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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40화 (40/62)

〈 40화 〉 적응

* * *

"꺄악!!! 당신 누구야!"

"저, 저기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나는 비명을 지르는 엘리에게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던져줬다.

"이, 일단 이거 입고 있어!"

"돌아보지 마!"

"아, 안 돌아봤어!"

옷을 입고 나자 조금 진정이 된 듯한 엘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분명히 죽었을 텐데…. 저기…이곳은 어디죠?"

"흠…."

턱을 괴고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이곳이 현실이고 엘리가 있던 곳을 꿈이라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느꼈지만, 또, 사실을 말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우선은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기로 했다.

"여기는 한국이라는 나라야."

"한국…? 제가 왜 여기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무겁게 입을 뗐다.

"내 이름은 유현이고."

"유…현…?"

스윽.

그리고 아직까지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응…. 엘리, 정말 미안. 널 파프니움에 데려다주기로 한 약속…. 지키지 못하고 죽게 만들어서 미안해."

"네가 정말 유현이라고…?"

"어, 내가 유현이야."

"일단 일어나 봐."

엘리의 말대로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너무……다르게 생겼는데?"

"…이게 원래 얼굴이야."

"흐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너 과자라면 다 좋아하잖아!"

그런데 답이 틀렸는지 엘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볼을 부풀린다.

"다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건포도 들어간 건 싫어해!"

"아! 그리고 세계수를 좋아한다고 했어!"

"…그럼 내가 싫어하는 건?"

"어…. 건포도를 싫어하고…. 고기도 잘 먹고 빵도 잘 먹고 난 다 잘 먹는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엘프니까 과일이나 야채 같은 것만 먹는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곧잘 먹었었다.

"땡, 틀렸어! 난 물컹한 식감을 가진 건 안 좋아한다고. 근데 말이야…. 왜 다 먹는 거랑 관련지어 말하는 거야?"

"그야…. 네가 내 옆에서 먹기밖에 더했냐?"

아무리 생각해도 늘 뭘 먹고 있는 모습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밤마다 대화를 나눌 때면 그녀가 줄곧 살아온 이야기, 파프니움을 떠나 여행을 하며 겪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지만, 뭐가 싫다, 뭐가 좋다 하는 건 못 들어본 것 같았다.

심지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몸에 약을 주사하여 마력을 잃게 하고 근력마저 쇠하게 만든 인간조차 그 사람들이 나쁜 거지 인간이란 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며 두둔하기까지 했으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였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못했을 것 같다.

"아니거든? 나…나도……!"

엘리가 강하게 부정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점점 시무룩해지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가 작아지고 만다.

"뭘 하기는 했을 거야…."

"그래, 뭔가 하기는 했을 거야. 예를 들면, 청소 같은?"

결국, 내가 찾아내 말을 꺼내고 나서야 얼굴이 밝아지는 엘리.

"맞아! 나 청소했어! 매일! 바닥도 청소하고 이불이랑 베개도 정리하고!"

"그래…. 어쨌든 내가 유현이라는 건 알겠지?"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아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내 눈앞에 떠 있는 튜토리얼이라는 말은 또 뭐고?"

"……!! 뭐라고?"

엘리가 쏟아낸 질문에 놀라 되묻자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훑으며 말했다.

"상태창을 열라고 쓰여있는데?"

'몽환석으로 소환된 사람도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 건가?'

"일단 쓰여 있는 대로 상태창을 열어봐."

"응, 열었어. 잔여 능력치가 마력에 5만큼 자동 분배됐고…. 잠재 능력을 사용하라고 하네?"

"그럼 사용해 봐."

"물이나 불같은 게 필요할 것 같아. 흙이나 모래도 괜찮고."

"응?"

"매개체가 필요해."

'어떤 잠재 능력이길래?'

일단은 필요하다고 하니 엘리를 데리고 화장실 세면대로 향했다.

그리고 물을 틀었다.

"됐어?"

"물이 빠져나가지 않게 할 수 없을까?"

"할 수 있지."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자 세면대에 물이 빠르게 차오른다. 엘리는 어느 정도 물이 차올랐을 때 수도꼭지를 닫고 차오른 물속에 자신의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채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느끼는 듯 눈을 감고 고운 아미를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정령 소환."

보글보글.

