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암살자 나인 (4)
* * *
"아, 그 전에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은 래펄입니다."
"로한입니다."
"로한 경. 그럼 한 수 부탁드리겠소."
푸르스름한 마나가 래펄 교수의 무인검을 덮는다. 그는 곧 검 끝을 머리 위로 향하는 상단세의 자세를 잡고 그대로 보법을 밟아 검을 내려 베었다.
나는 래펄 교수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고 그가 재차 발을 딛으며 밑으로 향한 검을 좌에서 우로 올려 베자 우에서 좌로 내려 베며 검을 맞대어 주었다.
쾅!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마나와 마나가 서로 부딪쳐 상쇄되는 폭음이 울려 퍼진다. 교육용 대련이라지만 마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강도의 검은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날이 부러지고 말 테니.
카가가가각.
맞붙은 래펄 교수의 검이 뱀처럼 내 검을 휘감고 올라온다.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올라오는 그의 검을 반 시계 방향으로 올려 쳐내고 이어서 발을 한걸음 내디디며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교수의 상체를 베어간다.
"흡!"
검을 내려 막는 자세를 취하고 앞발을 밀어 뒤로 물러서는 래펄 교수.
그를 쫓으며 생각했다.
'아, 귀찮은데…. 그냥 이겨도 되나……?'
기사랑 대련을 해본 적이 없으니 원.
나인의 기억 속에서 기사와 검을 맞대본 적이 없진 않으나 나인과 검을 맞댄 기사는 모두 시체가 되었다.
'일단 해보자.'
왼발을 앞으로 내민 기본적인 자세로 보법을 밟으며 뒤로 물러서는 래펄 교수와 가까이 붙자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내려 베던 검과 래펄 교수의 검이 부딪친다.
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림자 같은 몸놀림으로 래펄 교수의 튀어나온 왼발을 걷어찬다.
부웅!
"어억!"
허공에 붕 뜬 교수가 볼품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척.
쓰러진 그의 목에 검을 겨눴다.
"……."
강의실에 묘한 정적이 흐르고.
이어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뭐야, 저거! 미쳤는데?"
"래펄 교수가 순식간에 당했어!"
나는 검을 거두고 래펄 교수에게 손을 뻗었다.
"…크으!"
"괜찮으십니까?"
"허허,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금 사용한 기술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기술의 이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잠시 생각하던 끝에 적절한 이름을 떠올렸다.
"이 기술의 이름은 '모두 걸기'입니다."
모두 걸기란 유도기술 중 하나로 발기술을 이용한 메치기인데 일본식 이름인 와사바리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에 유도를 배우던 친구가 있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 걸기? 허…. 굉장히 독특한 이름이군요. 외국의 무예인가요?"
"아, 예. 예전에 우연히 배울 기회가 있어서."
"허어, 대단합니다. 젊은 나이에 검술뿐만 아니라 체술까지."
우려와 달리 교수와 학생들까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비겁한 수를 썼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칭찬을 하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맨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로한 기사님!"
"예?"
"저희한테도 그 기술을 가르쳐주실 수 없나요?"
"맞아요! 알려주세요!"
"알려줘! 알려줘!"
"……."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래펄 교수를 바라보는데 인자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그가 보인다.
"허허, 로한 경. 실례지만 저와 학생들에게 모두 걸기라는 기술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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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압!"
"하앗!"
기사학교의 한 강의실에선 서로 옷깃을 잡고 발을 걸어 상대방을 넘어트리는 모두 걸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로한 경.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까?"
래펄 교수와 학생들에게 모두 걸기의 원리와 방식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준 뒤 뒤편으로 돌아와 구경하고 있는데 뒤편에 있던 호위 기사들마저 서로 모두 걸기를 걸며 질문해 온다.
'니들은 또 왜 그러냐…….'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질문을 한 기사에게 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오른쪽으로 당김과 동시에 그의 다리를 왼쪽으로 차 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붕 떠오른다.
떠오른 그의 몸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말했다.
"이렇게 차 보세요."
내가 오른 발바닥으로 기사의 오른 발목을 차는 시늉을 하자 기사가 내 오른 발목을 차왔다.
그 발길질을 피하며 되려 떠오른 그의 오른발 뒤쪽을 차 낸다.
쿵.
"컥!"
이번엔 잡아주지 않아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오오!"
"중요한 건 상대나 자신의 힘을 이용해 중심을 무너트리는 겁니다. 그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제가 래펄 교수와 대련하며 검의 힘을 우로 향하게 하고 교수의 왼쪽 발목을 좌로 차낸 것처럼. 기술은 응용하시기 나름입니다."
"아아!"
"로한 경, 가르침 감사합니다!"
"아, 예. 예."
바닥에 떨어졌던 기사가 벌떡 일어나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상대에게 가 열심히 기술을 연습한다.
'이게 뭐냐…….'
사람들이 내가 알려준 기술을 열정적으로 수련하는 모습을 보자 뭔가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무예에 미친 사람들.'
오후의 기사 수업은 그렇게 흘러갔다.
물론 계속 모두 걸기만 연습하며 흘러간 것은 아니고 래펄 교수의 적절한 통제와 과목에 따라 육체 단련과 검술 훈련, 마나 운용법 등에 대한 강의도 이어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수업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시내로 향했다.
시내의 한 디저트 전문점은 꽤나 유명했는지 사람들로 붐비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일을 꾸미기가 좋았기에 더욱 레이첼의 호위에 신경을 썼다.
"꺄앗! 너무 맛있어!"
"로한 경도 드셔보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끝없이 주시하며 조이가 내민 사과 파이 한 조각을 받아 한입 크게 베어 문다.
"오, 맛있네요."
