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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27화 (27/62)

〈 27화 〉 암살자 나인 (1)

* * *

요령을 터득한 것 같다. 자기 전에 암시를 반복하였더니 이번에도 입몽에 성공해 버렸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잘 정돈되어 있지만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방구석.

위험한 상황은 딱히 펼쳐질 거 같지 않아 몸을 일으킨다.

"오."

단순히 몸을 일으키는 동작만 취했을 뿐인데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작지만 안에 있는 구성품이 단조롭기 때문일까 허전해 보이는 방안을 둘러보다 이제 막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침상을 바라본다.

쓱쓱.

몸이 저절로 움직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베개를 정확히 가운데에 정렬한다.

'음….'

이 몸의 주인은 꽤나 정리하는 걸 좋아했는지 정돈된 침상을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상태창이나 확인해 볼…!'

"크윽!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두통에 나는 그만 침상에 주저앉고 말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닥쳐들었다. 한 인간의 기억과 그 삶이.

시작은 전쟁에 휘말려버린 한 마을이었다.

"애, 애야! 살려줘! 나, 난 집에 아내가 기다리고……컥!"

마을을 약탈하던 병사의 등에 검을 찔러넣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병사의 목에 무심히 검을 뻗는 소년이 있다.

"저 녀석 물건인데요?"

"데려가자."

병사들과는 달리 후드가 달린 검은 자켓에 복면을 두른 사내 둘이 소년에게 접근한다. 두 사내는 충분히 소년이 반응하기도 전에 소년을 제압할 능력이 있어 보였지만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간다.

소년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다.

소년은 예의 메마른 눈동자로 사내들에게 검을 휘두르고 찔렀다. 제법 날카롭게 찔러오는 소년의 검을 유려하게 피해낸 사내는 손날로 소년의 목을 쳤다.

"합격."

철퍼덕.

"와, 어린놈이 독하네. 비명도 안 지르는 것 보소."

다음 기억은 어두운 철창 안이었다. 드문드문 자리한 횃불만이 그곳을 밝혔다.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여, 여긴 어디야? 흐아아앙!"

"내보내 주세요!"

"흐흑, 무서워!"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철창 안에 갇혀있다. 눈을 뜬 소년은 조용히 아이들을 바라볼 뿐.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시끄럽다고 느끼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복면인들이 들이닥친다.

소란스럽던 아이들이 일제히 침묵하다 이내 더 큰 소란을 일으킨다.

"으아아앙! 꺼내주세요!"

"엄마아아아!!"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복면인들은 차례로 아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철창 밖으로 옮겨진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철창은 계속해서 비워져 곧 소년의 차례가 되었다.

소년과 같은 철창에 있던 여자아이가 복면인에게 물었다.

"저, 저기 어디 가는 거예요?"

복면인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여자아이 또한 더 묻지 않았다. 몇 개의 층계를 오르고 기다란 복도를 걷자 환하게 빛나는 통로가 보인다.

빛을 본 아이들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짓는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다만 소년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하다.

복도의 끝. 눈부신 통로의 앞에는 또 다른 복면인들이 서 있다. 아이들을 인계한 복면인들은 다시금 철창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와아아아아!"

통로는 굵은 철창으로 막혀 있었는데 통로의 앞에 서자 사람들의 환호성 같은 게 들렸다. 소년은 환호성보다 통로에서 흘러드는 비릿한 냄새에 집중했다. 소년과 아이들을 인계받은 복면인 중 하나가 물었다.

"먼저 갈 사람?"

"저, 저요!"

"제, 제가 먼저 들었어요!"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번쩍 들어댄다. 복면인이 그중 하나를 콕 집는다.

"그래, 너. 네가 가라."

"아싸!"

지목받은 남자아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복면인이 철창 옆의 버튼을 누르자 철창이 올라간다. 남자아이의 등을 떠민 복면인이 다시 버튼을 눌러 철창을 닫고 철창 사이로 단검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살고 싶으면 죽여라."