그녀의 손바닥으로부터 갑작스레 수포가 일기 시작하더니 세면대에 담긴 물이 점차 위로 떠 오르며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령…?'

물은 허공에 떠오른 채 완벽한 구의 형상이 되자 변화를 멈추고 엘리의 손바닥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손바닥에 내려앉으니 구의 형상이 뭉개지며 그녀의 손가락 사이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꺄하하! 나도 반가워. 넌 이름이 뭐니?"

엘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걸자 물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구의 형상으로 되돌아가더니 이번에는 엘리와 비슷한 뾰족한 귀를 가진 여자의 형태로 바뀌며 입을 벌렸다.

"응응! 진짜?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줄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엘리는 무언가 들리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엘' 이야! 내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엘!"

엘이라 불린 정령은 신이 나는지 엘리의 손바닥 위를 빙그르르 돌더니 다시 형태가 뭉개지며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누비었다.

"히히! 나도 좋아. 앞으로 우린 친구야."

엘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지만, 그걸 보고 있는 나는 그 광경이 신기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기보단 기괴하게 느껴졌다.

'물과 웃으며 대화하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엘리에게 말했다.

"이 세계는 얼마 전부터 방금 네가 경험한 것처럼 시스템의 영향을 받게 됐어."

"시스템?"

엘리의 손가락 사이를 누비던 엘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타더니 엘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가 방금 사용한 잠재 능력이나, 상태창 같은 것들 말이야."

"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은 모두 제각각이야. 내 잠재 능력은 꿈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이었는데 그 능력 때문에 꿈속에서 널 만나게 된 거야."

"꿈속?"

"그리고 꿈속의 인연을 소환하는 도구를 얻게 돼서 널 이곳으로 소환한 거고."

"자, 잠깐만, 나 이해가 안 돼."

엘리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너와 내가 만난 곳이 네 꿈속이라고?"

"어, 맞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우리가 만난 게 꿈속이라는 게?"

나는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했다. 내 잠재 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를 이 자리에 불러들인 몽환석에 대해서도.

"그럼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네 상상이 만들어낸 가짜란 말이야?"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단순히 꿈에서 겪은 것들이 현실에서 통용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럼 대체…난 뭐야?"

엘리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자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정시켰다.

"너는 엘리야. 네가 살아온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겪은 경험과 기억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해?"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시스템이란 걸 만든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누군지 안단 말이야?"

"전에 한 번 나타났었어."

하늘에 떠오른 채 자신을 시스템의 관리자라고 칭한 은발의 미청년, 아이반.

그와 대화하게 된다면 내 꿈이 어떻게 돼먹은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존재를 어떻게 만날 건데?"

"그건……차차 생각해 봐야지. 어찌 됐건 다시 한번 사과할게. 미안."

"사과할 필요 없어, 유현. 그때도 말했지만 네게는 고마운 마음뿐이야. 지금도 날 생각해서 소환해 준거잖아?"

"그래도 미안."

엘리는 방 전체를 쓱 훑더니 물었다.

"여기가 네 집이란 거지?"

"어, 그렇지."

"그럼 집 좀 소개시켜줘."

"그럴까?"

소개할 건 많지 않지만, 하나씩 설명했다.

"일단 여긴 내가 자는 방이야. 여기는 옷장이고 여기는 화장대."

"화장대? 화장을 해?"

'스킨, 로션만 바르는 데 이것도 화장이라고 해야 하나…?'

"뭐, 관리 차원에서?"

"헤에…?"

엘리의 묘한 시선을 피하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컴퓨터라는 건데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는 기계야."

"컴퓨터…?"

"그리고 이건 휴대폰인데 통신기랑 비슷한데 컴퓨터처럼 다양한 정보도 담겨있고 그 외에도 사진을 찍는다거나 노래를 듣는다거나 하는 다양한 기능이 있어."

"사진이 뭐야?"

내친김에 카메라 어플을 켜서 엘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 보기로 했다.

"자, 여기 봐봐."

"여기?"

"응, 네 모습 보이지?"

"아, 저게 나야?"

엘리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렌즈에 손을 뻗기도 하며 신기해했다.

나는 손가락을 V자로 만들며 말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이런 식으로 포즈를 취하는 게 좋아."

"이, 이렇게?"

