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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36화 (36/62)

〈 36화 〉 암살자 나인(10)

* * *

"앗, 말이 조금 이상했나요?"

"……."

'어, 굉장히.'

"생각해 봤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이 가득한 곳에서 혼자 힘으로 원래 살던 곳에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믿을 수 있는 분 같은 유현 님께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누구 맘대로…?'

나는 한숨과 함께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하아….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못 됩니다."

"왜죠?"

"왜긴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죠."

"아하! 그럼 그 일 끝나고 나면 도와주세요! 그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하하…!"

'이 아가씨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구만!'

엘리는 헛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내 나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너무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에 잠시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아니, 어디 가세요?"

뒤늦게 그녀를 붙잡고 묻지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방금 그 웃음은 긍정의 의미 아니었나요?"

'아아, 신이시여….'

이제 신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절로 신을 찾게 했다.

'에이씨, 몰라. 레이첼이 알아서 내쫓겠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레이첼을 마주해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가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짜내며 말했다.

"네가 알아서 해."

'아니, 얘는 또 왜 이래?'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마차 안에서 이 엘프를 어쩔거냐고 했던 양반이 되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예? 하지만…."

"그 엘프를 구한 것도 너고, 노예 계약서를 찢은 것도 넌데, 이제 와서 뭘 상의를 하려고 그래?"

"그렇지만 여기는 아가씨 집이잖아요."

"어, 난 상관없어. 안 그래도 네 전용 시종을 구하려던 참인데. 생각해보니 그 엘프가 하면 되겠네. 대신 급여는 네가 지급하고."

"예에?!"

"그럼 저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거죠? 레이첼 님, 아까는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레이첼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엘리를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엄숙한 분위기를 잡더니 고개를 살짝 숙인다.

"아닙니다. 고생도 많이 하셨을 텐데 기사의 길을 걷는 자로서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여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여기 계신 동안에는 편하게 계세요."

"어쩜 상냥하셔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방문으로 들어가는 레이첼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봤다.

"후, 일단 방으로 들어갈까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꿈속에 들어오고 나서 어째 한숨을 쉬는 날이 는 것 같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우선 착용하고 있던 경갑부터 하나씩 벗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예요?"

"제가 살던 고향, 파프니움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파프니움?"

머리를 굴려 떠올려보지만 파프리카 말고는 비스무리한 것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엘프 왕국에 있는 도시인가요?"

"도시는 아니고 숲이에요. 세계수님이 보호하고 계신 숲 전체를 우리는 파프니움이라고 불러요."

"흠…. 왕국에 세계수가 얼마나 있죠?"

"얼마나 있냐는 게 무슨…? 세계수님은 한 분뿐이세요."

"아…."

지구에 나타난 산 곳곳에 자리 잡은 세계수를 생각하고 물은 건데 이곳은 환경이 다른 모양이다.

'하긴, 애초에 세계수라는 것도 우리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니까.'

"크기는 얼마나 되나요?"

"왕국의 끝까지 가지가 뻗어있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렇게나 크다고? 아니, 왕국이 작은 건가?'

그렇다면 왕국 근처에만 간다면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제국의 수도에서 끄트머리까지 가는데도 한세월이다. 엘프들이 사는 곳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워프를 타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워프란 마정석을 이용한 순간이동 장치로서 마법진의 일종이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소모되는 마정석이 늘어나기 때문에 거리에 비례하여 이용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여기서 제국의 끝쪽으로 이동한다면 족히 백만 골드는 들 것이다.

워프의 특성상 집단적 이동이 가능했기에 함께 이동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비용이 절감되는 구조였지만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 뜬금없이 제국의 끝으로 갈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그리고 100만 골드면 전 재산의 5분의 1이나 되는 금액이다.

그만한 금액을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었고 제국 끝으로 이동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거기서 엘프 왕국까지 가려면 또 며칠은 걸리겠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장비를 벽면에 모두 걸어놓은 나는 방 한편의 버튼을 눌러 시종을 불렀다.

똑똑똑.

"부르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잠시 후 하녀 복장을 한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하지만, 이분께 목욕과 함께 입을 옷 좀 챙겨주시겠어요?"

"이분은…?"

