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오크 전사 가리쉬 (1)
* * *
취익. 취이익.
'시작부터 오크냐!'
나는 재빠르게 몸을 굴렀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 마나를 퍼뜨렸다. 효율은 좋지 않지만, 단기간에 빠르게 주변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만 한 게 없었다.
취익.취익.
"으응?"
마나에 걸리는 건 없는데 뭐지?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오크의 숨소리….
슬쩍 손을 들어보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직한 녹색의 손이 나를 반긴다.
"자, 잠깐만! 노, 녹색?!"
왜 손이 녹색인 거지?!
무척이나 굵고 큼지막한 손. 발 또한 마찬가지로 투박하지만 강인해 보였고 느껴지는 힘 역시 강대했다.
몸을 완전히 곧추세우자 여느 때보다 확연히 높아진 시야가 느껴진다. 황급히 얼굴을 더듬자 굵직한 얼굴 뼈와 입을 비집고 나온 기다란 송곳니가 만져졌다.
'사, 상태창.'
[상태창]
이름 : 가리쉬
등급 : 4
능력치
체력 : 85 근력: 90 민첩 : 70 정신력 : 35 마력: 70
잔여 능력치 : 0
능력 : 가락크 도끼술(5급), 가락크 호흡법(5급), 추적(6급), 공포 저항(7급)
가락크 도끼술 : 오크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4대 무기술. 가락크, 나락크, 다락크, 라락크 중의 하나로 그 중 가락크는 강인한 힘을 토대로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무기술이다.
가락크 호흡법 : 오크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4대 호흡법. 가락크, 나락크, 다락크, 라락크 중의 하나로 그 중 가락크는 육체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호흡법이다.
추적 : 자취를 쫓는 능력이다.
공포 저항 : 공포를 견디는 능력이다.
'내가 오크라니.'
상태창을 보고 나서야 체념했다. 어차피 이 또한 꿈일 뿐이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작게 읊조렸다.
"퀘스트."
[꿈속의 퀘스트가 활성화됩니다.]
[출몽(出夢) 조건이 활성화됩니다. 퀘스트 완료, 또는 사망.]
[메인 하얀 바위산 통합]
퀘스트 설명 : 오크 왕국의 전사, 가리쉬는 오크 왕국의 왕으로부터 인간의 왕국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하얀 바위산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하여 왕국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하얀 바위산으로 향하여 그곳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오크 왕국으로 귀환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 하얀 바위산 오크 부족 통합(0/12). 오크 왕국 복귀(0/1).
퀘스트 완료 보상 : 출몽, 가리쉬의 소지품 중 택 1.
다행히도 퀘스트의 내용이 인간을 죽이거나 헤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취이이, 이거 숨소리가 너무 낯선데?"
튀어나온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때마침 기억의 파노라마가 몰려왔다.
"취, 취익!…으잉?"
두통이 몰려올까 봐 지레 겁먹었지만, 생각처럼 두통이 몰려오는 일은 없었다.
"먹고, 싸우고, 싸고, 자고, 먹고, 싸우고, 싸고, 자고?"
간간이 왕국에서 훈련 같은 걸 받은 기억도 있지만 아주 극소한 일부분일 뿐 생활 패턴이 정말 단순했다. 가리쉬의 오크 생은 오로지 전투에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고 단 하나의 오크만을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따랐다.
오크 왕국의 왕이자, 오크 로드라 불리는 칼리쉬 둠스피롯. 그의 명에 따라 흩어진 동족들을 규합하고 닥쳐올 거대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 것이다.
"흠…. 하얀 바위산이라…. 아무래도 저걸 말하는 거겠지?"
눈앞에 딱 봐도 하얀 바위산이라는 이름과 정확히 조화를 이루는 산이 보였다. 길게 늘어진 산등성이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가 하얀 바위와 눈 따위로 덮여있는 높다란 산은 제법 멀어 보였다.
"아니, 제법 먼 정도가 아니잖아?"
산속의 해가 빨리 진다지만 해가 지고 밤이 되었는데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거리가 좁혀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너무 느긋이 걸었나?'
