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23화 (23/62)

〈 23화 〉 오크 전사 가리쉬 (2)

* * *

"저기…. 괜찮으면 나랑 짝짓기하는 게 어때?"

잠깐의 고민을 했다. 눈앞의 여오크는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상당한 미인. 그러나 녹색의 피부를 가진 몬스터였다. 물론 나 또한 몬스터지만 속은 인간이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오크가 돌연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왕국의 오크도 얼굴 보는구나."

"뭐, 뭣?"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말을 더듬는다. 여오크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내가 못생겨서 그런 거지? 너는 왕국의 오크인 데다 잘생겨서 좋겠다. 나는…그래도…취익…!"

그리고 움츠러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은 착하단 말이야! 흐아앙!"

나는 몸을 움츠리는 바람에 한껏 모아진 그녀의 마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확실히 마음이 착하긴 하네!'

"알지, 알지."

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토닥이자 여오크는 눈물이 맺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히끅! 정말?"

"그럼 정말이지."

나는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래서 나한테 물도 줬잖아.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할게. 고마워."

"취익…. 그럼 우리 짝짓기하는 거야?"

내 가슴팍을 쓸어내려오는 여오크의 은밀한 손길이 그곳까지 이어지기 전에 자연스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눈을 맞췄다.

"그 전에 이름을 물어도 될까?"

"리, 리오베. 휴마 부족의 리오베야."

"리오베. 내 이름은 가리쉬야."

"취익…. 가리쉬…. 멋진 이름이다."

"네 이름 역시 이쁘네. 너와 참 잘 어울려."

"그, 그럼 이제…!"

"췻!"

리오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다. 어리둥절해 하는 리오베를 향해 짐짓 기밀을 전하는 것처럼 주변을 한 번 살펴주고 목소리를 낮게 깐 채 말했다.

"리오베. 지금부터 말하는 건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다. 알았으면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리오베가 얼굴을 녹빛으로 물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오크 왕국의 전사, 가리쉬. 왕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지. 지금 왕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해 하얀 바위산의 오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왕의 명이야."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머나먼 곳을 노려보듯 눈을 부릅떴다.

"취익…. 나는 왕의 명을 받은 왕국의 전사로서 하나의 관습을 이행해야 해. 그 관습이 뭔지 알아?"

도리도리.

"취익…. 그것은 바로 명을 이행하는 동안 짝짓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취익…!!"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듯 눈은 충혈되고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단,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 우리가 함께 왕국에 귀환하였을 때 너와 짝짓기를 할 뿐만 아니라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겠어."

"취익…!!! 정말?!"

끄덕.

리오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내 몸을 끌어안았다.

'오우야…!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상체의 맨살을 통해 여실히 느껴져 마음속으로 한글을 외웠다.

불경을 몰라서 한 거지만 효능은 비슷했다.

"취익! 그럼 정말이지!"

리오베의 어깨를 잡고 몸을 떼어내며 거친 숨소리와 함께 대답하자 그녀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았다.

"아잇…! 정말!"

"단, 그때까지 내 임무를 도와줬으면 해."

"맡겨만 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보이는 리오베의 머리를 쓰다듬자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취익! 그럼 가볼까?"

'길잡이 획득!'

#

리오베의 부족인 휴마 부족은 하얀 바위산의 초입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취익…. 자, 잘생겼다."

"취익! 리오베! 저 오크는 누구야?"

"취익! 왕국에서 온 전사 가리쉬야! 내 오크니까 눈독 들이지 마!"

"뭐? 너처럼 못생긴 오크가 저런 잘생긴 오크를 만난단 말이야?"

리오베의 경우가 특이한 경우였던 듯 마을의 여자 오크들은 남자 오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굵직한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리오베의 말이 사실이야? 가리쉬?"

"넌 누구지?"

그중 가장 강하게 생긴 녀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다른 남자 오크보다도 더욱 크고 강해 보이는 여오크였다.

"난 휴마 부족의 부족장이자, 하얀 바위산의 제일 미녀 휴마라고 해."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아니, 저 우락부락한 놈,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저 자식이 제일가는 미녀란 말이야? 주변의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로 보아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오크의 미적 감각이 인간과 심히 다르다는 걸 깨닫고 벙쪄 있자 휴마가 나를 유혹하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 마, 제발! 전혀 유혹되지 않아!'