겉은 적당히 바삭하고 속은 달콤한 사과잼으로 촉촉한 게 단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사과 파이 한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곤두선 신경이 가라앉고 오늘 하루 동안 마음고생 한 게 싹 가시는 기분이다.
"그쵸? 맛있죠?"
"이것도 드셔보세요!"
조이에 질세라 아일라와 헤이즈까지 자신이 시킨 케이크와 쿠키 등을 내밀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화기애애한 디저트 타임이 끝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장비 상점이었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여긴 왜…?"
"오늘 고생했으니까 골라 봐. 당분간 학교에 계속 와야 할 텐데 그 차림으로 돌아다니긴 그렇잖아?"
"아…."
'하긴 장비가 좀 해지긴 했지.'
암살용 복장과 장비들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있긴 했지만, 그것들을 착용할 수는 없었다.
레이첼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상점 내부를 둘러보자 진열된 장비들의 질이 제법 좋아 보였다.
'디자인도 뭐 나쁘지 않네.'
"이게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흠, 괜찮긴 하네요."
레이첼이 골라온 장비는 짙은 회색 가죽을 기반으로 한 경갑이었다. 군데군데 검은 털로 장식한 디자인이 제법 괜찮았다.
"이건 어때요?"
"음…. 무난하네요."
조이가 가져온 건 갈색의 가죽 위에 철갑을 두른 경갑으로 무난했다.
"이거는요?"
"디자인은 괜찮은데 색깔이 좀…."
"이것도 괜찮은데."
"나쁘지 않네요."
아일라와 헤이즈가 가져온 몬스터 가죽의 녹색과 파란색의 가죽 갑옷까지 거울 앞에서 대어 봤지만, 확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둘러 보던 중 상점의 주인이 물어왔다.
"손님, 혹시 원하시는 제품이 있으신가요?"
"어…. 검은색 계열의 경갑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검은색 경갑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주인이 계산대 안쪽으로 이동하더니 검은색 가죽의 경갑을 들고 나왔다.
"끙차! 이게 이번에 들어온 신상입니다. 아직 진열도 하지 않은 제품인데 와이번의 가죽을 마법 처리해서 불과 냉기에 강하고 신축성도 좋습니다. 게다가 상체에 덧댄 흉갑과 견갑, 배갑 역시 마법 처리한 흑철을 사용했기 때문에 무게도 가볍고 항마력도 상당한 수준이라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능성까지 모두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제품입니다."
그의 장황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요."
전체적인 디자인도 괜찮았지만, 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어두운 검은색 가죽이 무광처리 된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한 번 입어보세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죠?"
"사이즈는 특대입니다."
잠시 후 장비를 갈아입고 나오자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와! 정말 잘 어울려요!"
"옷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정말이네!"
"멋있어요, 로한 경!"
"…괜찮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인 데다 나 역시 마음에 들었다. 옷의 착용감도 불편한 곳 없이 편한 게 딱 좋았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 레이첼이 상점 주인에게 물었다.
"항마력 등급이 어떻게 되죠?"
항마력 등급이란 항마력의 수치에 따라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나눈 것인데 수치가 높을수록 등급의 숫자가 높았다.
보통 3등급 이상이면 괜찮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흑철의 항마력은 5등급, 와이번 가죽의 방염, 방냉은 4등급입니다."
'오, 괜찮은데.'
생각보다 높은 등급이다.
'근데….'
좀 비쌀 거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질이 좋을수록 가격은 높게 측정되기 마련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가격은…."
"계산해 주세요."
레이첼이 얼마인지 듣지도 않고 대뜸 계산대로 향했다.
"하하,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길을 걷는 중간에 고개를 숙여 레이첼에게 귓속말을 했다.
"얼마 나왔어요?"
"얼마 안 나왔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호위나 잘 해줘."
"옙! 알겠습니다. 감사히 잘 입겠습니다."
그렇게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레이첼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밤이 깊을 무렵 조용히 담장을 넘어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길을 지나쳐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 막다른 골목의 벽 앞에 섰다.
슥. 철컹. 드르르륵.
벽면의 장치에 손을 가져다 대자 벽돌 하나가 움푹 들어가며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벽이 안쪽으로 접히며 짧은 평지 너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등이 하나씩 놓인 기다란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내가 들어온 벽이 다시 닫힌다.
내려가는 중간중간 문으로 보이는 것들이 보였지만 무시하고 지나친다.
몇 개의 문을 지나쳐 어느 지점에 멈춰 선 나는 문이 아닌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잉. 철컥. 드르르륵.
무언가 손바닥을 훑는 감각과 함께 다시 한번 벽이 열리며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의 끝에는 안경을 쓴 더벅머리의 남자가 수많은 서류와 책더미에 파묻힌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눈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에 정리되지 않은 채 널브러진 종이들이 사실은 체계적으로 분류된 서류임을 알고 있던 나는 종이 사이사이의 틈새를 밟으며 나아갔다.
안경 낀 남자의 앞에 조용히 서자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정보는?"
"다리 쪽에 묶여있는 종이 뭉치 보이시죠?"
그의 말대로 내 발치에 빨간색 매듭으로 묶여있는 종이 뭉치가 보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헤릭스."
"왜 그러시죠?"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그에게 말했다.
"쉬엄쉬엄해라."
서류를 보던 헤릭스는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예?"
"좀 쉬면서 천천히 일하라고. 보는 내가 다 숨 막힌다."
"허…."
"그럼 수고해라."
왜인지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리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인님."
"엉?"
"조심하십시오."
"뭘?"
"이번 임무……. 자료를 조사하며 느꼈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흑막이 존재할 가능성이 큽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릭스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등을 돌렸다.
"우리도 흑막이야 인마. 진짜 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