산기슭을 혼자 거닐다 보니 조심성이 많아져 속도가 지체된 듯싶다. 게다가 힘이 든 것은 아니지만 육중한 체구를 이끌고 가느라 금세 허기가 졌다. 배가 고픈지는 좀 되었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킁킁."
오크의 후각은 실로 예민해서 걸어오는 동안에도 산짐승들의 냄새를 몇몇 맡았지만 귀찮아서 잡지 않았었고 지나가는 동안 나무에 맺힌 열매를 몇 개 따 먹었지만, 열매로는 허기가 충족되지 않았다. 이제는 사냥을 나서야 할 때다.
'이 노린내는 멧돼지인가?'
곧장 느껴지는 냄새를 따라 뛰었다. 냄새의 근원지를 쫓아가자 멧돼지의 족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족적과 냄새를 쫓아 가다 보니 산짐승들이 지나는 숲길이 보였고 뒤섞인 여러 냄새 중 멧돼지의 것을 계속해서 쫓았다.
"꾸익!컹, 쩝쩝."
'옳거니! 찾았다!'
멧돼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암수 한 쌍과 아기 돼지 두 마리가 보였다. 멧돼지 가족은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열심히 주워 먹고 있었다.
'흠…. 너로 정했다.'
살이 토실토실 오른 엄마 돼지를 먹기로 했다. 엄마 돼지라고 하니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암퇘지라고 해야겠다. 호칭이야 어찌 됐건 나의 냄새가 바람에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자리를 잡고 숨을 죽여 멧돼지 가족의 마지막 만찬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가족들과 밥 한 끼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배려였다.
쿵. 쿵.
"꾸익, 꾸이익!"
하지만 그런 내 배려가 무색하게도 방해꾼이 등장했다. 땅이 흔들리는 묵직한 발소리에 멧돼지 일가족이 혼비백산하여 수풀로 뛰어들었다.
"취이익…. 어떤 자식이 내 식사를 방해하는 거냐…."
몸이 부르르 떨리며 극도의 분노가 차오른다. 맥박이 급속도로 상승하며 혈액이 거칠게 뻗어 나가 몸 안의 혈관이 확장되고 그와 동시에 온몸의 근육과 힘줄이 팽팽히 수축한다.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풀며 등허리에 메인 거대한 양날 도끼를 뽑아 들었다.
쿠당탕탕!
거칠게 휘둘러진 도끼날에 전방 20여 미터가 초토화된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분노로 잠식되어 버린 머리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본능에 이끌리듯 몸은 발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하였고 발소리의 주인 역시 소리를 들은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쿠워어어!"
이 근방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듯 두려움을 모르고 턱을 높이 치켜든 채 고함을 내지르는 오우거의 모습이 보인다.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목선이 훤히 드러난 꼬락서니를 보니 분노와 투지가 사그라들었다. 단숨에 목을 베려던 것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어깨를 베었다.
"꾸어어어어억!"
얼핏 보면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졌을 뿐인 동작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오우거의 어깨를 베고도 모자라 뒤편의 나무와 무성하게 자란 풀 무더기까지 베어버린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듣기 싫은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려는 오우거의 반대쪽 팔마저 베어내고 녀석의 종아리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쿵.
"쿠웍!"
그리고 도끼를 다시 등에 멘 채 오우거의 상체에 올라탔다.
"왜!"
찰싹!
"퀙!"
"걸어 다니고!"
찰싹!
"쿠억!"
"지랄이야!"
찰싹!
"깩!"
"지랄이!"
찰싹!
"..."
"응…? 야…."
찰싹. 찰싹.
"…벌써 죽었냐?"
여기 오우거는 맷집이 낮구나. 뺨 몇 대 때렸다고 혓바닥을 내밀고 축 늘어져 버린 오우거를 보자 김이 확 새버렸다.
"취이익…."
혹시 먹을 수 있을까 싶어 오우거의 사체를 바라보자 침이 꼴깍 삼켜지며 군침이 돌았다.
'와, 이 자식은 오우거도 먹는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돌렸다. 몸의 생체 반응과는 반대로 심리적인 측면에서 역했다.
'아무리 지금 몸이 오크라지만 저런 걸 먹을 수는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멧돼지의 냄새를 다시 추적했다.
