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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32화 (32/62)

〈 32화 〉 암살자 나인 (6)

* * *

휴게실 구석의 소파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은 지 10분쯤 지났을까 멀리서부터 말소리가 들려온다.

말소리가 거슬려 청각을 차단하고 몸을 뒤척이는데 곧이어 휴게실 문이 열렸다.

'아, 휴게실도 많은데 하필 일로 오냐?'

그래도 휴게실의 자리는 많았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소파에 누워있는데 누군가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어이, 기사 양반. 휴게실 전세 냈어?"

"……."

스윽.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채 슬며시 눈을 반개했다.

꾸벅.

"아, 죄송합니다."

반쯤 뜬 눈으로 상대의 허리 부분을 눈에 담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흠….'

시비를 걸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말투.

"왜 기사가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수양 부족 아니냐?"

"어휴.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네."

그리고 그의 의견에 동조하듯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3명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몸을 완전히 일으킨다.

'술 냄새…….'

네 사람의 몸에선 잡내가 섞인 불쾌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학교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누가 누구한테 정신 상태를 들먹이는 거야?

"뭐, 뭐야! 해보자는 거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상대를 힐끔 보고 그를 지나쳐 휴게실 문 앞으로 간다. 그리고 문 옆의 살균 소독 마법이 걸린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며 생각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네 사람의 실루엣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대로 신발을 신고 휴게실을 나왔다.

"기사가 사람 말을 무시해?"

"기사도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헛소리를 무시하고 터덜터덜 다른 휴게실로 걸어간다.

복도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지지만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있던 휴게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휴게실로 들어가 구석진 소파에 다시 드러누웠다.

"아, 좀 쉬자…."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쿵.

"이, 씨발!!! 어디 갔어!"

아까 그 술 냄새를 풍기던 무리가 멀리서부터 벽을 쳐대고 휴게실 문을 하나씩 열어대며 접근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의도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꺄악!"

"뭡니까?!"

다른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학생들도, 무리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란을 피우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낮에 술 냄새를 풍기며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이라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사람 냄새가 구수하다 못해 역하기까지 했다.

나는 점차 좁혀오는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휴게실을 다시 나선다.

"너, 너…!"

"……."

짧은 적막이 감돌았다.

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질하는 네 사람과 때아닌 소란에 휴게실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사람들.

졸린 눈을 부릅떠 시야를 선명히 하자 녀석들의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이 녀석들…. 전에 식당 그놈들이잖아?'

웬 학생에게 음식물을 쏟아붓던 3인방과 뒤늦게 나타나 레이첼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던 짧은 보라색 머리칼의 남자.

'이름이 칼로스라고 했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뭐, 뭣?"

재차 말을 더듬는 칼로스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뚝뚝 끊어 말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서 이렇게 쫓아와 귀찮게 구냐고."

그러자 나와 시선을 마주친 칼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데 뒤에 있던 놈들이 난리다.

"호, 호위를 하러 왔으면 복도에서 호위나 할 것이지. 왜 휴게실에서 나자빠져 있냐고!"

"그, 그래! 그리고 사람 말은 왜 무시하고 가는데?"

"주인을 지키는 개면 개답게 주인 곁에 붙어 있을 것이지. 왜 사람 쉬는 곳에 들어오고 지랄이야?"

"……."

'개? 지랄?'

사람을 수만 명을 죽여도 흔들리지 않던 암살자의 평정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센 심장의 펌프질로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야 할 피가 역류하며 목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뻑뻑해진다.

점차 빨라지는 맥박과 호흡을 간신히 억누르며 긴 한숨을 토해낸다.

"하아..."

"어? 한숨? 한수움? 얘들아, 여기 이 기사님이 한숨이 나오신단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내 모습을 쫄았다고 느꼈는지 기세가 등등해진 칼로스가 한껏 비아냥거리고 그의 쫄따구 3인방도 이에 질세라 목소리를 드높인다.

"개가 이 모양인 걸 보니 주인 놈도 알만하네!"

"따, 딱 걸렸어. 당신 덕분에 당신 주인 학교생활 아, 아주 조, 좆됐어! 편치 못할 거라고!"

"이거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키우는 개 때문에 인생이…."

"……그만."

도저히 더는 들어줄 수가 없다. 도가 지나치는 언행에 도리어 머리가 차게 식었다.

"기사의 덕목은 총 7가지로 무용, 성실, 명예, 예의, 경건, 겸양, 약자보호 등이 있지."

"뭐, 뭐라는 거야?"

"근데 너넨 말이야……."

낮게 읊조리며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는다.

저벅.

"무예도 용맹함도 갖추지 못하고."

저벅.

"배움을 청하러 온 학교에서 술 냄새나 풍기고."

"가, 가까이 오지마!"

저벅.

"명예는 개나 줘버린 데다."

"머, 멈춰!"

저벅.

"예의는 밥에 말아 먹었는지 따박따박 삿대질에 반말이나 하고."

"조, 조용히 안 해?!"

저벅.

"경건하기보단 경박하고."

"커, 커억!"

걸어가며 내 뿜는 살기에 호흡이 곤란한지 일제히 목을 부여잡는다.

저벅.

"겸손할 줄은 모르는 녀석들이 자기 과시는 하늘을 찌르고."

살기에 마력을 더하자 바닥에 주저앉아 가죽 바지를 축축이 적시다.

저벅.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괴롭히고 싶어 참지를 못하지."

이내 눈을 까뒤집고 게거품을 물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잠 다 깼네."

"거기 무슨 소란입니까!!!"

복도 끝에서 거칠게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오우거 상의 교수에게 태연히 말을 건넸다.

"교수님, 학생들이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요? 네 이놈들을 그냥!"

