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암살자 나인 (9)
* * *
뭐, 홀린 듯이 얘기했지만 나는 외모에 현혹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이성적이지.
"…절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몸 전체를 가리는 로브를 두른 엘프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건데요?"
"……."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레이첼은 심기가 불편한 듯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상태로 창가를 보고 있었다.
홱.
그러다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짐짓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별로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아, 한스님.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단풍잎 5길 6에 먼저 들를 수 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
외부로 통하는 통신 버튼을 눌러 한스에게 부탁을 하고는 레이첼을 돌아봤다.
"생각도 없이 그렇게 큰돈을 써?"
"어차피 돈은 많아서…."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이거 어떻게 할 건데?"
레이첼이 턱짓으로 엘프를 가리키자 엘프가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거라뇨. 무례하시군요."
"무례? 지금 무례라고 했어?"
그런 엘프의 말 또한 레이첼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녀의 목 안쪽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짝짝.
"자자, 그만!"
손뼉을 두 번 치며 가볍게 주위를 환기했다.
"아가씨, 그리고 엘프님."
"…뭐, 왜?"
"왜 그러시죠?"
양쪽 입꼬리에 힘을 줬다가 풀고는 말을 잇는다.
"저는 무얼, 어떻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죠?"
두 여인이 서로 동시에 말을 내뱉고는 같이 째려보는 모습이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
"하하, 말 그대롭니다. 엘프님은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나세요."
"그게 무슨……?"
찌이익.
나는 그 자리에서 엘프의 노예 계약서를 찢었다.
"너…!"
"아닛……!"
경악하는 레이첼과 노예 계약서가 파쇄된 반동이 몰려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엘프.
"자, 이제 됐죠? 레이첼 아가씨가 신경 쓸 일도 없고 엘프님이 불편하실 이유도 없고?"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크읏…!"
격통이 지속되는 듯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엘프를 무심히 바라봤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별로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돕고 싶어서 도운 거죠."
이건 쉽게 말하자면 위선.
혹은 자기만족이다.
저 엘프가 누군가에게 팔려간 뒤 어찌 될지 상상을 하다 보니 마음속이 불편해져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에 불과했다.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용도치고는 제법 지출이 크긴 했지만….'
뭐, 아직도 돈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이걸 다 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대신 앞으로 노예에 대한 경매는 보지 않기로 했다. 레이첼과 상의한 건 아니고 나 스스로.
"……너같은 사람이 암살자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됐냐고 물어도…. 그냥 전쟁에 휩쓸렸을 뿐이죠. 흔하잖아요. 이런 이야기."
다만 재능이 흔하지 않았을 뿐이다.
"……큭! 의도가 뭐죠?"
아직 충격이 다 가신 건 아니지만 정신을 좀 차린 듯 엘프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온다.
나도 그에 한숨을 토해냈다.
"후, 의도가 어찌 됐든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의 인사를 먼저 하는 게 도리 아닐까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침묵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마차가 한 번 정차했다.
“한스님, 잠시만요.”
마차에서 내려 대로변의 잡화 상점에서 과일 여럿을 구매하여 다시 마차에 올랐다.
“뭘 산 거야?”
“그냥 과일 좀 샀어요.”
잠시 후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멈춰서고 한스가 내부로 말을 전해왔다.
"다 왔습니다."
"여긴…?"
"원래 제가 쓰던 곳인데 지금은 사용을 안 해서…."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던 그 집에 엘프를 데려왔다. 내 책임인데 레이첼의 저택으로 데려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무작정 제국 내에 방생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으니 작은 보금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여기 쓰시다가 몸 좀 추스르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오면서 구매한 엘프가 먹을만한 먹거리를 집 안에 옮겨주고 안녕을 고했다.
"그럼 잘 사세요."
"……저, 저기 잠깐만요!!"
엘프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나를 다급히 불러세운다.
"……?"
"이,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갑자기 이름이라….'
나인과 로한. 그 두 개의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다 나직이 내뱉는다.
"유현. 제 이름은 유현입니다."
