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암살자 나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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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온 백작가의 주 수입원은 백작령에 거주하는 영지민들의 세금과 광산 사업이다.
특히나 요즘 들어 주목받고 있는 게 광산 사업이었는데 약 3달 전 제르미온 백작 소유의 광산 중 한 곳에서 미스릴이 발견되고 부터 수익이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그로 인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백작가 내부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현재 프로버 제르미온이 가주로 있으며 약 한 달 뒤 그의 장녀인 레이첼 제르미온이 작위를 승계할 예정이었는데 프로버가 다소 젊은 나이에 가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이유는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20년 전 벌어진 세계 대전.
인간과 인간, 엘프와 드워프, 수인족 등의 이종족과 몬스터까지 서로의 이권을 위해 대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참혹한 전쟁.
그 전쟁의 여파로 프로버는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전쟁이 끝난 후 전후처리와 함께 완전히 바뀌어버린 영지의 체계를 재정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 덕에 몸 상태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
모든 체계가 안정되고 자신의 몸을 돌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지금은 간신히 건강을 유지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 영지를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았고 때문에 장녀인 레이첼이 학교를 졸업한 직후로 작위 계승식의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레이첼의 작위 계승식 날짜가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하교하는 레이첼을 태우기 위해 마중 온 마차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친구들과 시내를 나갔던 레이첼은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자신을 누군가 노리고 있음을.
그리고 의뢰했다.
제국 최고의 암살자 길드, 그림자 매에 자신을 지켜달라고.
"흐음…."
레이첼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존재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귀족 가문에 암투란 비일비재하다지만 제르미온 가문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했다.
전쟁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모두 죽었고 아버지인 프로버를 제외하고 유일한 혈육인 동생 레이나와는 사이도 좋을뿐더러 그녀의 동생은 현재 제국 마탑의 마법사로서 활동하고 있어 매우 바쁘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인 프로버가 자신을 노릴 리도 없으니 최선의 판단으로 그림자 매에 의뢰한 것이다.
자료를 하나씩 꼼꼼히 읽어본 나는 결론을 내렸다.
'헤릭스, 레이첼 이 멍청한 녀석들.'
딱 보면 모르나?
범인은 레이나다. 자신의 심중을 숨기고 백작가를 꿀꺽하려는 거지.
사이가 좋다는 건 아마 레이첼 혼자만의 착각일 거다.
그녀의 동생은 속으로 비수를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언닝! 헤헤헤!"
"왜 왔어, 레이나. 마탑 일도 바쁠 텐데."
둘째 날 하교하는 우리 앞에 나타난 레이나는 레이첼을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은 채 저러고 있다.
'가증스럽군.'
왜 왔겠냐. 암살 대상을 살피러 왔겠지.
"보고 싶어서 왔징!"
저 말투 너무 가증스러웠다. 자신의 언니를 죽이려는 녀석이 저런 혀 짧은소리를 내다니.
그녀는 레이첼의 팔에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근데 이분은 누구야?"
"새로운 호위 기사인 로한이야."
"아, 로한 경. 안녕하세요! 레이첼 언니의 동생 레이나에요!"
"……로한입니다."
"근데 갑자기 웬 새로운 호위 기사? 호룬 경은?"
"계승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혹시나 해서. 호룬 경은 저택을 지키고 있고."
"헤에? 언니가 그런 걱정을 해?"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럼 나도 언니랑 같이 있을까?"
"안되지. 너…."
"안됩니다."
내가 단호히 말하며 팔을 뻗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어맛! 왜 그러세요?"
"왜 그래, 로한?"
"아가씨한테서 떨어져 주시죠."
"저 우리 언니 동생이거든요?"
다시 레이첼의 몸에 손을 뻗으려는 레이나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히잉, 언니…."
'우는 소리 해봤자 소용없다! 이 악랄한 녀석!'
그런데 입을 꾹 닫고 서 있는 나를 레이첼이 밀어낸다.
"어어?"
"저리 비켜, 로한."
나를 밀어낸다고?
그러면서 레이나를 품에 안고 토닥이는 레이첼.
"어쨌든 안돼. 너 마탑 일도 바쁜데 어떻게 같이 있어."
"힝. 그치만 언니랑 같이 있고 싶은걸."
나는 안중에도 없이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어우, 답답해!'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뻔한 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잠시 후 집으로 향하는 마차가 오자 마나를 뻗어 마차 전체를 감지했다. 헤릭스가 준 정보를 보고 나서 이렇게 하고 있는데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하긴 자신이 같이 탈 마차에 이상한 짓을 해놓진 않겠지.'
우리는 마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고 저녁 식사까지 무난히 마쳤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후 레이나가 레이첼의 방 침대로 뛰어들며 내뱉은 말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랭."
