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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24화 (24/62)

〈 24화 〉 오크 전사 가리쉬 (3)

* * *

일견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크라는 개체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거대한 신장, 그 거대한 뼈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근육과 혈관들이 꿈틀대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저릿저릿한 손을 들어보자 도끼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마나를 둘러막았음에도 도끼의 옆면 중앙에 금이 가버렸다.

'이거야, 원.'

찰싹!

"취, 취익! 휴마, 낭군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아악! 낭군님 같은 소리하지 마! 얼굴도 못생긴 게!"

찰싹!

"커, 커헉! 어떻게 그런 말을!"

덩치에 맞지 않게 작고 갸름한 얼굴형. 그 안을 오밀조밀하게 채운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띈다. 피부는 녹옥같이 고왔으며 이마는 둥글었고 유려하게 뻗은 눈썹 아래로 길고 커다란 눈 안쪽에는 별빛을 담은 듯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자리했다. 오뚝 선 콧대와 그림같이 이어지는 콧날은 베일 듯 날카로웠고 얇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송곳니마저도 아름답게 벼려져 있었다. 실로 귀공자의 상이었지만….

"내가 본 오크 중에 제일 못생겼어!"

오크의 눈에는 달리 보이는 듯했다.

"취익!"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실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휴마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을 돌연 부라리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 으으…. 아무리 봐도 잘생겼다…! 대체 정체가 뭐냐!"

"내 이름은 가리쉬, 오크 왕국의 전사다."

"오, 오크 왕국? 지역까지 완벽하단 말인가…!"

"오크 왕국의 왕, 칼리쉬 둠스피롯의 명을 받고 하얀 바위산을 통합하기 위해 왔다."

"취익! 와, 왕명까지!"

기세가 한껏 꺾인 녀석이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

"네 이름은 뭐지?"

"나, 나는…. 우락투스 족의 족장 우락투스다!"

"호오…! 멋진 이름이군!"

"저, 정말인가?!"

"전사의 긍지와 투기가 느껴지는 훌륭한 이름이야!"

"오오…! 고맙다! 너처럼 멋있는 오크가 인정해주다니!"

우락투스는 감격하여 두 손을 모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저벅저벅.

"그나저나 족장이라면 부족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지."

"좋다, 멋진 오크와의 결투, 언제나 환영이다!"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이 나타나 준 상황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다. 판은 순식간에 짜였다. 오크들이 휴마와의 결투 때보다 훨씬 넓게 퍼지며 원을 형성했고 우리는 원의 중앙에서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했다. 리오베가 걱정이 되는 듯 자리를 쉽사리 뜨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갈리쉬, 우락투스는 하얀 바위산 제일 오크야! 못생기기도 제일이지만 전투도 제일이야!"

"걱정하지마, 리오베. 물러나 있어."

리오베가 뒤쪽으로 물러남과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가락크 호흡법의 정수를 끌어 올렸다.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우락투스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몸 안에는 패도적인 기운이 들끓었다.

"오오오!"

"취익! 갈리쉬, 커졌다!

"다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더 멀리 벗어나!"

자신과의 결투는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휴마가 열광하는 오크들을 더욱 뒤로 물렸고 나는 이글거리는 안광을 불태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좋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맞붙었다.

콰앙!

귀가 먹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도끼와 도끼가 힘을 겨루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락투스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힘은 강하지만 힘을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 내가 도끼의 끝을 무겁게 해 짓누르자 금세 무릎이 접히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댄다.

"취이이익!"

"…!"

이건 놀라운걸.

순수한 완력만으로 기술의 힘을 밀어냈다. 그것도 모자라 재차 공세를 이어가기까지.

부웅.

자리를 박차며 상단을 베어오는 공격을 피해내고 이어질 충격파에 대비한다.

찌지직! 그그그그극!

고작 충격파만으로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리며 바닥에 있던 나뭇잎과 잔가지들이 허공에 흩날린다. 흩날리는 부산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우락투스의 측면을 베어갔다.

쾅! 피핏! 콰앙! 핏!

서로의 공격이 맞부딪히는 충격파만으로 몸에 생채기가 하나씩 새겨진다. 우락투스는 나와 검을 길게 맞대려 하지 않았다. 내 짓누르는 도끼에 도끼를 맞대는 것이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뭐, 하얀 바위산 제일이라 할만하네.'

수차례의 피 튀기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힘을 실어 우락투스의 몸을 밀어내며 나 또한 뒤로 크게 도약했다.

'이쯤에서 끝내볼까.'

가락크 호흡법의 영향으로 패도적인 기운을 품은 마나가 호흡법의 묘리에 따라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발바닥, 발등, 종아리 무릎까지 도달하고 이어서 허벅지까지 차올랐을 때 이미 부풀어 오를 만큼 부풀어 올랐던 다리 근육이 쩌저적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갈라지며 가공할 힘이 깃들었다. 다리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마나가 불꽃처럼 넘실거렸고 그대로 무릎을 들었다가 바닥을 향해 뻗어냈다.