"유현…?"
내 의지로 행한 일에 다른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마차로 돌아온 나는 레이첼과 함께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후우! 시작해 볼까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앞뜰로 향한 우리는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 마주 섰다.
"일단 제가 도와드릴 만한 시험은 2가지 정도지만…."
기사학과의 학생인 레이첼은 기사의 기본개념인 기사학개론부터 체육학개론, 마법학개론, 사냥학개론, 운동생리학, 검술, 체술 등을 기초로 하여 심화과목으로 기사실무, 마법대처학, 사냥실무, 생활테러학, 행정법, 형법, 전술학, 실전검술, 실전체술 등을 배워왔고 배우고 있다.
이미 졸업을 하기 위한 학점은 모두 충족된 상태였고 졸업을 하기 위한 마지막 과제인 졸업시험이 약 2주 후에 치러질 예정이다.
졸업시험으로는 기사학개론, 실전검술, 실전체술, 행정법, 형법의 5과목이 존재했는데 그 중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2가지였다.
바로 실전검술과 실전체술.
'기사학개론이니 행정법이니 그런 건 전혀 도와줄 수 없지만….'
"그 2가지는 확실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들어오세요!"
"타앗!"
처음 시작은 체술이었다. 곧장 달려와 주먹을 내뻗는 레이첼.
그런 그녀의 주먹을 피하며 외친다.
"계속 공격!"
"합! 핫! 타앗!"
주먹과 발차기 뻗어대며 간혹가다 몸을 던져 태클을 걸어왔지만,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빨라서가 아니야.'
속도는 레이첼의 수준으로 맞춰서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레이첼은 학생 중에서는 빠른 몸놀림을 가진 편에 속했다.
'기본기는 잘 갖춰졌어. 하지만….'
"공격이 너무 정직해! 페이크를 줄 때는 진짜 공격할 것처럼!"
"탓! 핫! 파앗!!"
벌써부터 레이첼의 움직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좋은 시작이야.'
"페이크만 중요한 게 아니야! 공격에 무게가 전혀 안 실렸어! 공격 하나하나가 계산되어야 합니다!"
"이얏! 합! 하앗!"
페이크를 줄줄 알게 되고 어설프지만, 공격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린다.
"공격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으란 말이 아닙니다! 그럼 힘의 소모가 너무 커! 상대방의 움직임을 계산해서! 견제가 되는 공격은 가볍게! 유효타가 될 공격은 무겁게!"
"허억! 헉! 헉!"
벌써 힘을 진탕 쏟아부었는지 무릎을 잡고 몸과 고개를 숙인 채 거친 숨을 토해내는 레이첼에게 호통을 쳤다.
"쉴 때는 고개 들고! 허리는 편 상태로! 숨은 코로 쉬세요!"
"아니, 여기서 뭐하십니까?"
그때 호룬이 웬 편지 봉투를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 호룬 경 오셨습니까?"
"예…. 그런데 밤 중에 두 분이서 뭐하십니까?"
레이첼은 말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내가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근데 손에 들고 계신 편지는 뭐죠?"
"아, 이건 수도 경비대에서 온 사건 조사 결과서입니다."
'사건 조사 결과서?'
그가 내민 편지 봉투를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었다.
사건 조사 결과
ㅁ 사건 명 : 귀족가 경비병 연쇄살인 사건.
ㅁ 사건 일시 : 혼니아 대륙력 1863년 3월 17일 00시 30분.
ㅁ 사건 위치 : 레이첼 제르미온의 저택.
ㅁ 사건 경위 : 레이첼 제르미온의 저택에 의문의 괴한이 출현하여 경비병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레이첼 제르미온의 호위 기사인 로한에게 저지당함.
ㅁ 조사 결과 : 괴한의 육체 조직을 각 기관에 보내어 조사한 결과, 이전에 보지 못했던 최상급의 호문클루스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배후를 어느 한 곳으로 지정하거나 지목할 수 없음.
