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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34화 (34/62)

〈 34화 〉 암살자 나인 (8)

* * *

"저 죄송하지만, 경매장에 좀 갈 수 있을까요?"

"경매장…? 경매장은 왜?"

"필요한 물품이 있는데 혹시 나왔을까 싶어서요."

"나 졸업 시험 준비해야 돼서 바쁜데…."

"경매장 가주시면 제가 끝나고 시험 준비 도와드릴게요."

레이첼이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흠…. 좋아."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경매장은 귀족 전용 경매장으로 부탁드립니다."

"귀족 전용 경매장?"

"예, 혹시 모르시나요?"

"응, 난 그냥 경매장도 한 번 안 가봤는걸?"

"신분증은 가지고 계시죠?"

"어, 가지고 있지. 신분증이 필요해?"

"예,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럼 가시죠!"

마차에 오르며 마부 한스에게 말했다.

"한스님, 오늘은 저택 말고 그리폰 9길 3으로 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 속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뭘 얻는 게 좋을까?'

이번 꿈은 굉장히 긴 데다 들어와 있는 몸의 무력도 재력도 출중했기에 메인 퀘스트의 보상을 확실하게 챙겨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 몸에 지닌 아공간 주머니나 그 속에 있는 나인의 암살 전용 무기 '그림자 단검'도 그간에 받아온 보상보다 뛰어나긴 했지만, 현실로 돌아가면 선택할 수 있는 보상은 단 하나다.

'모든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가장 도움이 될만한 걸 구해야 해.'

현실에 있는 오거환을 생각한다면 단기간에 체력을 상승케 하는 영약을 얻는 것도 한 방법이고 운동으로 천천히 체력을 올린다고 하면 상점에서 무자비한 가격을 자랑했던 미스릴제 장비를 얻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은 좀 둘러보자.'

경매장에 어떤 물건들이 올라오는지는 가봐야 알 수 있고 또한 매일 올라오는 품목이 바뀐다고 들었기에 꾸준히 들러야 했다.

이따금 덜컹대는 마차에 몸을 기대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레이첼이 문득 물어왔다.

"근데 필요한 게 뭔데? 내가 하나 사줘?"

"하하,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혹시라도 돈이 모자라면 손을 벌릴 생각이다.

'모자랄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도 그럴 게 나인이 암살자로 있는 동안 모아놓은 돈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돈을 쓰는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임무와 단련에만 몰두한 결과 쌓여있는 돈이 무려 500만 골드를 넘어섰다.

이 정도 골드라면 웬만한 영지를 매입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잠깐만, 이거 그냥 돈을 보상으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1골드의 무게가 약 2돈. 금 1돈이 20만원 후반대였지만 그건 내가 구매할 때 이야기고 판매를 한다고 하면 대충 25만 원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면 500만 골드가 1천만 돈이니까 2500, 2억 5000, 25억……. 2, 2조 5천억?!

"허억!"

갑작스런 흉통에 가슴을 부여잡는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커, 커헉! 수, 숨이!"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심장에 가슴을 부여잡은 채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어서 마차 세워요!"

"예?"

"마차 세우라고!"

버럭 소리치는 레이첼의 말에 마부 한스가 마차를 급히 세운다.

끼이이익!

요란한 바퀴의 마찰음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크헉! 저, 전…. 괘, 괜찮습니다. 계, 계속 가주세요."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후욱! 후욱! 후우우우……. 진짜 괜찮습니다."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하자 빠르게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스님, 계속 가주세요."

"아니, 출발하지 마세요."

이도 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는 한스를 보고 레이첼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아가씨, 저 정말 괜찮아요. 가끔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떠오를 때가 있어서 그래요."

사실 트라우마 따윈 전혀 없었지만, 돈이 너무 많아서 심장이 뛴다고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말을 지어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이런 일은 일상입니다."

내 안색을 살피는 레이첼에게 싱긋 웃어 보이자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안 괜찮아!"