"에, 에?"

남자아이는 얼떨결에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고 환호성이 들리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복면인이 다시 물었다.

"먼저 갈 사람?"

"……."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소년이 천천히 손을 든다.

"어, 그래."

철창이 열리고 복면인이 밀기 전에 소년이 먼저 통로를 나선다.

"살고 싶으면…."

"죽여라."

소년은 복면인이 던져준 단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돌바닥이 사라지고 딱딱한 모랫바닥의 넓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래는 본연의 색을 잃고 붉고 검게 얼룩져 있었다.

"와아아아!"

"어이! 너한테 모두 걸었으니까 죽지 말라구!"

"에이, 시시하다! 좀 더 화끈하게 놀아줄 녀석 없냐!"

높은 돌담 위의 좌석에 앉아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소년은 바닥을 훑어 왼손에 모래를 쥐고는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아이는 겁먹은 듯 잔뜩 몸을 움츠리고 단검을 쥔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저벅저벅.

소년은 자신을 경계하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뭐, 뭐 하려는 거야?"

그리고 단검을 앞으로 내밀며 경계하는 아이에게 왼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뿌렸다.

"아악!"

휙휙.

아이는 눈에 들어간 모래 때문에 단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고 소년은 감흥이 없는 눈동자로 천천히 아이의 뒤로 돌았다.

팍.

"으악!"

소년의 발에 얻어맞은 아이가 넘어지며 단검을 놓친다. 소년은 그제야 빠르게 움직여 아이의 등에 올라타 단검을 높게 든다.

푸욱!

"꺄아아악! 아파아파아파! 살려줘…!"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와 같은 비명을 지르고 모랫바닥을 박박 긁는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는다.

푸욱! 푸욱!

"끄윽! 아아……!"

어찌나 세게 긁었는지 손톱이 모조리 빠져버린 손을 허공에 뻗으며 부들거리던 아이는 이내 축 늘어지고 만다.

푸욱! 푸욱! 푸욱!

"…."

이미 숨통이 끊어진 아이의 몸을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내리찍던 소년은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진다. 멍해진 정신에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소년은 살아남았다.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그곳으로 가자 소년처럼 몸에 피를 묻힌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기억은 빠르게 지나갔다.

결투에서 살아남은 소년과 아이들은 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되었고.

도착한 깊은 숲속에선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참혹한 삶이 이어졌다.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행해진 고문과도 같은 행위들은 표정이 없던 소년의 얼굴마저 일그러지게 했다.

훈련을 버티지 못한 아이들은 하나둘 낙오되어 죽어갔고 새로운 아이들이 계속해서 마차에 실려 왔다.

"왜, 왜 우리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야?"

이해하지 못한 아이는 죽었다.

이해하려는 아이도 죽었다.

죽어가는 아이들 속에서 일그러졌던 소년의 얼굴은 점차 펴졌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죽음이 소년의 곁을 스쳐 갔다.

적어도 1만은 될 것이었다. 소년을 스쳐 간 죽음의 수는.

청년이 되자 훈련은 끝이 났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검은 복면을 받은 청년은 죽임을 당하는 자가 아닌 죽음을 행하는 자가 되었다. 훈련 대신 사람을 죽이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임무의 난이도는 점차 높아졌고 청년의 실력도 그에 맞춰 나날이 늘어갔다.

청년의 손에는 피가 마르는 날이 없었고 소년을 스쳐 간 죽음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죽음이 청년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불가능하다 여겼던 임무를 청년이 완수해 냈을 때 청년의 앞에 8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축하한다, 나인. 네가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다."

그는 그렇게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가 되었다.

"크…아아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이건 그동안 단편적인 기억들이 흘러들어오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실제로 내가 행한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기억들이 내 기억 속을 헤집고 들어와 자리 잡는다.

기존의 기억과 크나큰 괴리감이 느껴지는 살벌한 기억이 뒤섞이자 두통은 말할 것도 없고 속이 메스꺼워 토가 나올 지경이다.

