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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28화 (28/62)

〈 28화 〉 암살자 나인 (2)

* * *

제르미온 백작가.

제르미온 백작가는 수도에 본거지를 둔 귀족 가문이 아니었다. 오래전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지를 다스리는 전통적인 세습 귀족 가문이다.

알펜하임 제국의 수도, 운다인은 중심으로부터 황제와 황족들이 거주하는 황성, 수도에 본거지를 둔 귀족이 거주하는 소성, 대부호들이 거주하는 대저택, 그리고 평범한 평민들이 거주하는 주택과 외곽에 존재하는 가난한 자들의 판자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의뢰인이 사는 곳은 수도의 어느 한 곳에 자리한 대저택이었다.

'……엄청나네.'

어마어마한 규모의 담장 앞에 서자 주눅이 들 지경이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에는 경비병으로 보이는 병사 두 명이 출입문을 막고 서 있다.

척. 척.

가까이 다가가자 두 병사가 창을 교차하며 내 앞을 막아선다.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제르미온 백작가의 후계자에게 의뢰를 받아왔습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의뢰서를 꺼내 들었다.

"후계자의 직인이 찍힌 의뢰서입니다. 그림자가 왔다고 하면 알 겁니다."

"그림자…?"

의뢰서의 직인을 본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 중 하나가 품에서 검은색 통신기를 꺼냈다.

"대장님, 레이첼님의 직인이 찍힌 의뢰서를 들고 누가 찾아왔습니다."

'레이첼?'

아무래도 의뢰인의 이름이 레이첼인 듯싶다. 뭔가 여자 이름 같은데.

­ 누가?

"그림자가 왔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합니다."

­ 내가 바로 가지.

"잠시 기다리면…."

쾅!

굉음과 함께 온몸에 철갑을 두른 거구의 남자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반갑소. 난 이 저택의 경비대장이자, 기사인 호룬이라고 하오."

'말투가 왜 이래?'

자신을 호룬이라고 밝힌 남자가 금속으로 된 장갑을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빽빽하게 박힌 거친 손바닥과 달리 주먹은 비교적 깨끗해 보인다.

'검술만 익힌 모양이네.'

손을 뻗어 호룬의 손을 잡자 다소 거칠어 보이던 그의 손이 아이의 손처럼 귀엽게 느껴진다. 단련된 기사의 손조차 나인의 손에 비하면 한낱 어린아이의 손에 불과한 것이다.

"반갑습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빼려는데 이 양반, 손을 놔주질 않는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림자의 실력을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그러면서 손아귀의 힘을 더 세게 쥔다.

"기사에게는 기사도라는 예의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기사도라는 게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것도 당신 같은 암살자에겐 더더욱!"

온 힘을 다한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눈의 실핏줄과 드러난 이마와 목의 혈관이 도드라진다.

"하아아암……."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그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도 힘줍니다."

까드득!

"끄아아아아악!"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호룬의 손이 잔뜩 오므려지며 비명을 질러댄다.

"대, 대장님!"

"그 손 놓으십쇼!"

창을 들이미는 두 병사에게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

덜덜덜덜. 챙그랑!

그저 살기를 내뿜었을 뿐인데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손을 벌벌 떨던 병사들은 급기야 들고 있던 창을 놓치고 만다.

주르륵. 똑. 똑.

병사들의 갑옷 사이로 무언가 흐르며 불쾌한 지린내가 진동하자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병사들을 뒤로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끄윽거리는 호룬에게 그의 말투를 따라하여 말해본다.

"경험은 잘 되었소?"

"크윽!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순순히 손을 놓아주자 그는 악수한 손을 반대쪽 손으로 주무르며 나를 노려본다.

"크윽…."

나는 그의 눈을 무심하게 마주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아니 뭐, 경험을 하고 싶다길래."

작은 소란 끝에 드디어 의뢰인의 방문 앞에 섰다.

똑똑똑.

"레이첼님. 그림자가 찾아왔습니다."

호룬이 방문을 두드리자 발성이 탄탄한 미성이 들려온다.

­ 잠시만 기다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가벼운 경갑 차림에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동그랗게 말아 올린 올림머리의 여자가 나온다.

잘 정돈된 백금빛의 눈썹 아래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날 보더니 이채를 띤다.

"아, 당신이 그림자 매의 그림자?"

"그렇습니다."

"일단 갑시다."

"어디를…?"

여자는 절도있는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빠르게 복도를 걸어간다.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한다.

"내 이름은 레이첼 제르미온이오. 그대의 이름은?"