퍽!

"컥! 왜 때려요!"

갑자기 내 가슴팍을 향해 정권 지르기를 날린 레이첼에게 거칠게 항의해보지만 날아오는 건 거친 주먹세례였다.

파바박!

"악! 으악! 사람 살려!"

"죽어! 죽어!"

"주, 죽으라뇨!"

며칠을 같이 붙어있었더니 부쩍 친해진(?) 레이첼과 장난(?)을 치다 보니 어느새 귀족 전용 경매장에 도착했다.

"신분증을 제시해주겠습니까?"

천장이 폐쇄된 돔 형식의 건축물 앞에 경매장의 경비 4명이 서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발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레이첼이 가장 우측에 서 있던 경비에게 말없이 신분증을 내밀자 경비가 신분증을 받아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직육면체의 기계 속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기계의 윗면을 가리켰다.

"이쪽에 손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따라 그녀가 기계의 윗면에 손을 얹자 삑­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잠시 후 기계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확인했습니다. 결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입장하는데도 비용이 있었어?'

"얼마죠?"

"영애님이 2골드, 기사님이 1골드 해서 총 3골드입니다."

"아아, 이건 제가 계산할게요. 제가 오자고 한 거니까."

내가 3골드를 내밀자 경비가 신분증과 함께 F­17이라고 적혀있는 출입증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금색이었고 하나는 동색이었다.

"이건 영애님, 이건 기사님 겁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 게 내 것인지 알만한 색감이었다.

'귀족들이 차이 두는 걸 워낙 좋아하니 그런 거겠지.'

게이트에 출입증을 찍고 내부로 향하자 쾌적한 실내 공기가 느껴진다.

"오, 쾌적하네요."

'온도, 습도뿐만 아니라 공기 정화까지 작동하고 있는 건가?'

"그러게."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둥그렇게 이어진 복도가 나타났다.

가장 정면의 벽에 붙어있는 간판에는 경매장 이용 방법 및 수칙과 현 위치가 표시된 층별 안내도가 있었다.

우리만 첫 방문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간판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사람들 틈에 껴 이용 방법과 수칙을 확인하고 안내도를 살폈다.

"저희는…. 2층이네요."

"그러네."

1층부터 10층까지는 다 경매를 위한 방이었고 지하에는 경매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값어치가 있는 물건들을 판매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현실의 엘리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마력 제어 승강기가 존재했지만 2층은 걸어서 올라가는 게 더 빨랐다.

"어디 가세요! 오른쪽으로 가야 돼요!"

"아, 그래?"

먼저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이상한 데로 빠지는 레이첼을 인도하여 F­17번 문 앞에 섰다.

문은 불투명한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었는데 문 옆의 상단에 출입증을 찍자 아무런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내부는 깔끔하게 흰색으로 인테리어 된 작은 방이었는데 정면은 벽보다 넓은 면적의 투명한 창이 차지했고 중앙에는 쿠션이 푹신해 보이는 의자 두 개와 다과가 올라와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투명한 케이스로 제작된 온장고와 냉장고에 차와 음료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 자, K­13에서 2000, 2000골드 나왔습니다! 더 부르실 분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5, 4, 3, 2, 1! 예­! K­13번 손님께 레오 토란트 작가의 역작! 절규하는 오크와 행복한 오우거! 낙찰됩니다!

이미 경매는 시작되고 있었는지 방 한쪽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 드실래요?"

"따뜻한 거로 아무거나."

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딸기 바나나 주스와 온장고에서 유자차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와, 이거 맛있다!"

리모컨을 조작하여 정면의 창에 경매화면을 띄우려는데 레이첼이 자연스럽게 내 딸기 바나나 주스를 마시고 있다.

"제 거 왜 마셔요!"

"맛있어 보이길래 한 입 먹어봤어! 왜!"

"아니, 하하…! 알겠어요…."

너무 당당하니까 할 말이 없네. 목청은 또 왜 이리 큰 거야?