교수가 분개하며 장정 네 명을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소소한 감탄을 자아냈다.

"호호호우!"

'어디 혼 좀 나봐라!'

#

잠시 후 첫 수업을 마치고 나온 레이첼이 좀 전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

"로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거 아닙니다. 웬 학생들이 아침부터 술을 먹고 왔더라고요."

"그래?"

손등으로 턱을 문지르며 반신반의하는 레이첼 뒤로 그녀의 친구들이 덥석 내 팔을 잡는다.

"로한 경! 괜찮으세요?"

"예? 아, 저는 괜찮죠."

'나야 뭐,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그것도 다 갚아줬으니…….'

그런데 그녀들이 묻는 건 조금 전 일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 간밤에 큰일을 겪으셨다면서요!"

"맞아요! 레이첼에게 들었는데 저택이 부서지고… 또 경비병들도 죽고…!"

"아…. 그렇죠. 큰일이었습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분들이 걱정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집사랑 호룬이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고 하니까 학교 끝나면 가봐야 할 것 같아."

착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레이첼을 보고 나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가봐야죠."

"그런데 레이첼이랑 로한 경, 식사도 못하고 오셨다면서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어떡해!"

'나는 케이크 먹긴 했는데….'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얼른 내려가서 뭐라도 먹어요, 우리."

오늘은 오전 교양 수업이 한 시간 공강이었기에 시간이 넉넉했지만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안 먹을래."

"저도 입맛이 없네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점심이니까 그때 먹을게요. 지금은 차나 한잔하시죠."

그렇게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티타임을 가졌고 오전의 교양 수업 2시간을 더 듣고 나서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가씨, 그래도 좀 드세요."

포크만 깨작거리고 있는 레이첼에게 권유를 해보지만, 그녀는 입맛을 한 번 다시더니 흐리멍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입맛이 없어."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정신을 차리셔야죠."

"그래, 레이첼. 있다가 장례식에도 가야 하는데 미리 먹어둬야지. 여태 차 한잔 밖에 안 마셨잖아."

"그래, 좀 먹어. 걱정돼……."

그녀는 나와 친구들의 눈치를 보더니 고기 한 점을 찍었다.

"후우, 알겠어. 먹을게. 그러니까 그만 쳐다보고 너희도 얼른 먹어."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 쪽 테이블을 지나치던 남자 넷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선다.

"이야, 레이첼 아니야? 지난번엔……너, 너, 너, 너, 넌…!?"

"어억…!!!"

"사, 살려줘!!!"

"아, 아니야! 난 아니야!!!"

그러고 뭔가 말을 하려던 것 같은데 레이첼 옆에 가려있던 내가 고개를 빼꼼 내밀자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부리나케 식당을 빠져나간다.

"뭐야, 쟤들?"

"쟤네 칼로스 패거리들 아냐?"

"방금 레이첼보고 도망간 거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레이첼과 친구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가씨들.'

"저번에 레이첼이 나서고 나서 겁먹었나 봐!"

"어머, 레이첼 멋져!"

그래도 덕분에 처졌던 분위기가 조금은 돌아왔다.

'뭐, 이것도 잠시뿐이겠지만….'

모든 수업을 마치고 한사코 따라가겠다는 친구들을 간신히 떼어놓은 우리는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전 한편에 있는 영안실로 향하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와 호룬, 그리고 흰 사제복을 입은 신관 한 명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해요. 어서 들어가죠."

영안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덟 개의 염습대 위에 싸늘하게 식어있는 시체 여덟 구가 놓여있었다.

이미 시체는 우리가 오기 전에 수습이 되어있었지만, 그럼에도 시신의 상태는 끔찍했다.

의문의 괴한에게 갈가리 찢겨서 사지가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로 꿰맨다고 꿰고 피와 오물을 닦아내었어도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전지전능하신 모레스님이시여…. 우리의 불쌍한 어린 양을 어루만지어 평안한 길로 이끄시고…."

성호를 긋고 신께 기도를 올리는 신관의 차분한 목소리가 영안실에 울려 퍼지고 나와 레이첼, 집사와 호룬은 고개를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경비병들의 염습은 한 명씩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염습이 끝난 시신들은 레이첼과 내가 수의를 입히고 기존에 고인이 사용하던 물품과 함께 보존 마법이 걸린 관에 실려 예배실로 옮겨졌다.

장례식엔 많은 사람이 찾아오진 못했다. 고인들은 본래 제르미온 가의 병사들이었기에 유족들 역시 제르미온 백작령에 있어 올 수 없었다.

이들의 장례식은 여기서는 하루만 치러지고 백작령으로 이동하여 유족들 앞에서 제대로 된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그들을 애도하는 건 수도에 머물고 있던 하인들과 살아남은 경비병들이 다였고 그마저도 최소한의 인력은 저택에 남아야 했기에 오지 못했다.

"크흑, 존!"

"흐흐흑, 호안.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네가 아니라고…. 흐흑…!"

"제임스…. 부디 좋은 곳으로……큭! 젠장! 어디가 좋은 곳이란 거야…! 죽고 난 후에 좋은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휴버트 이 친구야…. 벌써 그리 가버리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 장례식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

고인들의 관을 싣고 제르미온 백작가로 향하는 마차가 수도를 떠났다.

'가족들 품에서 안식을 취하시길….'

마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우리는 다시금 저택으로 돌아왔다.

까악­ 까악­

툭툭.

그리고 새벽 통틀 녘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내 창문을 부리로 쪼아댔다.

끼익.

창문을 열자 까마귀의 발에 묶인 종이 한 장이 보인다.

스륵.

헤릭스의 서신이었다.

­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까악­ 까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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