ㅁ 대책 방안 : 사고 방지를 위해 앞으로 수도 경비대의 순찰을 강화하도록 하고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수도 기사 2명을 오는 19일부터 레이첼 제르미온의 저택 인근에 상시 대기하도록 함.
혼니아 대륙력 1863년 3월 18일 수도 경비대장 레이홉 아스문트
"흐음…."
"무슨 내용이야?"
호흡을 충분히 고른 레이첼에게 보고서를 넘겨줬다.
“…이게 뭐야?"
"사건 조사 결과서라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해결된 게 전혀 없잖아."
"네, 해결된 건 없네요. 그래도 내일부터 기사들을 배치해준다고 하니 나름 신경 써 준거 같은데요?"
'배후가 황궁, 마탑, 현자의 돌 중의 하나일 텐데 조사가 가능할 리가 없지.'
레이첼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자꾸만 문질렀다.
"하아, 너희 쪽에서는 별다른 정보 없어?"
"저희도 뭐, 비슷하죠. 배후를 짐작만 하고 있을 뿐."
"뭐?!"
레이첼이 눈을 크게 뜨며 갑작스럽게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다.
"배후가 누군데?!"
"워워, 진정하세요. 누구라고 딱 떨어진 게 아니라 짐작만 하고 있다고요. 짐작만."
"그래서 그 짐작이 누구냐고!"
그녀의 격앙된 어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황궁, 마탑, 현자의 돌."
"그 셋이라고?"
"그 셋 중의 하나입니다. 그 정도의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낼 만한 곳은 제국에 그 셋뿐이라더군요. 그중 제가 가장 의심하는 곳은 마탑이고요."
"마탑? 이유는?"
"아가씨 동생이 거기 있으니까요."
"…내가 내 동생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경직된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그녀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 동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탑까지 아니라고 할 순 없죠. 어쨌든 짐작일 뿐이니까 너무 감정적인 태도는 그만두시죠. 슬슬 피곤해지려고 하는데요?"
"……알겠어. 미안."
"사과는 잘 받겠습니다. 이제 충분히 쉬셨으면 검술로 넘어갑시다!"
다시 체술 때와 같이 그녀의 검술을 직접 느끼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교육의 방향을 잡았다.
'일단은 공격하는 법부터 제대로 익히고 나서 방어를 가르쳐야겠군.'
크고 작은 새하얀 달 두 개가 서로 겹쳐질 때쯤 가르침을 끝냈다.
"허억! 허억!"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끄덕끄덕.
땀에 흠뻑 젖어 튀어나온 잔머리들이 얼굴에 따닥따닥 붙은 그녀의 얼굴을 멀뚱히 보고 있을 때 품에 있던 통신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수상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누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유현 님!
아잇!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용히 하세요!
유현 님! 저예요!
호위 기사가 되면서 통신기도 같이 받아뒀는데 그 속에서 연신 낯익은 목소리와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저는 잠깐 앞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레이첼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박찼다.
팟!
"무슨 일이시죠?"
"헙! 로한 님 글쎄 이분이 무턱대고…."
"로한…? 유현 님 저예요!
후드를 뒤집어 쓴 로브의 여인이 내가 나타나자 갑자기 후드를 벗었다.
"에, 엘프?!"
"어떻게 엘프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병사 둘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아니, 어떻게 알고 왔어요?"
"레이첼 제르미온이라고 물으니까 알려주던데요? 멀지도 않고."
"그래서 왜 오신 건지…?"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제 이름도 안 알려줬더라고요."
"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엘프가 계속해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제 이름은 엘리. 엘리 프루니아예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름도 알려드리지 못하고 경우 없는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그리고 제가 집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요……."
'뭐지…?'
뭔가 잠깐 안 본 사이에 사람이 바뀐 것 같다…?
빠르게 눈만 껌뻑이고 있던 내게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이내 단호하고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결심했어요!"
"뭐, 뭘요?"
'하, 하지 마! 뭔진 몰라도 그 결심 멈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침을 꿀꺽 삼킨다. 마음 같아서는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제 몸을 유현 님께 의탁하기로!"
"……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