마력은 지금도 충분하고. 아직 잔여 능력치도 많이 남았으니까.'
실험은 그쯤하고 반지를 다시 빼내 인벤토리 속에 집어넣고는 전리품을 계속해서 살폈다. 인벤토리를 여는 순간부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지만, 나는 맛있는 것은 나중에, 좋은 것은 되도록 늦게 아껴 쓰는 타입이었다. 물론 너무 아끼다 똥이 된 경우가 많아서 요즘은 되도록 중간을 지키려 하지만, 잠깐 인벤토리에서 꺼내지 않는다고 똥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염화석? 불 속성을 가진 돌이라…."
검붉은 색의 돌덩이는 염귀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돌덩이와 비슷해 보였다. 다음으로 보이는 건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을 하고 있는 붉은색 로브였다. 등급은 반지보다 높은 3등급으로 이름은 타오르는 염화의 로브였다. 마력이 깃들진 않았지만 높은 내구성과 불의 속성력을 지니고 있어 불과 관련된 공격을 행할 시 화력이 상승하는 기능이 있고 불에 대한 내성 역시 뛰어나다고 한다.
이제 남은 건 2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담아놓은 듯한 플라스크.
[염화수]
등급 : 3
설명 : 타오르는 불의 정수를 응축시킨 영약이다. 복용 시 불의 속성력이 증가하지만, 조건에 맞지 않는 자가 복용할 시 내부의 장기가 녹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제한 : 체력 100 이상. 마력 100 이상.
꽤나 높은 제한이 있는 영약이었지만, 생김새부터가 위험하게 생기긴 했다. 플라스크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걸 복용하는 게 과연 괜찮을지 의문이었지만 진짜 활활 타오르는 건 이거였다.
화르르륵!
인벤토리에서 꺼내자마자 거칠게 타오르는 화음(火音)과 함께 짙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청색의 검신을 자랑하며 굉장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는 녀석.
[작열하는 염화의 청련검]
등급 : 1
설명 : 뛰어난 불의 속성력을 지닌 청화석을 제련하고 그 속에 불의 정령을 봉인하여 수천일 동안 불구덩이 속에서 속성력을 키운 대검. 평상시에도 불길을 뿜어내고 있지만, 마력을 운용할 시 뿜어내는 불꽃은 배가 된다. 그러나 강제로 검 안에 봉인된 불의 정령은 성격이 포악해져 아무나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함부로 검을 쥐었다가는 화가 난 불의 정령에게 타버릴지도.
제한 : 불 속성 20 이상.
"앗뜨뜨!"
챙그랑.
안 그래도 뜨거워 보여서 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에 마나를 힘껏 둘렀는데도 열기가 장난이 아니어서 결국 놓아버렸다.
화르르르륵!
내가 검을 놓아버리자 마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건 아마 착각은 아닐 것이다.
'안에 불의 정령이 봉인돼 있다고 했지?'
"오냐,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몹시 탐스러웠지만, 주인도 몰라보고 건방지게 타오르는 검때기에 오기가 치솟았다.
'마나 폭주.'
우드드득!
이제는 내 몸을 두르고 있는 마나가 이글거리다 못해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타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화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모양새가 되자 씩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될 거다.'
나는 땅을 박차며 마나가 활활 타오르는 수도로 검을 내리찍었다.
"뒤져!!!"
콰앙!
커다란 폭음이 울렸지만, 시험의 방 내부는 어느 한 곳 패인데 없이 멀쩡했다. 그리고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검 또한 마찬가지로 깨끗했다.
화, 화르륵!
다만 고고하게 타오르던 짙푸른 청염이 불규칙적으로 일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안에 있는 녀석이 꽤나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케이, 내구성 테스트는 완료했고. 제대로 놀아볼까?"
쾅! 콰쾅! 콰앙! 쾅쾅쾅!
그 후로는 인간이 검을 구타(?)하는 기이한 장면이 계속되었다. 구타라고 하기엔 어감이 너무 폭력적이니 사랑의 매라고 정정하겠다.
어쨌거나 그런 사랑의 매가 지속되자 녀석도 차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불길을 뿜어내는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청염은 뜨거웠다.
쾅!
"아프냐?"
쾅쾅!!
"나도 아프다!"
그래도 처음에는 굉장히 뜨거웠던 청염이 갈수록 익숙해지며 요령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쾅!
"빠르게!"
쾅!
"치고 빠지면!"
쾅!
"안 뜨겁지요!"
쾅! 쾅! 쾅쾅쾅! 쾅쾅쾅쾅! 쾅쾅!
너무 때려서 몸이 후끈후끈해질 때면 잠시 열을 식혔다가 이제는 리듬을 타며 검을 구타, 아니 사랑의 매를 들기 시작했을 때 돌연 날카로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꺄악! 그, 그만해! 이 미친놈아! 대체 언제까지 때릴 작정이야!?
"엥?"
그리고 검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크게 뿜어지더니 청염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아리따운 여인의 형상을 갖추었다.
정령 죽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어?!
그것이 나와 뤼오레의 첫 만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