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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33화 (33/62)

〈 33화 〉 암살자 나인 (7)

* * *

까악­ 까악­

서신을 전달하자마자 힘찬 날갯짓과 함께 날아오르는 까마귀를 뒤로하고 서신을 내려다본다.

­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짤막한 한 줄의 글귀 밑으로 지나치게 넓은 공백이 돋보인다.

얼핏 보면 분석 결과가 나왔으니 자신에게 오라는 표식 같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서신의 오른쪽 귀퉁이를 잡고 마나를 천천히 불어넣자 푸르게 빛나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 가져오신 팔을 분석한 결과 인간을 기본으로 한 마법 배양 생명체 '호문클루스'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호문클루스라는 게 본래 만들기에 따라 다양성이 무궁무진하기에 콕 짚어 어디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특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수준이 극히 높다는 겁니다.

이 정도의 호문클루스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제국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습니다.

황궁, 마탑, 연금술사 길드.

이렇게 3개의 단체를 꼽을 수 있지만, 이들조차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이만한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시체가 되었음에도 강철을 아득히 뛰어넘는 가죽의 강도는 다이아몬드에 비견될 정도이고 생체활동이 멎기 전에는 그 이상의 강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강도도 강도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수준의 항마력과 속성 내성으로 웬만한 마법과 마력으로는 생채기 하나 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습니다.

나인님이 대체 어떻게 베어냈는지조차 의문이군요.

설마 마스터의 경지에라도 오르신 겁니까?

어쨌든 상급의 기사나 고위급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쉽지 않은 호문클루스입니다.

게다가 저만한 호문클루스를 자폭까지 시키다니…. 이유가 뭔진 몰라도 의뢰인을 반드시 죽이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저런 걸 대량으로 양산할 수는 없겠지만…. 대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재앙입니다.

마스터에게 보고한 결과 마스터 역시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

길드의 역량을 총동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있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르륵.

불어넣던 마나를 거두어들이자 서신이 가루가 되어 창밖으로 휘날린다.

'황궁, 마탑, 연금술사 길드라….'

황궁은 제국 세력의 정점으로서 기사, 마법사, 정령사, 소환사 등 모든 계열의 무의 정점들이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사법, 재무, 행정 등을 관리하는 기관의 장들 또한 모두 황궁 소속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제국 권력의 최고점이라 불리는 황제 역시 황궁 소속이고. 아니, 황궁이 황제의 소속이라고 해야 하나?

마탑은 오로지 마법에 미쳐있는 집단이었으며 황궁보다 많은 마법사를 소유한 유일한 세력으로 레이나 제르미온 또한 마탑 소속으로 지금 사태와 가장 연관성이 높은 곳이다.

연금술사 길드는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 길드 '현자의 돌'을 의미하며 온갖 지식을 섭렵하길 좋아하는 왕성한 지식욕의 소유자들이 모인 곳이다. 세간에는 연금술사를 '현자'라고 부르기도 하며 개개인의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제국의 중요 기관 곳곳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하나 만만한 곳이 없었다.

'이 중 한 곳이라도 작정하고 레이첼을 노린다면…. 글쎄, 과연 막아낼 수 있을지….'

고개를 저으며 창을 닫고 침대에 눕는다.

'레이나가 레이첼을 노린다고 치고 그 뒷배가 마탑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유가 뭐지?'

단순히 백작가 하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마탑이 귀족가의 암투에 끼어들었다?

만에 하나 걸리기라도 한다면 황궁에서 마탑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성공했을 때의 보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을 보게 된다면 그 기반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는 악수였다.

지금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자그마한 이득을 보기 위해 이토록 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나?

'알 수가 없네.'

지켜야 할 사람이 없다면 맘 놓고 돌아다니며 상황이라도 파악할 텐데 괴한이 나타난 후로는 레이첼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질 수가 없으니, 원.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 공세에 답답한 것도 잠시 어느새 스르륵 눈이 감긴다.

'아…. 여기 침대는 진짜…우리 집보다……낫네……….'

"로한!"

쾅!

고함소리가 먼저인지 문이 열리는 굉음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귓가를 짓쳐들어오는 소음에 벌떡 몸을 일으킨다.

"헉! 왜 그러세요?"

"아직도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

"엥? 나 방금 눈 감았는데……윽!"

반사적으로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창을 통해 비치는 눈 부신 햇살에 신음을 내뱉는다.