"그건 안돼."
다행히 내가 말하기 전에 레이첼이 레이나를 끌어내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제 마탑으로 돌아가."
"히잉, 왜에. 자고 가면 안 돼?"
"언니랑 있으면 위험해."
"내가 지켜줄게!"
"습! 그만해.더 늦기 전에 얼른 가자."
레이첼은 레이나를 안아 들고 저택 밖까지 걸어갔다.
'20살도 넘은 녀석이 왜 이렇게 애처럼 구는 거야?'
나랑 대화할 때는 그렇지 않은데 레이첼과 대화할 때면 꼭 철없는 아이 같았다.
'저 모든 행동이 계략이라면 이해가 가긴 하네. 대단한 연기야.'
고개를 끄덕이며 출입구를 나서자 어느새 연락을 받은 마부가 마차를 끌고 와 있었다.
저 마부도 의심이 간다. 예전 마부가 폭발 사고로 죽고 새로운 마부인데 조사해본 결과 너무 평범하다. 적당히 평범했으면 모르겠는데 너무 평범한 게 마음에 걸린다.
'내가 너무 의심하는 건가?'
레이첼이 레이나를 안은 채로 마차에 태우고 레이나가 품에서 작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레이첼에게 건넨다.
"언니 이거 받아."
"어머, 이게 뭐야?"
"히힛, 언니 주려고 준비한 선물!"
"열어봐도 돼?"
"응!"
레이첼이 그 자리에서 상자의 포장을 풀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브로치가 나왔다.
은빛이 감도는 검 모양 위에 알이 작은 붉은색 보석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레이첼이 감탄을 자아내며 왼쪽 가슴에 브로치를 달았다.
"와아! 예쁘다! 고마워, 레이나!"
"예뻐? 헤헤, 다행이다."
"그럼 누가 준 선물인데. 매일 착용할게."
"응! 꼭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봤다면 화기애애한 자매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검 모양의 브로치. 붉은색 보석…. 피로 물든 검…. 대담하게 자기 뜻을 표현하고 있군.'
"이제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언니 도착하면 연락할게!"
작별을 고하는 두 자매의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때 레이나가 내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로한 경! 우리 언니 잘 지켜주세요! 다음에 또 봬요!"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이건 도발인가…?'
"아,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레이나를 떠나보내고 저택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레이첼의 방부터 탐색했다.
'아까 침대에 누웠을 때 무슨 짓을 했는지 벌여놨을지 모른다.'
마나를 퍼뜨려 침대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자 레이나가 물었다.
"거기 서서 뭐해?"
"잠시만요…. 예, 됐네요."
"되긴 뭐가 돼? 나가 빨리."
축객령에 레이첼의 바로 옆 방인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뭐지?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간 건가?'
흠, 뭐 오늘은 그냥 갔나 보군.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다시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헤릭스에게 다시 찾아갔다.
여전히 서류 더미에 파묻힌 채 일하고 있는 헤릭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또 오셨어요?"
"그래, 매일같이 올 거다! 새로운 정보는?"
"새로운 정보라고 할 건 없는데요?"
"그러냐? 그럼 일단 레이나와 마부인 한스에게 감시 좀 붙여놔야겠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나는 감시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겁니다."
"왜지?"
"마탑 내부로 들어가는 건 저희도 불가능하니까요."
"흠…. 알았다. 그럼 밖에 나왔을 때만이라도 감시 좀 붙여놔. 계승식까지."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체력이나 마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영약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런 걸 구하려면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귀족 전용 경매장에 가야 한 번씩 나올까 말까 할 겁니다."
"경매장이라…. 알았어. 하여튼 그 두 명 잘 좀 감시해줘."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멀리서부터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곧장 담장을 넘어 달려가는데저택 뒤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경비병들은 보이지 않고 뒤뜰 전체가 온통 피투성이다. 그리고 저택의 바로 뒤편에는 웬 가면을 쓴 괴한이 건물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뭐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딜 보는 거지?'
시선을 따라가기도 전에 괴한의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가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이크!'
뭔진 몰라도 일단은 막아야 했다.
쾅!
바닥이 움푹 파이며 괴한의 몸이 위로 쏘아진 총알처럼 솟아오르고.
뒤따라 도착한 내가 그의 머리를 잡고 건물에 처박았다.
카가가가가각!
저택의 외벽이 포물선을 그리며 부서지고 있는 와중에 괴한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헙?!"
손에 잡히기 전에 머리를 던져내고 외벽을 차내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나는 괴한의 상태를 살폈다.
우득. 우득.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은 괴한의 상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누구냐, 넌."
"……."
