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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46화 (46/62)

〈 46화 〉 레이드 (2)

* * *

"이런 이런."

화산의 폭발과 함께 터져 나온 화산 가스와 화산재가 수천 피트 상공까지 날아올라 넓은 반경에 짙은 잿빛의 구름을 형성하고 있는 화산 지대 위에 온몸이 화산 암괴와 용암으로 뒤덮인 거대한 괴물과 그에 비하면 벌레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인간이 그들만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과대 평가받고 있는 모양이군요."

"우리라기보다는 아이반 님이 워낙 뛰어나셔서 그런 거겠죠."

"하하.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넣어두세요."

그리고 화산재로 만들어진 구름보다 더 위.

까마득한 상공에선 기다란 은발을 휘날리는 미청년과 검은 머리를 길게 묶은 호남이 허공에 뜬 채 잿빛 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구름에 의해 그 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무언가 보이는 듯 두 존재의 눈동자는 연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저는 입에 발린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저 사실을 명시할 뿐. 아이반 님 정도 되시는 분이니 행성의 관리자로 역임 된 겁니다.

"그렇게 절 치켜세워도 제가 드릴 건 없습니다만…."

한 명은 세련된 디자인의 하얀 정장을, 한 명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검은 한복을 입고 있어 화산재가 두둥실 떠다니는 이곳의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하. 그저 사실을 말한 것 뿐이지 무엇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니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습니다. 고작 일주일 만에 이렇게나 적응을 하다니. 몇몇 나라를 제하고는 다들 적절한 방비는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활용해 성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생각해 낸 기상천외한 발상은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가 아닙니까?"

"흠, 기상천외하다는 말은 동의하지만,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말은 조금 과한 부분이 있군요. 어차피 저런 식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결국, 재능의 벽에 부딪히는 속도가 빨라질 뿐입니다."

은발의 미청년 아이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적하자 흑발의 호남 독고룡이 미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남들보다 빠르게 벽을 마주하면 그만큼 그 벽을 부술 시간도 가능성도 커지니까요. 보통의 필멸자에게 벽을 넘어서기 위한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니.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속담 중엔 시간이 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재밌네요. 그런데 왜 하필 금일까요? 그보다 뛰어난 다른 광물도 많을 텐데."

"아마 보통의 사람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금속 중 귀한 금속에 속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부욱!

"아니, 두 사람 다 여기서 뭐 하세요?"

갑작스레 허공이 찢기며 찢어진 공간 너머에서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의 외모는 단연코 말하건대 경국지색이라 할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건만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여기 어디에 사람이 있다는 거죠? 루나 벨루티스?"

"그렇게 사람 모습을 하고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이반 로튜얼드 씨? 독고룡 씨?"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그녀의 비판에 가만히 있던 독고룡이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이 모습은 그저 취향일 뿐입니다."

"취향이 참 독특하시네요. 아, 저 사람이 요주의 인물이라던 그 '유현'?

"예, 맞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주길 바랍니다. 미스 루나."

"그럼요. 존중해요. 와! 지금 고작 일주일 만에 저렇게 성장했다는 건가요? 일주일 전만 해도 무공도 마법도 무엇도 모르는, 말 그대로 어떤 이능(??)도 갖추고 있지 않았던 평범한 인간이?"

루나의 순수한 감탄에 두 남자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급 성장했더군요."

"맞습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가 가르쳐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생각으로 그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빨리 그가 제 앞에 나타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남자의 미소에 그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맞긴 뭐가 맞아요. 지금 이거 행성법 위반인 거 몰라요? 시스템 참여 행성의 참여자를 일개 개인이 감시하는 건 엄연한 위법이라고요."

"말에 어폐가 있군요. 이건 감시가 아니라 관리자로서 행성 관리의 일환ㅡ"

"그런 걸 권리 남용! 권력 남용이라고 하는 거예요!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

"아니…!"

"하하. 아이반 님, 같이 돌아가시죠. 루나 님 저희 돌아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루나의 말에 울컥해서 반박하려는 아이반의 어깨를 잡고 독고룡이 세상 좋은 얼굴을 하고 말하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금 제가 보는 앞에서 돌아가세요."

"지금요? 아, 예. 알겠습니다. 아이반 님. 돌아가시죠."

"……예."

뭔가 떨떠름해 보이는 아이반의 목소리를 끝으로 아이반과 독고룡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루나가 찢고 나온 공간 역시 다시 봉합되자 허공엔 잿빛 구름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

딱딱하게 굳은 검붉은 땅 위로 섭씨 천도가 넘는 뜨거운 용암이 줄기차게 흘러 마땅히 디딜 곳조차 여의치 않은 그곳에서 매캐한 공기를 들이켜는 와중에도 황망함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실력이나 좀 보려고 했더니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버려?'

물론 나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화산 지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는 마력으로 상쇄했음에도 한 여름의 땡볕처럼 뜨거웠고 인체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들이켜야 하는 호흡 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머리가 조금씩 어질어질했다.

'아, 이럴 때 나노 슈트가 있었다면 숨을 쉬는 것도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함께 들어온 공격대원 중에 나노 슈트를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나노 슈트가 열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감당하는 와중에 염귀의 공격에 당해 죽어버린 것인지는 이제 알 턱이 없었다.

'너무 빨리 죽었어. 어떻게 10초 땡 하자마자 전멸이냐고….'

그렇다고 내가 몸을 날려 사람을 구하기에는 용암으로 뒤덮인 염귀의 모습이 너무 위력적이었다.

넘쳐흐르던 자신감에 비해 허무한 죽음으로 이제는 염귀의 몸속에 녹아 흐르며 녀석의 양분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잠시나마 애도를 표하고는 전방의 염귀를 바라본다.