"오늘부터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시종은 엘리의 뾰족한 귀를 보고 놀란 것 같긴 하지만 경비병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엘리와 시종을 내보내고 나서 나도 샤워를 하러 이동했다.

"후아, 개운하구만!"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수건으로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를 대충 털고 침대에 누웠다.

씻고 나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개이는 느낌이다.

'엘리 건은 미안하지만, 현실적으로 들어줄 수 없고, 작위 계승식이 끝나면 곧장 현실로 돌아가야겠어.'

끼익.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엘리가 돌아왔다.

그런데….

"저, 저…. 꼭 이런 복장을 해야 하나요?"

옷을 챙겨 달랬더니 하녀 복을 입혀놨네. 팔다리를 베베 꼬아대는 엘리를 보니 오히려 내가 더 당혹스럽다.

"아뇨, 아뇨. 저 죄송한데 이런 거 말고 좀 편한 평상복으로 준비해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시종과 레이첼이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레이첼이 엘리를 전용 시종으로 삼으라고 했지만, 시종 같은 건 불편했다.

'그냥 여기 있는 동안 말동무로 삼아야지.'

잠시 후 부드러운 면 재질의 상,하의를 입은 엘리가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호호, 부르실 일이 생기면 또 불러주세요."

시종을 돌려보내고 방에는 어색한 공기가 멤돌았다.

"저…."

"저기…."

"아, 먼저 말하세요."

"아뇨, 유현 님 먼저 말하세요."

"아, 저쪽 침대에서 주무시라고요…."

"아, 아, 넵!"

귀족가의 침실이라 그런지 침대가 두 대나 있었기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었다.

엘리가 반대편 침대에 눕히자 내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하시려고 했죠?"

"아…. 그게 사람들이 유현 님을 로한이라고 부르던데, 이유가 궁금해서요!"

"아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원래 이름이 유현이고요. 지금 임무 수행 중에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 로한이예요. 평소에는 다른 분들처럼 로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랑 둘이 있을 때는 유현이라고 부르셔도 되고 로한이라고 부르셔도 되고."

"아, 그렇구나. 그런데 임무가 뭐예요?"

"레이첼 아가씨가 작위 계승식을 치를 때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게 임무입니다."

"아하! 호위 기사시군요!"

"일단은…. 그렇죠. 엘리 님은 어쩌다 노예가 되신거죠?"

"그게….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왕국을 벗어나 여행을 떠났는데 엘프라는 게 드러나자마자 노예 상인의 표적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런…."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며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씩 풀어갔다.

다음 날 아침.

"유현, 일어나!"

"조, 조금만 더…."

몸을 흔들기 전에 이미 깨어있었지만, 침대에 좀 더 누워있고 싶었다.

어젯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엘리의 나이가 200살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하며 말을 놓으라고 한 이후로 엘리가 말을 놓았고 내가 말을 놓지 않으면 자기도 한사코 말을 놓지 않겠다며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나도 얼떨결에 말을 놓게 되었다.

'증조할머니에, 증조할머니뻘인데……이래도 되는 건가?'

물론 외관상은 주름 하나 없는 모습이 나보다도 젊어 보였지만.

"학교에 가야 한다며!"

"으으…. 알겠어. 일어났어."

"난 이미 준비 끝났어."

"응…?"

아까부터 부스럭대더니 학교 갈 준비를 하던 거였나?

"학교는…. 마음대로 못 갈 텐데?"

"레이첼 님만 허락하면 되는 거라며?"

"그렇긴 한데…."

덜컥.

"내가 허락했으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와."

그렇게 우리 셋은 아침부터 함께 붙어있게 됐다.

"어제부터 너무 쿨하신거 아닌가요?"

"쿨?"

"너무 시원하게 수락하는 거 아니냐고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턱을 괴고 있던 레이첼은 지나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난 원래 그랬어. 요즘 일이 많아서 좀 예민해졌을 뿐이지."

"……."

"당분간은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바람 때문일까? 정말 그 후로 보름 동안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흘러갔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그동안 레이첼의 체술과 검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공격에 있어서는 검로에 군더더기가 사라졌고 쾌검과 중검을 자유롭게 다루고 검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게 되었고.

