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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43화 (43/62)

〈 43화 〉 성장 (3)

* * *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뿌리는 잔뿌리마저 사람의 몸통보다 배는 굵었고 뿌리가 땅을 파고든 깊이는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뿌리가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높은 빌딩 여럿을 합쳐놓은 듯했고 그 위로 넓게 퍼진 굵고 기다란 가지와 커다란 나뭇잎은 하늘을 덮는 천막처럼 밤하늘을 가득 덮어 달빛 한줄기조차 땅에 들지 못하게 했다.

기이하게 벌어진 뿌리 사이의 장막에서 뿜어지는 푸른빛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는 그곳에서 귀곡성 같은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 세계수님…!"

산속의 거대한 나무와 장막의 푸른빛, 여자의 울음소리가 한데 엉켜 만들어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근처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입을 막고는 작은 목소리로 여자를 다그친다.

"엘리, 제발 그만 좀 울어!"

남자의 이름은 유현. 바로 나였다.

"흡, 읍, 읍!"

장막 근처의 풀숲에서 내가 엘리의 입을 막자 이제는 코로 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코에서 소리와 함께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아이, 진짜. 콧물!"

나는 질색을 하면서도 엘리의 입을 막은 채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엘도 엘리가 걱정되었는지 엘리의 눈앞을 날아다니다 그녀의 머리를 꼭 안았다.

"하아, 괜찮아. 괜찮아…."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어깨를 토닥여주자 들썩이던 엘리의 어깨가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즘 손을 떼며 손에 마나를 불어넣어 질척이는 콧물을 떼어낸다.

"으으…. 이제 좀 괜찮아?"

"후우우. 응! 괜찮아졌어."

"대체 왜 그렇게 운 거야?"

"그건…."

금세 시무룩한 표정과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아차 싶었다.

'아오, 멍청이! 괜한 질문을 해서!'

그러나 다행히도 엘리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진 않고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겉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알던 세계수님과 너무 달라서 무서워서 울었어."

"음?"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작고 초라한 모습이 네가 알던 세계수와 너무 달라서 울었다는 거 아니야?"

"그것도 맞는데…. 그게 다는 아니야."

"그럼…?"

엘리는 손을 들어 세계수의 뿌리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말했다.

"인간들은 잘 모르지만, 엘프는 세계수님이 보내는 신호를 느껴. 그 신호는 마치 언어와도 같지만, 그보다 훨씬 강렬히 심상에 새겨지는 느낌을 받고는 해. 그런데…. 이 세계수님한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마치 죽은 것처럼. 죽은 세계수님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울음을 못 그쳤는데 가까이 있어 보니까 죽은 것 같지는 않네."

"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아졌다는 거지?"

"응, 걱정하게 해서 미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엘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아니야. 고개까지 숙일 필요는 없어. 일단은 진정 좀 하고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자."

"알겠어."

엘리가 우는 바람에 오늘은 엘리의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한 것으로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갈까도 했지만, 이미 몸이 새로운 힘에 취해 한껏 달아오르기도 했고 나도 엘리도 하루빨리 성장해야 했으니 만족하지 않고 끝장을 보기로 했다.

"지금 잔여 능력치가 15지? 체력도 15고?"

"맞아. 지금 올릴까?"

"아니, 잠시만…."

'애매하다.'

일단 던전을 돌며 생각해보기로 했지만, 막상 세계수 앞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지금 능력치로는 체력만 올려서는 등급 2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그렇다고 다른 능력치를 올리기에는 오거환의 사용 시기가 늦춰지는 게 아깝고….'

"혹시 전투 말고 뭔가 특출난 취미 같은 건 없었어?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채집하거나?"

엘리가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음…. 이것저것 많이 해보기는 했는데 그중에 딱히 취미라고 할만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것도 꽝인가? 그냥 천천히 단련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뭔가 아쉬워 한 번 더 물었다.

"등급 시험은 20가지나 돼서 꼭 전투와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시험을 치를 수 있어. 뭔가 없는 거야?"

"으음…. 모르겠어. 일단 한 번 직접 봐보면 안 될까?"

"그럴래?"

'그래, 일단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다 얻어걸릴 수도 있고.'

나는 엘리를 데리고서 장막 앞으로 향했다. 9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장막 앞에는 등급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아, 또 죽었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장막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종종 시험을 통과했는지 떠들썩하게 환호하는 자도 있었다.

"야! 나 2등급 됐어!"

"뭐라고?! 어떻게 잡았어! 그걸?"

그런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의 관심이 단번에 쏠렸다.

'아직 2등급도 많지는 않나 보네.'

꿈 때문에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내일이 돼야 세상이 변한 지 딱 일주일이 된다. 그 기간에 트롤을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건 상태창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나나 우주혁같은 경우가 특별한 것이지 보통은 1등급 시험조차 통과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럼 다녀와."

"응!"

엘리가 등급 시험을 치르러 장막 속으로 들어가고 내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의 두 사람이 보였다.

"아, 너무 쌔.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계속 재생하는데 어떻게 잡으라는 거지?"

"후우, 오빠 그만하고 가자. 유튜브 보니까 한 번에 목을 베거나 재생하기 전에 상처를 불로 지져야 재생하지 않는데."

활을 든 여자와 창을 든 남자는 방금 막 시험을 치르고 나왔는지 낭패가 역력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말은 쉬운데…. 어떻게 한 번에 목을 베지. 현이 형은 대체 어떻게……응?"

"왜 그래?"