'아니, 진짜 잠깐 눈 감았을 뿐인데 벌써 아침이라고?'

"빨리 준비해!!"

"예, 옙!"

다행히 새벽에 씻은 덕분에 아직까지 모양새가 나쁘진 않아서 대충 머리를 매만지고 바로 옷과 장비를 착용해 나선다.

"레이첼, 왔어? 안녕하세요. 로한 경."

식당에 가니 홀로 테이블에 앉아있던 조이가 인사를 건넨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식판을 들고 조이의 맞은 편에 앉았다.

'식판은 세 개인데…. 화장실 갔나?'

"좋은 아침입니다. 조이 아가씨."

"응, 안녕. 다른 애들은?"

"잠깐 밖에 나갔어."

"아…. 천천히 먹고 있자."

잠시 후 가까운 출입구에서 다가오는 아일라와 헤이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하하. 로한 경,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화장실 다녀오셨나 봐요?"

"꺄악!"

"로한!"

'어우씨, 깜짝이야!'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되어 비명을 지르는 세 여인과 레이첼의 호통에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왜, 왜요?"

"어떻게 숙녀한테 그런 파렴치한 질문을 해!"

'파, 파렴치한?'

나는 그냥 화장실 다녀왔냐고…. 물은 건데….

"로한 경, 실망이에요!"

"어, 어떻게 그런 질문을…흑!"

"오늘은 따로 떨어져서 먹어요!"

고개를 홱 돌리고 옆 테이블로 옮겨가는 세 여인을 황망히 바라보다 레이첼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레이첼 너만은…. 난 네 호위 기사야…!'

그런 내 간절한 염원은 레이첼의 싸늘한 시선 아래 잘게 부서져 내렸다.

"반성하면서 혼자 먹어!"

"……!!!"

'크흑! 난 그냥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물었을 뿐이라고!'

졸지에 혼자 밥을 먹게 된 나는 침통함을 참지 못하고 과식을 했다.

식사하고 난 이후로도 오전 교양 수업이 끝날 때까지 쭈욱 멀찍이 떨어져 혼자 걸어갔다.

"이제 로한 경, 오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쫑긋!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헤이즈를 보며 내심 환호했다.

'좋았어! 헤이즈, 역시 너밖에 없다!'

오늘따라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핑크빛으로 보이는 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아냐, 좀 더 반성해야 돼."

'이익! 레이첼!!!'

나를 힐끔 보며 두둔하는 헤이즈의 어깨 감싸며 단호히 걸음을 옮기는 레이첼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잠깐, 이를 갈 거까지 있나? 혼자 다니면 되지 뭐.'

레이첼의 태도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억울한 심정이었기에 답답하고 분했지만, 생각해보니 혼자 떨어져 있는 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간만에 조용하니 오히려 좋아."

혼자 식판에 오늘의 메뉴를 배식받고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흠…."

'저기로 갈까?'

구석져서 혼자 편히 먹기 좋아 보이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어?"

'쟤는…. 그때 걔잖아?'

첫날 칼로스 패거리의 3인방에게 곤욕을 치르고 있던 남학생이 두 테이블 건너 앉아있다.

'쟤는 맨날 혼자 먹네.'

뭐, 저마다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괜한 신경을 끄고 식판에 고개를 처박는다. 여자들 사이에 껴 있어서 마음껏 먹지도 못했는데 오늘 그 한을 풀어야겠다!

우걱우걱. 와구와구.

그렇게 한동안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데 우당탕탕하는 소음과 함께 격정적인 대사가 들려온다.

"제발 그만 좀 해!"

'허이구?'

제 버릇 개 못 준다지만 저놈들은 쉬는 날이 없구나?

나는 비어버린 식판을 퇴식구에 밀어 넣고 새로 밥을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퍽.

"그만 안 하면 어쩔 건데? 어? 어쩔 거냐고!"

퍽!

"큭!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냐고? 이유가 너무 많아. 일단 네 그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어어? 그래, 그 눈빛!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부라리는 그 눈깔이 맘에 안 든다고."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민답게 짜져있을 것이지 그까짓 검 좀 다룬다고 귀족이랑 맞먹으려 들어?"

"넌 말이야. 앞으로 2주만 지나도 우리한테 말도 못 붙여. 알아?"

우걱우걱.

'좀 싸워라. 맞고만 있지 말고.'

와구와구.