"그럼 저도 한 입…!"

"내 거 건드리지 마!"

"하하하!"

유쾌해지는구만!

장난은 그쯤하고 정면의 창을 살핀다. 투명한 창 너머로 경매품과 경매를 진행하는 진행자가 보이긴 했지만 작게 보였다. 물론 마력으로 시력을 돋우면 상관없겠지만 리모컨으로 경매화면을 창 위에 송출할 수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경매화면이 큼직하게 떠올랐고 그 상태에서 메뉴에 들어가자 오늘의 경매품들과 경매 시간을 알 수 있었다.

경매는 오후 5시~ 오후 8시까지 진행되는데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온다고 하더라도 5시에 시작하는 경매는 참여가 어려울 것 같다.

5시~6시의 마지막 경매품이 조금 전에 낙찰되었다던 오크 뭐시기였는데 지금 시간은 5시 53분으로 조금 일찍 첫 타임 경매가 끝이 났고 오늘은 이용 방법과 수칙 등을 확인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5시 40분 정도가 한계일 듯했다.

'뭐, 초반에는 주요 물품이 안 나오고 후반으로 갈수록 시작가가 높은 주요 물품이 나온다고 하니 큰 상관은 없겠지.'

오늘의 경매품들을 살펴보니 오늘은 딱히 내게 필요하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경매도 처음이고 하니 오늘은 경험 삼아 자리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필요하진 않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경매품이 있었다.

'화이트 엘프…?'

알펜하임 제국을 비롯한 대륙의 나라들은 대부분 노예 제도가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노예 제도라는 게 사실상 음흉하거나 흉악한 일을 벌이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 6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6시 경매 첫 시작은…….

별로 관심은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와, 저걸 만 골드에 구매한다고?"

"아루마 호퀸의 조각상은 그만한 값어치를 해.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는 더는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어 수집가들에게 더 각광받고 있다고 알고 있어. 그의 조각에 대한 집념은……."

레이첼의 설명도 듣는 맛이 있었다.

'귀족이라 그런지 아는 게 많네.'

기사 이전에 귀족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양을 쌓은 티가 여기서 났다.

'아니, 근데 내 딸기 바나나는…! 후,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시간이 흘러 6시 경매도 끝이 났다.

­ 7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7시 경매가 시작되고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경매가 시작되었다.

­ 자! 오늘의 마지막 경매! 여러분들이 기다리시고 기다리셨던 바로 그 상품! 노예 중에서도 단연 최상급으로 꼽히는 엘프! 그중에서도 희귀하기가 그지없다는 화이트 엘프를 여러분께 소개 드립니다!

경매장 뒤편의 문이 열리며 손발이 두꺼운 사슬로 묶인 백옥같이 맑고 새하얀 피부의 엘프가 수레에 실려 나왔다.

엘프는 여성이었는데 양손이 위로 들린 채 묶여있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고 머리까지 감싸는 복면 밑으로 기다랗게 삐져나온 은발이 눈부시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와, 미쳤는데?'

현대의 비키니를 연상케 하는 회색의 속옷만 걸친 엘프는 그 육감적인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 경매 시작가 1만 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진행자가 엘프의 복면을 벗기는 것으로 경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헐…."

엘프의 얼굴이 공개된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뭐냐, 너?"

레이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를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와……."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할 생각도 못 한 채 화면 속의 엘프에게 넋이 빠졌다.

­ G­56! 1만 5천 골드! 더 없습니까?

­ 아! 말씀드리는 순간 B­72! 1만 6천 골드!

­ D­43! 1만 7천 골드! 엄청난 속도로 경매가가 오르고 있습니다!

진행자의 말처럼 경매가는 가파르게 급상승하고 있었다.

­ 어느새 경매가5만 골드를 돌파하고 있습니다! 노예로서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나는 홀린 듯 리모컨을 쥔 손을 움직였다.

­ F, F­17! 10, 10만 골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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