"아니, 저기 저 사람이 우리한테 손을 흔드는 것 같은데…?"

"응? 어디…? 음? 누구지?"

고작 이틀 만에 나를 잊지는 않았을 테고 바뀌어버린 외형 때문에 나를 못 알아보는 듯했다.

'쟤들 만났을 때는 등급이 2였으니까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달라 보이겠네.'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내 이름을 밝혔다.

"나야, 나. 유현."

"혀, 현이 형?"

"현이 오빠?!"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는다.

"그래, 모습이 좀 바뀌었지? 민호야, 지혜야?"

"형! 조금 바뀌신 게 아닌데요? 정말 몰라봤어요!"

"진짜요! 엄­청 멋있어 졌어요, 오빠!"

김민호와 이지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아니에요. 진짜 멋있어 졌어요. 분위기도 뭔가 달라진 것 같고…. 그런데 형도 등급 시험 보러 오신 거예요?"

"응? 뭐, 그렇지?"

"와! 대단해요, 오빠! 이틀 전에도 2등급이셨는데 벌써 3등급이 되시려고요?"

'3등급은 너희들 만난 날에 되었다만….'

굳이 밝히지는 않고 수긍했다.

"응, 도전해 보려고."

"와, 저희는 아직도 1등급인데…. 현이 형! 어떻게 하면 형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

"맞아요, 현이 오빠! 알려주세요!"

어차피 엘리가 나올 동안 할 것도 없었기에 두 사람에게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어…. 너희들 능력치부터 알려줘 볼래?"

"저는 체력이 15, 근력이 20, 민첩이 17, 정신력이 12, 마력이 0이요."

"저는 체력이 13, 근력이 17, 민첩이 15, 정신력이 12, 마력은 0이요."

"흐음…."

두 사람의 능력치를 듣고 어떻게 단련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하는 와중에 장막을 뚫고 엘리가 빠져나왔다.

"어, 엘리! 벌써 나왔어?"

"유현! 나 통과했어!"

"뭐? 정말?"

"응! 진짜야! 파티창 확인해 봐."

믿기지 않는 사실에 재빨리 파티창을 열어 확인해 보니 정말 엘리의 등급이 2로 바뀌어 있었다.

"와…! 어떻게 통과한 거야?"

엘리는 손가락을 V자로 만들어 내 쪽으로 뻗고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생각보다 쉽던데? 지식 시험을 치렀는데 전부 내가 아는 내용이었어."

"지식 시험?"

"응! 모험의 문 안쪽에 있는 시험! 문제는 20개 정도 됐는데 쉬웠어!"

"허…. 대박이네. 잘했어, 잘했어."

"히히, 다음 등급 시험도 봐볼까?"

"그래, 한 번 도전해봐!"

"응! 그럼 갔다 올게!"

엘리가 다시 장막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김민호와 이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둘 다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와…. 방금 그분은 형 여자친구분이에요?"

"미친. 존나 이뻐. 오빠 여자친구예요?"

"어? 아냐, 그냥 사촌 누나라고 보면 돼."

지금 엘리는 내 사촌 누나로 설정을 잡아놨다. 내일 김지원에게도 똑같이 소개할 예정이다.

"사촌 누나라고요? 엄청 젊어 보이시던데…."

"나는 늙어 보이냐?"

"아, 아뇨.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영어는 아닌 것 같던데."

"좀 멀리서 와서 말해도 잘 모를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희들 마력이 0인 건 너무한데?"

"예? 인터넷에선 마력보다는 근력이나 민첩에 투자하는 게 좋다고…."

"맞아요. 마력은 올려도 느껴지는 변화가 없다고 들었어요."

"자, 봐."

그그극!

나는 손날을 세워 그 위에 마나를 두르고 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근력이 워낙 상승해서 그런지 바닥이 깊게 패인다.

"와아!"

"뭐예요?"

"봤지? 이게 마력의 힘이야. 마력은 마나를 올려주는데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이런 식으로 손에 두르거나 무기에 두르는 것도 가능해져. 육체의 기능도 강화할 수 있고."

"아니, 인터넷에선 마력 올리면 완전 손해라고 그랬는데…."

"아, 인터넷에 완전 당했네."

두 사람이 축 처진 어깨로 고개를 떨군 채 머리를 감싸고 낙담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아냐, 당한 건 아니야. 체력이나 근력, 민첩을 올리는 게 효율적인 게 맞긴 해. 보통은 마력을 올려도 마나를 느끼지도 못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는 소량이라도 마력을 올려두고 마나를 느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 마력을 느끼고 다룰 줄 아는 건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한 필요조건이니까."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요? 이미 잔여 능력치는 모두 사용해 버렸는데."

"음, 마력을 사용하지 못해도 2등급의 몬스터는 잡을 수 있어. 운동을 해서 몸의 성능을 올리면 돼. 기술도 연마하고. 지금 세상에는 세계수가 나타나면서 마나가 가득 차올라 있어서 운동하고 나면 전보다 빠르게 육체가 성장할 거야. 대신 빡세게 해야겠지."

"아, 운동…."

"내일부터 헬스장 끊어야 하나……?"

"그래, 헬스장 좀 다녀. 검도 같은 것도 배우고."

"흐어어어. 알겠어요. 형.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저도 들어가 볼게요. 고마워요, 오빠."

운동하라는 말에 뭔가 혼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 떠나가자 나는 검지에 마나를 불어넣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낙서를 시작했다.

"엘리야, 언제 나오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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