"후후, 내 미모에 놀랄 만도 하지. 어때? 나랑 짝짓기하지 않겠어? 너 정도의 오크라면 받아주겠어."

'받아주긴 뭘 받아줘.'

이놈의 오크들은 새로운 오크를 만나면 다짜고짜 짝짓기부터 하자고 하네.

"아니, 나는 이미 예정된 오크가 있다."

나는 내 전용 길잡이, 리오베의 어깨를 끌어당기자 그녀가 얼굴을 *놁히며 내 이름을 부른다. (*놁히다는 표현은 인간으로 치면 붉히다와 같다.)

"가, 가리쉬…!"

"취, 취익! 리, 리오베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너, 너어…! 리오베…!"

경악하는 주변의 오크들과 리오베를 가리키며 손을 부들부들 떠는 휴마를 보며 다시 한번 공언했다.

"휴마 부족의 오크, 리오베는 나 왕국의 전사 가리쉬의 오크다!"

"취익! 말도 안 돼!"

"저런 추녀가!"

"어떻게 저런 미남 오크를 꼬신 거지?"

근데 듣다 보니 궁금했다. 이 얼굴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보는 오크마다 극찬을 하는 거야? 심지어 남자 오크들마저 얼굴을 놁힐 정도였다. 궁금하긴 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넘어가고 도낏자루를 들어 땅을 찍었다.

쿵.

"취익, 나 왕국의 전사 가리쉬는 왕 칼리쉬 둠스피롯의 명에 따라 하얀 바위산의 통합하고 왕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휴마 부족의 족장 휴마여. 결투를 하겠는가?"

"카, 칼리쉬 둠스피롯!"

"취익! 파, 파멸의 혼, 칼리쉬!"

"취, 취이익!"

왕의 이름을 언급하자 주변의 오크들이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의 위명이 상당하구나?'

단, 부족장인 휴마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올곧이 서 있었다.

"나 휴마 부족의 부족장, 휴마. 나 또한 오크의 전사로서 그대의 결투에 응하겠다."

"좋은 투지군."

아아, 왕의 이름을 들먹여 날로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그렇게는 안 되었다.

'뭐, 쉬운 길은 재미가 없지.'

"취익, 결투를 하기 전에 먼 길을 온 오크에게 음식부터 대접하겠다."

"식사?"

"그렇다, 그게 예의다. 그리고 배고파서 졌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그러고 보니 밤새 뛰어서 그런지 상당히 배가 고프긴 했다.

"하하, 그럼 고맙게 먹도록 하지."

"다들 어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오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휴마 족은 신기하게도 부락 한 곳의 나무로 지어진 닭장과 우리에서 닭과 멧돼지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달걀과 닭, 그리고 멧돼지를 잡아 와 즉석에서 손질을 시작했다.

"취익…."

'생각보다 체계적인데?'

부락 중앙의 돌이 둘러진 터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가마솥 뚜껑처럼 둥글고 널찍한 쇠판을 얹는다. 쇠판 위에 수십 개나 가져온 계란으로 계란후라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동안에 멧돼지와 닭의 뼈와 살을 분리해낸다. 요리를 하지 않는 오크들은 저마다 돌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접시를 들고 기다렸다가 배식을 받았다.

나 또한 리오베에게 받은 돌 접시에 계란후라이를 배식받아 먹었는데 한입에 끝이 났다.

'이거…. 키우는 가축들로는 음식이 턱없이 부족하겠는데?'

"리오베. 식사는 항상 키운 가축들로 하는 거야?"

"아니, 계란을 제외하고는 겨울을 대비해서 먹지 않아. 보통은 그날그날 사냥을 해서 먹어.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렇게 먹는 거야."

"아…."

"저기저기, 가리쉬!"

리오베와 얘기하고 있는데 웬 꼬마 오크가 말을 걸어왔다.

"넌 누구니?"

"나는 아우크야!"

"그래, 무슨 일이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그래, 물어보렴."

"취익! 오크 왕국은 어떤 곳이야?"

아우크의 질문에 부락의 어린 오크들, 아니 성체 오크들까지 몰려들어 내게 이목을 집중했다. 대충 설명하려 했는데 안 되겠군.

"음…. 오크 왕국은 숫자로 치면 부족이 수만 개는 모여있는 곳이야."

"수만 개가 뭐야?"