"로한입니다."

"음…. 그게 지금 사용하는 이름인가."

"……."

'뭘 알고 하는 소린가?'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왜 암살자에게 호위를 의뢰한 거죠?"

"이유야 간단하오. 암살을 막으려면 유능한 암살자를 곁에 두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겠소. 당신이 그림자 매에서 가장 유능한 게 맞소?"

"음…?"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 나인. 실력과 별개로 그림자가 된 순서로 이름을 부여하기에 누가 실력이 우위인지는 모른다.

"내 가장 유능한 자를 호위로 붙여달라 의뢰하였는데…?"

"뭐, 그렇다면 제가 유능한 게 맞겠죠."

"흐음…."

"근데 그 말투는 원래 그런 겁니까?"

도무지 적응이 안 돼서 말이지. 여자가 저런 말투를 쓰니. 이것도 고정관념인가?

"기사의 말투란 게 보통 이렇소."

"아…."

그나저나 대체 어디를 가는 거야?

말을 하는 동안 저택 건물에서 벗어나 출입문을 향해 걷게 됐지만 아직도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근데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가는 겁니까?"

"훗, 댓바람이라…. 이상한 말을 쓰는구려."

'네가 더 이상하거든….'

"우리가 가는 곳은 학교요."

"학교?"

"내가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 말이지."

출입문을 열고 나가자 말 없는 마차가 서 있다. 마부는 존재했지만, 말이 없었고.

마부가 앉은 외부 좌석에는 자동차 핸들처럼 둥그런 핸들이 달려 있었다. 마석을 동력으로 삼는 자동차였다.

"타시오."

먼저 올라탄 레이첼이 문을 연 채 재촉하자 얼른 올라타며 물었다.

"제가 학교에 가도 되는 겁니까?"

"호위 기사의 신분으로 가는 것이오. 본래는 저기 보이는 호룬 기사가 동행했지만, 앞으로는 당신이 동행하게 될 것이오."

창을 보자 아직도 오른손이 저릿한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은 채 손을 흔드는 호룬이 보인다.

'그냥 왼손으로 하면 되지 않나?'

순간적으로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레이첼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 아뇨. 없습니다."

"근데 그림자 매의 그림자라는 사람이 얼굴을 그렇게 드러내고 다녀도 되오?"

"어차피 이 얼굴은 가짜라서 상관없습니다."

이 얼굴은 로한이라는 신분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다. 마법과 연금술로 얼룩진.

"호오, 가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대단하오."

"저, 죄송하지만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말해보시오."

일단 들어나 보겠다는 듯한 어투에 냉큼 말했다.

"말 좀 편하게 해주세요. 아까 보니까 호룬 경에게는 편하게 하시던데요."

"말을 편하게 해달라…? 혹 내 말투가 듣기 거북하오?"

"조금요."

"흠흠, 아, 아. 이러면 됐어?"

"아주 좋습니다."

내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반말하는 게 몹시 민망한 모양이다.

'기억에 의하면 귀족이 평민에게 반말하는 건 당연한 건데 이상한 녀석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외부에서 내부로 통하는 통신기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도착했습니다.

"그, 그럼 가자."

"예."

학교 내부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 있는 검문소의 지하에서 호위 기사를 증명하는 표식을 부여받고서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표식은 목걸이의 형태를 한 작은 금속이었는데, 마치 현대의 사원증과 같았다.

학교 내부로 들어가자 앞서 길을 지나고 있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사람들과 거대한 성처럼 높이 쌓아 올린 건물들이 눈에 띈다.

과연 알펜하임 제국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 불리는 에르머핀 대학의 명성답게 건물마다 저마다의 개성을 갖춘 화려한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복장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레이첼과 같이 가벼운 경갑 차림에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는 사람, 취향에 따라 기다랗거나 짧은 로브를 두르고 있는 사람과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복장을 한 사람으로.

기사학, 마법학, 연금학, 기술학 크게 4가지 학과로 나뉜 에르머핀 대학의 학생들은 그것에 맞게 복장을 갖춘 것이다.

암살자인 나인은 학교에 들어와 본 경험이 없었기에 나는 학교 안의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아니, 이거 꿈이 너무 정교한데?'

이전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꿈에서 시간을 보내도 현실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이 꿈에 대해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게다가 등급 7의 괴물 같은 힘을 지녔으니 이 기회에 괜찮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도 생각을 해봐야겠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한 달. 여유 있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가 기사학교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이첼이 기사학교라고 소개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문 앞에 선 레이첼이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좀 씻고 올래?"