"커……헉! 허억! 아으으! 젠장할!"

사람을 얼마나 죽인 거야! 이 나인이라는 놈은!

수많은 살인의 기억들 때문에 손발에 경련까지 일고 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부터 표출해온 차가운 광기.

나인은 어쌔신(Asasin), 즉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다.

현재는 중급 용병 로한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지만, 그의 실제 일은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알펜하임 제국의 수도 운다인의 암살자 길드, 통칭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 나인(Nine).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 암살자다.

'전도유망하긴 개뿔!'

살인자가 전도유망이 어딨어!

원한을 많이 산 암살자의 삶은 항상 보복을 각오해야 했다.

이건 전도(??)가 유망(??)한 게 아니라 전도가 다망(??)한 삶이다.

언제 어디서 그 또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나마 다행인 건 그와 관련된 사람은 없었으며 그가 오로지 혼자라는 것.

"후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몸도 마음도 어느새 진정이 되었다. 나 자체는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새로 들어온 기억이 나의 그런 상태를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요지부동(?之?).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이 뇌리에 새겨진다.

'상태창.'

[상태창]

­ 이름 : 나인

­ 등급 : 7

­ 능력치

체력 : 110 근력: 98 민첩 : 150 정신력 : 140 마력: 130

­ 잔여 능력치 : 0

­ 능력 : 검술(3급), 암기술(3급), 권술(5급), 예리한 감각(3급), 고문(3급), 살기(3급), 영월공(3급), 영보(3급), 통각 차단(3급), 명경지수(2급), 정보 분석(5급)

"와아..."

이런 상태창은 처음 본다. 뭐, 이제 고작 4번째이지만.

"능력치는 100이 넘어가고…. 능력은 뭐 이리 많아?"

­ 검술 : 검을 다루는 기술.

­ 암기술 : 암기를 다루는 기술.

­ 권술 : 주먹을 다루는 기술.

­ 예리한 감각 : 극도로 뛰어난 감각이 날카롭고 정확한 판단과 관찰을 돕는다.

­ 고문 : 숨기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어 캐묻는 기술.

­ 살기 : 무언가를 죽이겠다는 기운.

­ 영월공 : 암살자 길드. '그림자 매'에 전해지는 마나 호흡법과 운용법으로 몸을 가볍게 하여 극한의 속도를 추구한다.

­ 영보 : 그림자 같은 발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 통각 차단 : 통증을 차단하여 상처를 입어도 움직임에 제한이 없다.

­ 명경지수 : 밝은 거울과 같이 잡념이 없고 정지한 물처럼 흔들림도 없는 마음가짐.

­ 정보분석 : 정보를 조합하여 분석하는 기술.

이 많은 능력이 수많은 기억과 함께 체화된 상태다. 이전에는 단편적인 기억이 흘러들어와 기본적인 무기술과 마나 운용법만이 몸에 익고 나머지 능력들은 사용하려고 할 때만 기억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두 사용할 수 있겠어.'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흘러들어온 듯한 느낌.

'근데 이거…. 좋기도 하지만…. 위험한데.'

그도 그런 게 사람을 수없이 죽인 기억이 익숙해진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 기억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내게 영향을 끼칠지는 두고 봐야겠지.

'퀘스트.'

[메인 ­ 백작 후계자 호위]

­ 퀘스트 설명 : 그림자 매의 아홉 번째 그림자 나인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임무는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르다. 제르미온 백작가의 후계자를 작위 계승식이 있는 한 달 후까지 호위하는 것.

­ 퀘스트 완료 조건 : 백작 후계자의 작위 계승 완료.

­ 퀘스트 완료 보상 : 출몽, 나인의 소지품 중 택 1.

퀘스트를 확인한 나는 얼이 빠졌다.

'암살자한테 호위…? 그리고 뭐 한 달?'

"미쳤구만."

쾅!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 미친 의뢰를 한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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