가면의 괴한은 대답하지 않았고 밤중에 울리는 과격한 소음에 저택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빛이 비치자 가면을 쓴 상대의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미터가 넘는 키와 우락부락한 덩치. 그리고 가면 아래로 드러난 목의 피부는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쾅!
갑작스레 다시 달려드는 괴한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일단 팔다리부터 잘라주마.'
그림자 매의 비전으로 전해지는 영월공을 사용하자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그대로 검 위에 마나를 덮어 검날을 형성하고 마나가 응집된 검날을 휘둘러 녀석의 팔다리를 향해 쏘아 보냈다.
'등급이 7 정도 되니 이런 묘기가 가능하네.'
쏘아진 마나 블레이드가 허공을 넘어 괴한에게 격중했다.
콰과과광!
그런데 팔다리가 가르고 지나가는 파육음이 들려오는 게 아니라 두꺼운 쇠를 두드린 듯한 폭음이 울려 퍼진다. 바닥이 박살이 나고 먼지가 솟아올랐는데도 먼지를 뚫고 드러난 괴한의 모습은 옷만 찢어져 있을 뿐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강철이라 할지라도 잘라낼 위력일 텐데 몸의 강도가 비상식적이었다.
콰과광!
"흡!"
게다가 계속해서 쏘아내는 마나에 상처는 입지 않을지라도 몸이 밀려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꿈쩍도 하지 않고 돌진해 와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드드드득!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거대한 충격파로 인해 뒤집힌다. 하지만 속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빠른 게 이 몸이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나를 잠시 응시하는 듯하더니 이내 저택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목표를 수정한 것이다.
"로한, 무슨 일이야!"
"나오면 안 돼!"
창가로 고개를 내민 레이첼과 그녀를 응시하며 달려가는 괴한. 달려가는 괴한에게 다시 한번 마나를 쏘아 보내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하아, 젠장."
'마나 폭주.'
방대한 마나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가공할만한 마력이 온몸을 잠식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감각 속에서 오로지 나만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숭. 쿠구구궁.
달려나가던 괴한의 팔다리가 비현실적으로 잘려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그 몸뚱어리가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몇 번이고 구른다.
"후우!"
끓어오르는 마나를 가라앉히며 괴한의 가면을 벗겼다.
눈과 코만 뚫려있는 가면은 얼굴에 고정된 것처럼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는데 좀 더 힘을 주자 살점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가면이 벗겨졌다.
벗겨진 가면 속 얼굴은 실로 괴상했다.
뜯긴 피부밑에는 검푸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입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가슴팍으로부터 눈부신 푸른빛이 뿜어지며 몸 전체로 빠르게 빛이 번져나갔다.
"……!!!"
나는 곧장 괴한의 몸통을 들고 저택의 끝으로 달려가 허공에 내던졌다.
그리고 온몸에 마나를 두른 채 몸을 웅크렸다.
콰아아앙!
눈부신 섬광과 함께 허공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고.
파바바바박!
단단한 푸른색의 살점이 비수처럼 널리 뿌려진다.
등을 두드리는 묵직한 충격이 수차례 몸을 흔들고 나서야 주위가 조용해졌다.
폭발 뒤의 기나긴 정적 끝에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건물 밖으로 나오고 레이첼이 풀 플레이트 메일에 투구까지 착용한 완전 무장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로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잠시 후 수도 경비병들이 밤중의 소란을 조사하기 위해 저택에 들이닥쳤다.
나는 수도 경비병들이 보기 전에 괴한의 팔 하나를 집어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수사에 성실히 응했다. 남은 팔 하나와 다리 두 개 그리고 괴한의 살점과 괴한에게 당한 자택 경비병들의 시신까지 수도 경비병들이 수거해갔다.
수사는 아침 동이 틀때까지 이어졌다.
대부분 피해 정황을 포착하고 시신을 수거하는 시간이었고 소란의 중심에 있던 나와 저택의 주인인 레이첼이 꽤 오랫동안 붙잡혀 진술했다.
'별로 할 말도 없는데 뭘 그리 묻는지 원.'
피로에 절어 있는 레이첼을 강의실에 집어넣고 첫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학교를 벗어나 헤릭스에게 향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의 헤릭스는 한층 더 피곤해 보였다.
"밤 중의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너 잠을 자기는 하냐?"
"이제 자려고 했습니다만…."
"미안하지만 이게 뭔지 좀 알아봐 줘."
나는 아공간에서 괴한의 팔을 꺼냈다.
"이건…?"
"어제 저택을 침입한 괴한의 팔이야."
"이건 사람의 팔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봐도 그래. 그러니까 이 팔의 정체를 좀 알아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나는 딸기 케이크 조각을 입에 털어 넣고 휴게실 소파에 누웠다.
"끄아아아. 아,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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