방어에 있어서는 공격을 어떻게 막고 흘려야 하는지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살펴 공격이 어디로 들어올지 예측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비슷한 수준에서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차이가 벌어지면 기술이고 뭐고 힘에 잡아먹히게 된다. 공격을 흘리기 전에 부러지게 되고 공격을 하기 전에 공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뭐, 학생들 수준이야, 대체로 고만고만하니.'

그녀를 가르치면서 느낀 건데 레이첼의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육체 수준에 비해 극히 떨어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와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심지어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마저도.

마나를 쌓는 호흡법이 존재하고 운용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지만 마나만 많았지 정작 제대로 된 운용을 하는 건 극소수였다.

가르치는 동안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마나를 운용해서 감각을 활성화하고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리세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예?"

마나를 운용해 육체의 근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곧잘 했지만, 신경을 활성화해 육체의 반응속도를 끌어올리거나 감각을 활성화하는 것은 몇 번을 알려줘도 잘되지 않았다.

결국, 그쪽은 포기하게 됐지만,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랑스의 마나 운용에 대한 재능은 천부적이었어.'

블루스톤으로 뒤늦게 마나를 깨달아 마나를 쌓기 시작했지만, 그 운용에 대해서는 그보다 높은 등급의 기억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마나로 근력을 상승시킬 뿐만 아니라 감각을 고도로 활성화하고 심지어 마나를 인위적으로 폭주시켜 한계를 초월한 힘을 내뿜는다?

그런 능력은 등급 7의 나인에게조차 없다.

나인의 능력으로 분류된 예리한 감각은 극한의 단련과 생사를 오가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한계를 몇 번이고 초월한 결과물이지. 마나를 운용한 능력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17일 전 괴한의 습격 이후로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경매장에 매일같이 들렀는데도 내 맘에 딱 들어맞는 물건을 아직까지도 구하지 못한 것.

물론 제법 괜찮은 물건들은 종종 나오긴 했다.

예를 들면, 화염 마법이 인챈트 된 미스릴 장검이라 던가, 자가수복 마법이 인챈트 된 갑옷 세트, 육체를 치유하는 신성 주문이 새겨진 성검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성검은 꽤 마음이 동했지만 결국 사지 못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가 아니라 저렴해서 구매할 수 없었다.

성검의 최종 경매가는 50만 골드에 달했지만 500만 골드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다.

"제발, 오늘만큼은 뭔가 엄청난 게 나와주기를…."

이제는 남은 기간이 고작 열흘밖에 남지 않았기에 성검 정도의 물건만 나오더라도 구매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알펜하임 제국에는 요일의 개념이 없이 각 달의 1일, 7일, 14일, 21일, 28일과 나라에서 정한 기념일에만 사람들이 휴식을 취했는데 그런 날이면 경매장에 평일보다 좋은 물건이 나오곤 했는데 오늘 4월 3일은 알펜하임 제국의 건국기념일인 만큼 기대가 더 컸고 입장료도 평소보다 2배나 더 받았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맨날 갔다가 물품 확인만 하고 그냥 오고."

레이첼의 말대로 요즘은 안에 들어가서 그날 나오는 경매품을 확인하고 별다른 게 없으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오늘도 기대는 하고 있지만 특별한 게 없다면 확인 후에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비싼 거요, 비싼 거…."

"그럼 네가 비싸게 불러서 사면 되잖아?"

"……그건 아니죠."

황당한 소리를 내뱉는 레이첼을 찌릿 노려봐주고 경매장 내부로 향했다.

"후우…."

배정된 방에 도착한 나는 뭐랄까, 취업 준비생이던 시절. 내가 원하던 회사의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시험까지 붙은 뒤, 최종 면접의 결과를 확인하는 심정으로 리모컨을 켰다.

"제바알!"

떠오르는 경매 화면에서 곧장 메뉴로 들어간다. 그 상태에서 5시부터 시작해 밑으로 쭉 나열된 경매품들을 천천히 확인해간다.

'천사의 성배, 마검 지오크, 남작급 뱀파이어의 혈청…….'

시작부터 성검에 준하는 경매품들이 리스트에 올라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이름마저 금빛으로 적어놓은 경매품이 화면을 크게 자리했다.

"…정제된 만드라고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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