"2주가 지나지 않아도 내가 말 붙일 일은 없으니까 이제 진짜 그만해. 더는 나도 못 참아."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취하는 그를 보고 속으로 응원을 보낸다.

'그러취! 그거라고!'

"못 참으면 어떻게 할 건데? 어, 쳐봐!"

"그래? 쳐봐!"

"우리야 졸업을 못 해도 먹고 살 만하겠지만, 너도 과연 그럴까? 자신 있으면 쳐보시든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때리기 좋게 들이미는 3인방. 그 패거리의 대장인 칼로스는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비열한 웃음만 짓고 있다.

"이익…!"

그는 팔을 뻗을 듯 팔꿈치를 뒤로 당겼지만,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차마 주먹을 내지르지는 못했다.

"못할 거면 그냥 처맞으시고요!"

"얌전히!"

퍽!

"큭!"

"쳐!"

퍽!

"윽!"

"맞아!"

덥석.

"그만해!"

"레, 레이첼?"

주먹을 뻗던 한 명의 손목을 잡아챈 레이첼이 쌍심지를 켜고 그들을 쏘아붙인다.

"너넨 질리지도 않니?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어? 그리고 론! 너 졸업하면…. 아니, 졸업하지 못하더라도 제르미온가의 기사로 서임할 테니까 이 자식들한테 맞고 있지 마! 알았어?"

"레이첼…! 고, 고맙다."

론이라 불린 남학생은 감동하였는지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칼로스와 그 패거리는 레이첼을 보고 당황한 듯하더니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식판에 박았다.

"후우…!"

"없어, 없어!"

"사, 살았다!"

"레, 레이첼. 네 호위 기사는 어디 갔지?"

떨리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지는 칼로스에게 레이첼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 호위 기사가 어디로 갔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오늘 안 왔구나!"

칼로스의 표정이 걱정에서 환희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 저렇게 기뻐해?'

그리고 레이첼의 머리채를 잡으려는 듯 그녀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는다.

휙.

"아니, 왔는데?"

나는 칼로스의 손을 중간에 낚아채고 고개를 숙여 그를 내려다봤다. 참고로 칼로스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

"커, 커헉!"

"도, 도망가!"

"카, 칼로스! 미안!"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3인방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는지 눈을 부릅뜨는 칼로스.

꽈악.

"아악!!!"

"어딜 봐?"

손아귀에 힘을 살짝 주었을 뿐인데 비명을 질러댄다.

챙!

"그 손 놓지 못해?"

갑자기 검날을 들이미는 기사 한 명.

'이 녀석. 호위 기사인가?'

"못 놓겠다면?"

'마나 폭주.'

몸에서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다.

"아아아악!"

힘을 더 주지는 않았는데 열기가 뜨거웠는지 좀 전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는 칼로스를 뒤로하고 그대로 기사가 들이민 검의 날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고.

그대로 검을 부러뜨렸다.

챙강!

"아닛…!!!"

훅! 쿵!

"컥!"

그리고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목과 칼로스의 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꽂았다. 물론 힘은 조절했다.

"있잖아."

살기를 약하게 뿜어내며 그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족인지 기사인지 난 모르겠고.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그땐…."

꿀꺽.

"진짜 뒤진다?"

끄덕끄덕끄덕!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둘의 목을 놓아주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간다.

"거기 무슨 소란이야!!!"

'어쩜 이렇게 패턴이 매번 똑같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며 론, 레이첼과 함께 자리를 떴다.

"고마워.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제르미온 백작령으로 찾아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멀어지는 론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말 진심입니까?"

"뭐가?"

"론이란 친구. 기사로 서임한다는 이야기요."

"어차피 작위를 물려받으면 내 마음대론데 뭘."

'빈말은 아니었나 보네.'

"그나저나 아까 뭐라고 한 거야?"

"예?"

"칼로스가 도망치기 전에 뭐라고 한 거냐고."

"아…. 그냥 뭐,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죠."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레이첼이 눈을 게슴츠레 뜬다. 왜 이래?

"진짜로?"

"제가 무슨 말을 하겠나요?"

"죽여버린다고 한 거 아냐?"

"……!!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순간 뜨끔했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흠…. 뭔가 어색한데…."

"일단 아가씨들께 사과부터 제대로 드리겠습니다! 아가씨들! 아침엔 제가 죄송했습니다!"

그녀들과 성공적인 화해를 마치고는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레이첼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저 죄송하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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