이곳의 지면과 비슷한 색감의 검붉은 돌덩이와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몬스터는 열다섯 명의 양분을 흡수하는 중인지 시체 위에 몸을 박은 채 꿈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야. 빠르게 끝내야 돼.'

지형의 특성상 오래 있을수록 내게 불리한 여건이기에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마음먹고는 곧바로 마나를 끌어 올린다.

'마나 폭주.'

까드드득.

만드라고라로 인해 변해버린 육체는 정말 경이로웠다.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만 향상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 이를테면 마나 회로 자체가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그 전이 수풀도 무성하고 길도 드문드문 끊어진 숲길이었다면 지금은 뻥 뚫린 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마나의 유동에 거리낌이 없었고 마나 폭주로 인해 폭발적으로 부피를 늘려가는 마나를 탄력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여느 때보다 늘어난 마나량이었지만 몸에 느껴지는 부담은 최소화된 상태.

몸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에 곧장 인벤토리에서 구울의 손톱을 꺼내 던진다.

콰앙!

머리나 가슴이라고 할만한 부분이 없이 기괴한 모습이기에 그냥 중앙을 향해 던졌는데 중앙에 거대한 크레이터와 함께 염귀의 속살이 드러났다. 염귀의 몸속은 역시나 뜨거운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겉을 덮고 있는 붉은색 용암보다 더 샛노란 것이 더욱 뜨겁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의도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단숨에 몸을 터뜨릴 작정으로 마나를 둘러 때려 박은 건데 고작 10미터 남짓의 크레이터만 만들고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염귀가 자신의 몸을 근처에 흐르는 용암에 잇자 몸에 생긴 구덩이가 빠르게 메워졌다. 염귀가 몸을 회복하기 전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고 싶었지만 가지고 있는 무기가 너무 없었다.

"에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주혁이한테 할버드를 양보하는 게 아니었는데!'

전에 우주혁과 함께 던전을 돌며 얻었던 5미터 크기의 거대한 할버드를 떠올린다. 그때 당시에는 인벤토리도 적고 5미터나 되는 할버드를 무기로 사용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우주혁에게 양보했었는데 지금에서야 후회가 되었다.

지금 당장 주변에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절망적일 정도로.

우선은 주변의 돌들을 무작정 집어 던지며 시간을 벌었다.

쾅! 쾅! 콰앙!

그러나 시간을 벌며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대안이 없다.

검을 들어 놈에게 근접해 베어내다가는 불규칙적으로 튀어대는 용암에 튀겨질 우려가 있었고 땅을 박차서 땅의 해일을 만드는 것 역시 주변에 용암이 너무 많아서 나에게 튈 염려가 있었고 애초에 용암으로 된 녀석이라 용암을 뒤집어쓰면 더 세지면 세졌지 아무런 타격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놈의 용암이 문제인데….'

딱딱딱딱.

이를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잠깐 생각에 집중하느라 돌 던지기를 멈춘 사이에 50여 미터에 달하던 염귀의 몸체가 회복을 넘어 더욱 커지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푸쉬이이!

별다른 형체가 없던 염귀의 몸이 둥근 구의 형태로 변하더니 점점 몸체를 부풀리며 압력밥솥에서 나는 증기 배출 소리의 수백 배는 될 법한 소음과 함께 몸 안에서 화산 가스를 뿜어댔다.

'좋지 않은데.'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주변의 큼직한 돌을 집어 던지는 순간.

콰아아아앙!!!

돌이 염귀의 몸과 부딪치자마자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염귀의 몸이 터져나가며 그 몸을 구성하고 있던 돌과 용암이 주변 일대를 덮쳐간다.

파바바바박!

'이런 미친!'

그물처럼 촘촘하게 뻗어 나가는 용암을 피해낼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급히 인벤토리에서 놀의 검을 꺼내며 검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마나를 둘렀다.

그리고 몸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마나 폭주를 진행하여 터져나갈 듯한 몸의 힘을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팔로 이어 보내며 무진장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른다.

슝.

한 번의 휘두름으로 생겨난 검풍에 의해 내게 뻗어오던 용암과 돌무더기가 거칠게 갈라지지만 이로 인해 더 불규칙한 형태로 바뀌어 나를 덮쳐온다.

슈슈슈슈슈슝!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검풍에 폭발이 조각조각 갈라지지만 잠시 주춤할 뿐 여전히 격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더 빠르게. 다른 곳은 상관없어. 내 주변만 막으면 돼.'

사사사사사사삭!

내 의지에 따라 점점 빨라지는 검격은 점점 더 수많은 검로를 따라 내 주변을 촘촘히 메우기 시작했고 이어서 몸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는 검막이 형성되자 창이 하나 떠올랐다.

[능력 : 검막을 습득하였습니다.]

과광. 과과광.

일대에선 분명 거친 폭음이 울리고 있겠지만 주변을 형성한 검막은 소리마저 베어내고 있는지 먹먹한 소리와 땅을 울리는 거친 진동만이 주변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진동이 끝나고 검막을 해제하자 한껏 쪼그라든 염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미터 남짓한 용암 사이에 사람 머리만 한 은빛 쇳덩이가 두둥실 떠 있다.

'저게 핵인가?'

몸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크기였지만 이제는 몸에 비해 너무 컸다.

나는 곧장 몸을 날려 쇳덩이를 베었다.

샤악!

[전투 ­ 레이드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6000업이 지급됩니다.]

[등급 외의 시험이기에 등급은 상승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참여자의 인벤토리에 전리품이 자동으로 수납됩니다.]

[보스 몬스터의 처치 기여도에 따라 업이 차등 지급됩니다.]

[987452업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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