쿵!

땅과 다리가 만나는 소리는 컸지만, 그동안의 격돌음에 비하면 작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쿠득!

갑작스레 앞의 땅 한 조각이 솟아난다.

"이게 뭐지?"

쿠드드드드드득!

우레와 같은 소리가 땅속에서 울려 퍼지며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우락투스가 땅을 박차려 하는데 일순간 우락투스가 딛고 서 있던 땅이 꺼져버린다.

"취, 취익!"

당황한 우락투스가 주저앉은 땅 사이에 끼인 발을 빼내었을 때 숨을 쉬는 것처럼 이곳저곳 불규칙하게 들썩이던 땅이 이윽고 파도처럼 일어나 우락투스를 덮쳐간다.

콰과과과광!

"우아아아악!"

"취, 취이익!"

"도, 도망가!!"

땅의 파도는 우락투스를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뒤편의 나무들까지 뿌리째 뽑아내며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미처 피하지 못한 휴마족 오크들 몇까지 파도 속에 갇혀버렸다.

파도를 피해 살아남은 오크들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산기슭을 보며 경악했다. 개중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오크도 있었고 심지어 오줌을 지린 오크도 여럿 있었다.

나는 박수를 치며 주변을 환기했다.

짝짝!

"자자, 동지분들. 결투는 끝났으니까 우리 동지들 좀 구해주자고요."

산기슭에 생겨난 작은 언덕에 마나를 퍼뜨리자 꿈틀거리는 생체 반응이 느껴졌다. 흙더미 속에 손을 쑥 집어넣자 곧장 오크 한 마리가 달려 나온다.

"어이차!"

"취, 취익! 콜록콜록!"

"괜찮아?"

"안 괜찮다, 취익! 무, 무섭다! 취익!"

"그래그래, 저기 가서 좀 쉬어."

그리고 연달아 오크 일곱 마리를 더 끄집어내자 비로소 하나의 생체 반응만이 남았다. 언덕의 맨 밑부분에 깔려있는 큼지막한 녀석을 감지하자 한탄이 절로 나왔다.

"아이고, 깊숙이도 파묻혔네."

워낙 튼튼한 녀석이라 압사당하지는 않았을 거 같긴 한데. 아오. 귀찮아. 내가 파묻고 내가 끄집어내고 이게 뭔 일이냐.

언덕 위로 올라가 흙더미를 도끼날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흙먼지에 인상을 찌푸리길 몇 차례 꿈틀거리는 지면이 나타나고 그곳에 손바닥으로 쓸자 녹색의 피부가 드러났다.

"푸확! 취, 취익! 주, 죽는 줄 알았다!"

"고생했어, 얼른 나와."

흙더미와 깨진 바위 조각 사이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킨 우락투스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을 잡고 흙더미 속에서 빠져나왔다. 우락투스는 몸 이곳저곳이 다치긴 했지만 심각한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 우락투스에게 휴마가 다가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상처에 물을 뿌려 씻어낸다.

"괜찮아?"

"취익! 당연히 괜찮다! 나 우락투스 강한 오크다!"

"가리쉬한테 깨진 주제에!"

"그, 그건…! 가리쉬가 엄청 강한 전사기 때문이다! 우락투스, 가리쉬 인정한다!"

찰싹!

"가만히 좀 있어!"

"아악! 아프다! 살살 해라! 휴마!"

찰싹!

"언제는 괜찮다며!"

"아악! 휴마!"

상처에 약을 바르며 콩트를 찍고 있는 둘을 보며 피식 웃고 있을 때 농밀하고 끈적한 기운이 내 등을 감쌌다.

"가리쉬…."

"리, 리오베."

"괜찮아?"

"어, 어. 난 괜찮지."

그녀의 가슴이 내 등에 뭉개지며 퍼져가는 부드러운 살의 촉감이 나를 전율케 했다.

'크흑, 위험하다!'

다행히 리오베는 등에서 가슴을 떼어내고는 내 앞으로 왔다.

"정말 멋졌어! 내가 약 발라줄게."

"어, 어. 고마워!"

아쉬움 반 안도 반의 마음으로 리오베에게 몸을 맡겼다. 내 몸의 상처라고는 얕은 생채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치는 금방 끝났다. 오히려 먼저 약을 바르기 시작한 우락투스가 뒤늦게 조치를 끝냈다.

"자, 그러면 남은 부족들도 만나러 가볼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동하는 시간이 길긴 했지만 남은 10개의 부족을 모두 만나 인사를 나누고 결투를 진행했다. 그래도 그중 하나 정도는 결투를 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들 두려워하면서도 투지를 보이며 덤벼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굳은 투지와는 별개로 실력은 한참 모자랐지만.