'수만 개가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처음부터 가로막히는 대화에 숨이 턱 막혀 온다.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물었다.

"아우크. 하얀 바위산부터 저어기 보이는 저 산까지 얼마나 많은 동물과 오크, 몬스터들이 살까?"

"어…. 엄청 많이?"

"그 엄청 많은 수만큼의 오크들이 왕국에서 살고 있어."

"우와아아! 정말?"

아우크 뿐만 아니라 주변의 오크들도 놀라며 서로 이야기한다.

"그래, 그리고 왕국의 오크들은 돌로 지어진 집에서 살고 사냥도 하지 않아도 돼."

"응? 사냥을 안 하면 식사는 어떻게 해?"

"왕국에서는 여기처럼 가축도 키우지만, 농사도 지어."

"농사?"

"응, 먹을 수 있는 곡식이나, 채소, 열매가 열리는 나무 같은 걸 키우는 거야."

"그럼 사냥을 안 해도 돼?"

"응, 대신에 다른 일을 해야 해."

"일이 뭐야?"

"농사를 돕거나 가축을 돌보는 걸 돕거나 하는 것들."

"아아…."

"일을 하면 위험하게 사냥을 하지 않아도 돼."

"취익! 정말 멋지다. 그럼 우리 다 같이 왕국으로 가는 거야?"

"응,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고기가 다 구워졌다. 닭과 멧돼지의 구이, 그리고 익힌 채소 따위를 함께 배식받아 먹고 부락을 나섰다.

휴마 족의 오크는 단 한 오크도 남기지 않고 나와 휴마의 결투를 보기 위해 나왔다.

"선공은 양보하지."

"취익, 왕국의 오크라고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결투는 비교적 나무가 적은 평평한 지형을 골라 이루어졌다.

"그럴 리가."

"그럼 먼저 가지! 취익!"

휴마가 땅을 박차며 대검을 휘둘러왔다. 나는 검의 궤적을 따라 도끼를 이어붙였다. 검날과 도끼날을 감싸고 있는 마나가 맞붙은 채 서로의 힘을 겨루다 순식간에 마나가 상쇄되어 버린 검이 튕겨 나간다.

"취익, 역시…엄청난 힘…!"

나는 한 손으로 도끼를 든 채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다시 한번 휴마가 공격을 해오지만, 상대가 되질 않았다. 힘도 속도도 마력도 기술도 모든 게 내가 한 수 아니, 몇 수는 앞섰다. 처음 무기를 맞대는 순간 깨달았고 그렇기에 이건 사실상 결투라기보다는 대련에 가까운 형태로 변질되었다.

마력과 힘, 속도까지 조절하여 휴마의 수준에 맞추어주고 오로지 기술로만 상대하기 시작했다.

챙!

다시 한번 검과 도끼가 붙었지만 검은 도끼에 순식간에 눌려버린다. 내가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기술의 문제였고 무기에 대한 이해력의 문제였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가리쉬의 경험은 비록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무기와 기술에 대한 이해도를 끌어올렸고 그 수준은 상당했다. 가리쉬의 기억은 전투에 편향되어 있었기에 단순했지만, 그 기억의 질은 랑스, 육준오와의 기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휴마. 검 끝을 무겁게 써라. 너는 힘에 비해 검 끝이 너무 가벼워."

"취익, 그게 무슨 말이지?"

"말로 해서 모르겠다면 몸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다시 와라!"

수십 수백 차례의 격돌을 하였지만 휴마는 한 번도 내 도끼를 밀어내지 못하였다. 다만 어렴풋이 검 끝을 무겁게 쓰는 방법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지쳐버린 휴마를 보며 더 진행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쾅.

"취, 취익!"

"피, 피해!"

높게 떠오른 검이 허공을 회전하며 구경하던 오크들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도끼날을 휴마의 목에 겨누자 휴마가 숨을 몰아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취익, 취익…! 내가 졌다…!"

"그래, 수고했…!"

콰과과과광!!

갑자기 쏘아진 포탄 같은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내었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몸이 거세게 튕겨 나갔다. 나무 몇 개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멈추어진 몸을 일으키자 웬 오우거 같은 녀석이 휴마를 감싸 안고 있었다.

"취익!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나의…! 나만의 휴마를…!"

찰싹!

"취익! 미친놈아, 누구 맘대로 너만의 휴마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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