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암살자 나인 (12)
* * *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뜨거운 축제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하나가 되었던 두 개의 달이 다시 서로를 멀리한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어 은은하게 세상을 비추던 달빛이 찬란한 햇빛 아래 그 빛을 바래고 고개 숙일 무렵, 창가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툭툭.
"……아."
딱딱딱!
검은 부리로 창을 쪼아대던 까마귀는 반응이 없자 더욱 세게 창을 쪼았다.
"간다 가…."
'지가 무슨 딱따구리인 줄 아나….'
끼익.
경첩의 마찰음과 함께 창이 열리자 도도도도 앞으로 걸어오는 까마귀.
스윽.
녀석은 빨리 받으라는 듯 한쪽 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채 서신이 묶인 발을 내게 뻗는다.
푸다다닥!
"쯧."
끈을 풀자마자 곧장 날아가버리는 까마귀를 보며 혀를 차고는 서신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서신은 정말 오랜만인데….'
길드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배후를 밝히겠다고 한지도 벌써 2주가 넘게 흘렀다.
그동안 단 한 통의 서신도 오지 않았는데 드디어 연락이 온 것이다.
우웅.
푸르게 빛나는 마나가 종이의 공백을 채워가며 글자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 통지
'긴급 통지?'
첫 문장부터 쓰여있는 긴급이라는 단어에 작은 긴장감이 돋아난다.
헤릭스 입니다.
지난 2주간 길드의 남는 인력을 모두 동원하고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의뢰 외에 새로운 의뢰는 모두 거절한 채로 세 단체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황궁, 마탑, 현자의 돌.
그 세 개의 단체를 계속 예의주시하였지만, 우리의 그런 경계태세가 무색하게도 한동안 어떠한 일도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림자 매의 명 아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상황을 살피던 중 3일 전부터 수상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밀거래.
밀수품의 정체는 대량의 마법 스크롤이었습니다.
그것도 제국법으로 유통이 금지된 전투 계열의.
현재 밀거래를 통해 발생한 대규모의 자금이 마탑으로 흘러든 것을 확인하였고 그 직후 마탑에서 실험을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나 평소보다 훨씬 많은 노예를 사들임과 동시에 대량의 미스릴을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스릴 같은 경우는 웃돈을 주면서까지 구매해 제국의 미스릴이란 미스릴은 깡그리 긁어모으는 중입니다.
덕분에 의뢰인을 노리는 배후가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현재 제국 최대의 미스릴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는 제르미온 백작령.
마탑은 그곳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에 그림자 매는 이번 의뢰가 수지가 맞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마탑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조만간 사달이 일어날 것으로 추측, 의뢰 대금을 물고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습니다.
나인님은 이 서신을 받는 즉시 의뢰인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고 그림자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후우."
복귀는 무슨.
어찌 됐든 간에 이로써 배후가 마탑이라는 건 명확해졌다. 예상한 바였지만 입맛이 쓴 건 어째서일까.
길드는 배후의 실체를 알게 되자 발을 빼려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을 헛되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근본적으로 퀘스트에 묶여있었으므로.
'어쨌거나 조만간 사달이 날 것 같다고 하니 혼자서라도 대비는 해야겠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을 벌일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이 짐작하기 힘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우웅……유현…. 거기 서서 뭐해?"
어제 뭘 얼마나 먹었는지 눈덩이가 퉁퉁 부은 엘리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자 그녀를 향해 작게 미소 짓고는 등 뒤로 숨긴 손에 흐르던 마나를 흩었다.
"아냐, 아무것도."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서신을 뒤로하고 조금 일찍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날짜인 4월 4일부터 4월 6일까지 3일 동안은 레이첼의 졸업 시험 기간이다. 그 후 4월 7일은 휴일이었고 시험결과 발표는 9일, 졸업식은 10일, 작위 계승식은 13일이었다.
원래의 예정대로라면 10일 날 졸업식을 마치고 수도를 출발해 12일 저녁 즈음에 백작령에 도착해 여독을 풀고 다음 날 오후에 작위 계승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예정대로 진행하기에는 뭔가 불안해.'
마치 시간이 보이지 않는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기분 속에서 3일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3일이란 시간은 무척 더디게 흘러갔다.
수업을 듣지 않고 시험만 치르고 하교를 하니 더더욱 시간이 남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첫째 날 실전 체술과 기사학개론 시험을 치르고 나서 그다음 날 시험인 실전 검술에 관해 지도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레이첼이 죽고 퀘스트가 실패한 채 현실로 돌아가는 상상.
나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방대한 살인의 기억 때문에 상상 속에서 레이첼이 죽는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다만 죽임을 당하는 레이첼의 표정만큼은 일관되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 상상이 나를 몹시 괴롭게 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아무렇지 않았다.
원래라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맥박이 빨리 뛰는 등의 변화가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불안하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나인의 기억 때문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이 평온을 유지하니 마음도 금세 평정심을 되찾기를 반복했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다는 게 이럴 때 하는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에 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왜 복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번 의뢰는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답하고 작은 도움을 청했다.
그것으로 준비는 끝이 났다.
"후우…."
시험을 치르고 어제 밤을 새웠는지 초췌한 몰골로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레이첼이 보인다. 뒤따라 나오는 그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밤을 새웠는지 하나같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끝이 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아, 형법과 행정법을 한 날에 보다니…."
"정말….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
"으아…. 힐링이 필요해…!"
와그작와그작. 우걱우걱!
"돠둘 수고하져쪄욥!"