"예?"

"너 너무 지저분해, 지금."

"아……?"

'아, 그러고 보니.'

눈을 뜨자마자 씻지도 않고 곧장 레이첼에게 향한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나를 곁눈질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혐오의 눈빛이었음을.

샤워실에 들어가 후다닥 씻고 나온 나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첼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씻는 걸 깜빡했네요."

"호위는 제대로 해주길 바래."

"옙!"

기사학교를 빠져나와 기사학교, 마법학교, 연금학교, 기술학교의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건물로 향했다.

"여긴 어디죠?"

"여긴 복지 학교야. 학생들이 이용하는 식당과 의료시설, 헬스장과 각종 오락시설, 그리고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휴게 공간과 교양 수업을 위한 강의실까지 구비되어 있어."

"그렇군요."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벽면에 스크린이 부착되어 있다. 거기에는 음식으로 보이는 사진과 함께 글자들이 쓰여 있는데 모두 음식의 이름이었다.

"흠…. 오늘은 1층이 별로네. 2층으로 가자."

"예."

그녀를 따라 2층으로 향하자 딱 봐도 1층보다 사람이 붐비었다.

'2층이 맛있긴 한가 보네.'

"너 좋아하는 메뉴 있으면 그쪽으로 가서 줄 서."

"아닙니다. 호위해야죠."

호위도 호위지만 뭐가 맛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나인은 미식가가 아니었기에 음식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줄은 세 줄로 나뉘어 있었는데 2층에 3가지 메뉴 1층에 3가지 메뉴 도합 6가지 메뉴가 한 타임에 제공되는 듯했다.

레이첼과 함께 2층에서 가장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식판에 음식을 가득 담은 경갑 차림의 여자 셋이 레이첼에게 다가왔다.

"레이첼! 왔어?"

"어, 얘들아."

"오늘은 좀 늦었네? 받고 저쪽으로 와."

"응, 알았어."

자신들이 앉을 테이블을 가리킨 여자들은 재잘대며 테이블로 향했다. 잠시 후 배식을 완료한 우리가 테이블에 합석하자 세 명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옆에 누구야?"

"오늘부터 함께할 내 호위 기사야."

"응? 그럼 호룬 아저씨는?"

"호룬 경은 이제 좀 쉬어야지."

"뭐야, 자른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 집에서 쉬고 있다고. 아, 쉬고 있다기보다는 경비를 하고 있다고 해야겠네."

"아…."

붉은 머리칼을 뒤로 묶은 여자가 내게 손을 내민다.

"반가워요, 저는 레이첼과 같은 학급 친구인 조이에요."

"아, 예. 반갑습니다. 로한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자 다른 여자들도 악수를 청하며 소개를 해왔다. 검은 머리의 아일라, 짙은 갈색 머리의 헤이즈까지 소개를 마치자 질문 세례가 퍼부어졌다.

"와, 손이 이렇게 거치신 분은 처음 봐요. 얼마나 단련을 하신 거예요?"

"제르미온 기사단 소속이신가요?"

"지금 경지가 어떻게 되세요?"

"여자친구는 있나요?"

"아, 하하…. 하나씩 해주세요, 하나씩."

내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는 우리의 의뢰인님을 보자 그녀가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가운 눈으로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왜 이래?’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덩치 좋은 남자 셋이 의자에 앉은 남자를 둘러싸고 식판의 음식물을 남자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이봐, 론. 평민 주제에 나대니까 이런 꼴이 되는 거야."

"그래,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킥킥,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게 딱 네 형편이랑 어울리네."

남자는 꽤 심한 수모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은 채 묵묵히 포크를 들어 음식을 씹고 있다.

드륵.

"어어? 하지 마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는 레이첼의 팔을 붙잡는다. 아니, 네가 갑자기 왜 일어나?

그녀가 곧 내 손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자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낮게 읊조린다.

"이거 놔."

'하나도 안 무섭거든?'

"안돼요."

내가 손을 놓아주지 않자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을 들이민다.

"이거 놓으라고 했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린다.

'이, 이건 좀 무섭네.'

내가 손을 놓아주자 그녀는 자신의 식판을 들고 덩치 셋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 안돼…!'

이윽고 식판에 담긴 음식물들을 덩치들에게 흩뿌리고 텅 빈 식판마저 그중 한 녀석에게 던져버린다.

퍽. 팅그르르르.

'……미치겠네. 진짜.'

여유는 무슨.

유난히 긴 한 달이 될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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