"어, 좋아! 그럼 한 번 찍어 볼게. 하나, 둘, 셋 하면 찍을 테니까 셋에는 움직이면 안 돼."

"응!"

"하나, 둘, 셋!"

찰칵.

'잘 나왔네.'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집중한 듯 엘리의 입이 벌어진다.

"헤…. 신기해. 나 더 찍을래!"

그렇게 휴대폰을 엘리에게 넘기고는 거실로 향했다.

"이건 티비인데 방송을 볼 수 있어."

찰칵. 찰칵.

"티비? 방송?"

지잉.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아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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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안에 사람이 있어!"

"안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니고 우리가 방금 찍은 사진처럼 영상을 찍어서 나오게 하는 거야. 휴대폰 잠시 줘 볼래?"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보여주었다.

"봐, 이런 식으로 영상을 찍어서 저 기계에서 나오게 하는 거야."

"와, 너무 신기해! 여긴 왜 이렇게 신기한 게 많아?"

"하하, 그리고 이건 전자레인지, 이건 냉장고, 이건 세탁기…. 여긴 빈방이고…. 여긴 헬스방…."

분명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하나씩 설명하다 보니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상점창에서 음식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바깥 구경을 시켜주는 게 나을 것 같고 사야 할 것도 있으니 밖에 나가서 먹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비니를 써서 귀를 가린 엘리는 큰 귀 때문에 비니가 계속 올라가는지 불편을 토로했다.

"모자 너무 불편해!"

비니 위에서 엘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물로 되어 있어서 젖을 줄 알았더니 이상하게도 젖지 않는다.

"불편해도 써야 해. 내가 아까 뭐라고 말했지?"

엘리가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인 게 들키면 나라에서 잡아가서 해부한다고?"

"그래, 여기는 알펜하임 제국보다 더 위험한 곳이야! 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조용히 말해! 너 때문에 잡혀가겠어!"

"하하! 알겠어, 알겠어."

겁을 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찰떡같이 믿고 있는 엘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뭐,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법은 없으니 조심해야지.'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빠르게 강해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뿐만 아니라 엘리까지도.

점심으로는 뷔페를 갔는데 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엘리에게 향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관심이 덜 했다.

몬스터니 던전이니 하는 세상이 되자 은발의 미녀는 크게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이다.

‘일주일 전보다 사람들의 외형이 크게 바뀐 것도 한몫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평균 신장이나 체격이 급격히 커진 게 눈에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뷔페에 도착한 우리는 시간을 꽉 채워 배가 터지도록 먹고는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근처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서 엘리의 속옷과 옷, 신발, 모자 등을 구매하고 내 것도 전부 새로 구매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오버핏의 점퍼였는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바지 또한 운동복을 제외하고는 아예 들어가질 않았다. 신발은 끈을 풀고 나니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래도 두 치수는 더 크게 신어야 해서 전부 새로 구매했다.

'집에 있는 건 이제 다 버려야겠네.'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집으로 옮기고 나자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시켜 먹을까?'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저녁 메뉴를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치킨이나 뜯어야겠네. 엘리도 좋아할 것 같고.'

설마 치킨을 싫어하진 않겠지.

배달 어플로 치킨 두 마리를 주문하고는 휴대폰으로 쇼핑 어플을 켰다.

그리고 물건을 하나씩 주문했다. 침대 프레임, 매트리스, 책상, 화장대, 3단 행거, 옷걸이, 기초 한국어책까지 빠르게 구매를 완료하고는 티비를 보고 있는 엘리 옆에 앉았다.

"한국어 공부…. 할 수 있지?"

아작아작. 꿀꺽!

엘리는 소파에 누운 채 씹고 있던 감자 칩을 삼키고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대륙 공용어도 금방 익혔어."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언어는 모두 혼니아 대륙의 공용어였다. 안타깝게도 말이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에 한국어 공부를 해야 했다.

"좋아, 과자는 그거까지만 먹어. 이제 밥 먹을 거니까."

"엉, 알았어."

부스럭부스럭. 아작아작.

말도 알아듣지 못할 텐데 티비에 빠져있는 엘리는 이따금 손가락으로 엘을 쓰다듬으며 봉지에 담긴 감자 칩을 집어 먹었다.

'금방 적응한 거 같네.'

죽음을 겪으며 트라우마가 생기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평소의 엘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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