'어우, 피곤해.'

하루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몸은 정말 괜찮은데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가리쉬, 우리 이제 왕국으로 가서 짝짓기도 하고 같이 사는 거야?"

"으응, 그럼! 일단 칼리쉬 왕께 보고드리고 나서."

"아아, 꿈만 같아! 가리쉬!"

쪽쪽!

'응, 이거 꿈이야."

리오베의 키스 세례와 팔짱을 낀 팔에 닿는 가슴의 감촉도 피곤함에 한 몫을 더했고. 나는 리오베의 팔짱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짐은 다 쌌지?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이동하도록 할게. 부족장들은 뒤처지는 오크 없나 확인하면서 잘 인솔해주고."

"취익! 알았어!"

"알았다, 갈리쉬!"

'퀘스트.'

[메인 ­ 하얀 바위산 통합]

­퀘스트 설명 : 오크 왕국의 전사, 가리쉬는 오크 왕국의 왕으로부터 인간의 왕국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하얀 바위산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하여 왕국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하얀 바위산으로 향하여 그곳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오크 왕국으로 귀환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 하얀 바위산 오크 부족 통합(12/12). 오크 왕국 복귀(0/1).

­퀘스트 완료 보상 : 출몽, 가리쉬의 소지품 중 택 1.

[서브 ­ 오크 인솔]

­퀘스트 설명 : 통합된 하얀 바위산 오크들을 안전하게 인솔하여 왕국으로 귀환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 오크 이탈 10 미만(0)

­퀘스트 완료 보상 : 몽환석 조각.

하얀 바위산의 오크 부족을 통합하고 나자 서브 퀘스트가 생겨났다. 목적은 이탈하는 오크가 10명 미만이게끔 하여 왕국까지 도달하는 것.

그리고 꿈속에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벌써 꿈속에 들어온 지 24시간이 넘게 지났다. 지금 현실의 몸은 똥오줌을 지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걱정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음에도 강행군을 펼쳤다. 오크는 밤눈도 밝았기 때문에 이동하는 데 별문제도 없었고.

다만 생각처럼 강행군을 계속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늙은 오크들과 어린 오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동하는 속도도 느렸을뿐더러 결국 이동하는 중간중간 쉴 수밖에 없었다.

"에라이, 나도 자야겠다."

하루아침에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도 간이 침소를 만들어 잠을 청했다.

"취익…. 갈리쉬…."

옆에는 리오베도 함께였는데 피곤했는지 벌써 잠에 들어 잠꼬대를 해댔다.

"하암…."

'여기서 잠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지만, 꿈속에서의 잠 역시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나무에 짓눌리는 꿈에 일어나 보니 리오베의 다리가 내 복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다리를 치우고 눈을 좀 더 붙이니 날이 밝았다.

그렇게 사흘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했지만 600마리가 넘는 오크 집단에 다가올 만큼 간 큰 녀석은 없었던 모양이다.

"취익…! 드디어…!"

"왕국이다! 왕국!"

"엄청 커!"

어째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리오베와 하얀 바위산 오크들을 보며 나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돌아간다.'

4일 동안 숲에서 지내다 보니 현대의 문명이 너무도 그리웠다. 스마트폰 없는 삶이 이리도 지겨울 줄이야! 깨끗한 물로 씻는 샤워와 맛있는 음식들도 모두 그리웠다.

그렇게 그리운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거대한 성벽의 성문을 지나 왕성 내부로 진입하자 왕궁의 시종장인 비오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왔다.

"취익, 왕명을 훌륭히 완수하셨군요. 전사 가리쉬."

"당연한 일이오. 비오트."

"하하, 실례했습니다. 이건 왕께서 내린 선물입니다."

"이건…?"

"오거환입니다."

비오트가 내민 작은 상자를 받아 열어보자 지름 3센치 가량의 구가 들어있었다. 내가 상자 속의 구를 보고 비오트를 다시 바라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오우거의 힘을 가지게 해준다는 영약입니다. 가리쉬에겐 필요 없을지도…."

"아니, 고맙소!"

안 그래도 이놈의 오크는 가진 게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잽싸게 바지 주머니에 상자를 집어넣자 퀘스트의 끝을 알리는 창이 떠올랐다.

[메인 ­ 하얀 바위산 통합을 완료했습니다.]

[서브 ­ 오크 인솔을 완료했습니다.]

창을 바라보고 서 있자 비오트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이 하얀 바위산의 오크들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인도했다.

"가리쉬, 우리도 빨리 가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당기는 리오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난 4일동안 나름 정이 들었던 건지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손을 뻗어 리오베의 얼굴을 잡고 볼을 이리저리 늘린다.

"우, 우웃, 왜 이래!"

당황하는 리오베를 마음껏 괴롭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오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취, 취익…!"

'고마웠어, 리오베. 출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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