엘리가 양 볼에 비스킷을 가득 담은 채 고개를 숙이자 레이첼을 제외한 여자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꺄악! 어떡해!"
"너무 귀여워요! 엘리 양!"
"꺅! 진짜 너무 좋아!"
오히려 꺅꺅대는 그녀들이 더욱 귀엽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레이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잠깐 저 좀 보시죠."
"뭔데 그래?"
"잠깐이면 됩니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동안은 시험에 방해가 될까 싶어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합니다."
"무슨 상황?"
"언제 어디서 아가씨를 노려올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우선 친구들한테 오늘 뒤풀이는 못 간다고 전하세요."
내가 다시 엘리와 레이첼의 친구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레이첼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대체 어딜 간다는 건데? 지금은 못 가."
"제르미온 백작령으로 가야 해요. 지금 당장."
"나더러 이미 잡은 약속을 깨라는 말이야?"
"살고 싶어서 의뢰한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가야 안전, 아니 지금 가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뭐가 위험하고 심각하다는 건데?"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반발이 있자 답답함이 차올랐다.
"이미 길드에선 이 의뢰. 3일 전에 포기했다고요…!"
"뭐…?"
"저한테 복귀 명령 떨어진 게 3일 전입니다. 이제 호위를 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이러고 있는 거니까 답답한 소리 그만하시고 빨리 가서 뒤풀이 못 간다고 전해요."
그렇게 말을 쏟아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상황을 지켜봤다.
"로한 경,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아, 아닙니다."
레이첼의 안 그래도 초췌했던 얼굴이 거의 죽상이 된 채로 입을 열었다.
"저…. 얘들아. 미안하지만 오늘 뒤풀이는 못 갈 거 같아."
"뭐어?"
"아니, 갑자기 왜?"
"동생이……많이 아프대."
"정말…읍!"
괜한 말을 내뱉으려는 엘리의 입을 막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예, 지금 빨리 가봐야 하는 상황이라 뒤풀이는 나중에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아! 우리도 같이 갈까?"
"그래, 병문안은 사람이 많이 갈수록 좋은 거잖아?"
"안돼!"
"안됩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들에게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 하하…. 그게 가족들 외에는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하…. 맞습니다. 나중에 좀 괜찮아지면 그때 들러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어떡해…. 상태가 많이 안 좋나 봐."
"레이첼,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가봐!"
"으, 응! 정말 미안! 우린 가볼게."
밖으로 나서자 검은색 외판의 말 없는 마차가 준비되어있었다. 운전석에는 그림자 매 소속의 길드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둘 다 지리는 모두 파악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어서 타세요. 엘리도 타고."
엘리를 데려가는 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덜렁거려서 놓고 가기도 뭐 했다.
'차라리 옆에 두는 게 속은 편하겠지.'
두 사람이 먼저 올라타고 내가 문고리를 잡은 채 올라타 문을 닫는 순간 레이첼이 바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누구고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일단 자리에 좀 앉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레이첼이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까지 모두.
그리고 마차가 성문을 넘자마자 정말 오랜만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서브 제르미온 백작성을 향해]
퀘스트 설명 :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 나인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임무는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르다. 제르미온 백작가의 후계자를 작위 계승식이 있는 한 달 후까지 호위하는 것. 그리고 그 임무는 이제 끝에 다다르고 있다. 수도를 벗어나 제르미온 백작성까지 후계자를 호위하라.
퀘스트 완료 조건 : 후계자와 함께 제르미온 백작성 도착.
퀘스트 완료 보상 : 몽환석 조각.
이제서야 서브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백작성까지 도착이라….'
여기서부터 제르미온 백작령의 백작성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에 영지에 들려 하룻밤 휴식을 취했을 때의 이야기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
간단한 계획이었다.
예정보다 빠르게 출발하여 뒤늦게 적이 따라붙는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게끔 계속 움직이는 것.
그걸 위해 길드에서 운전에 능하고 지리도 빠삭한 길드원 두 명을 지원받았다.
길드장인 그림자 매로선 내가 이번 의뢰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믿고 지원을 해주었다.
'그만큼 신뢰를 쌓았다는 거겠지.'
놀랍게도 나인은 단 한 번도 의뢰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 의뢰까지도 당당히 완수하여 그림자 매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레이첼 아가씨, 그리고 엘리. 백작성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움직일 테니까 미리 쉬어두세요."
"알겠어."
"응."
이미 피곤함에 절어 있던 레이첼은 금세 차 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고 엘리는 아직 피곤하지 않은지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기 바빴다.
나도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운 상태로 얼마 없는 피로를 풀고 있을 때 한동안 창밖을 보던 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응?"
한쪽 눈을 반개한 채로 반문하자 엘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첼 님을 백작성에 데려다주고 나면…. 나도 파프니움으로 데려가 줄 거야?"
"…그래. 데려다줄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럴 마음은 없었다. 그냥 레이첼만 계승식을 치르게 하고 현실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다녀와야겠네.'
이 모든 게 허상이고 허구일지라도 내가 이 녀석에게 느끼는 친근감이나 정은 진짜였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가서 도와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잘 놀다 왔다는 느낌으로 끝을 맺고 싶다.
"고마워, 유현."
"됐어, 잠이나 자."
낯간지럽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래?
그렇게 두 시간가량 시간이 더 흐르고 창밖을 보던 엘리도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때, 레이첼의 품에서 통신기가 울렸다.
띠띠띠띠.
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에서 깬 레이첼이 가슴팍에서 통신기를 꺼냈다.
달칵.
"여보세요?"
언니. 지금 어디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