"우리 꾸익이들 어디 갔니?"
멧돼지들이 먹다 만 열매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을 지나 20분 정도 걷자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지어진 멧돼지 보금자리가 보였다. 보금자리는 비어있었다. 냄새를 쫓아 10분쯤 더 걷자 두 번째 보금자리가 나타났다.
주르륵.
입에서 흐르는 침을 닦아내고 두 번째 보금자리에 몸을 뉘고 있는 멧돼지 가족들을 바라봤다. 누워있는 부모 돼지와 서로 서열 싸움을 하는 듯 몸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힘을 겨루는 새끼 멧돼지 두 마리. 본래 멧돼지는 다산성이라 새끼가 많다고 알고 있는데 두 마리만 남은 것을 보니 이곳의 환경이 녹록지는 않은 듯했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 암퇘지의 목덜미를 잡았다.
"꾸이이익!"
목덜미가 잡힌 암퇘지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발버둥 쳤고 화들짝 놀란 수퇘지와 새끼 돼지들이 보금자리를 박차고 물러났다. 나는 혹여나 수퇘지와 새끼돼지들이 달려들기 전에 자리를 떴다.
"꾸익, 꾸익, 꾸이익!"
"꾸, 꾸익!"
멀어져가는 애달픈 돼지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앉았다. 아직까지도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는 암퇘지의 목에 도끼날을 박아넣자 그제야 얌전해진다. 목과 다리, 꼬리는 먹을 생각이 없어 대충 잘라내어 숲에 던져놓고 남은 몸통에서 장기를 제거하고 근처의 나무에 매달아 피를 빼냈다.
피가 빠지는 동안 근처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 잡초 등을 모아왔다. 적당한 나뭇가지 두 개를 집어 빠르게 문대자 마찰열에 의해 금세 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 큼직한 나뭇잎 몇 개를 따서 내려왔다. 도끼날을 닦기 위해서였는데 수통의 물을 도끼날에 뿌리고 나뭇잎으로 쓱쓱 닦아내었다. 그리고 불길 속에 도끼를 집어넣는 것으로 소독을 완료하고 묶어놓은 멧돼지 몸뚱어리를 손으로 쭉쭉 짜냈다. 젖은 수건을 짜내듯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마지막으로 생나무를 꺾어 만든 지지대를 불길 옆에 설치하고 날카롭게 벼려낸 나무 꼬챙이에 멧돼지를 꽂아 그 위에 올리자 요리가 완성되었다.
"이름하야 수제 통돼지 바베큐!"
다만 이 요리에는 문제가 있었다. 수제인 만큼 꼬챙이를 계속 돌려줘야 했다.
"아니지, 아니지! 밑이 익으면 먹고 또 올려놓으면 되잖아?"
'천잰데?'
홀로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고기 냄새를 맡은 야수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크르릉!"
"아우우우우!"
울음소리로 보아 늑대인 게 분명했고 열댓 마리의 늑대가 어둠 속에서 샛노란 안광을 빛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고기가 익어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멧돼지의 복부와 갈비 부분의 살점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며 기름을 쉴새 없이 불길 사이로 떨어뜨렸다.
"취이익…. 맛있겠다."
바스락.
"더 다가오면 죽는다."
나는 나뭇잎을 밟으며 조금 더 접근해온 늑대 무리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개 중 한 녀석은 멧돼지의 머리를 물고 있었는데 그걸로는 만족을 못 하는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익어가는 멧돼지 고기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물은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바스락.
기어코 내가 정해놓은 선을 넘었다. 모든 늑대가 내 반경 안에 들어왔을 때 재빨리 도끼를 집어 들고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내 주변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적막은 몹시 짧았다. 곧 이어진 소란에 비하면 찰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쿵쿵쿵쿵쿵.
반경 십여 미터의 나무가 연달아 쓰러지고 토막 난 늑대의 육체가 피 분수를 뿜어내며 허물어 내렸다. 나는 주변의 상황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고기 앞을 지켰다.
"에잇, 먼지…!"
다만 흩날리는 먼지 바람에 손을 빠르게 휘저을 뿐이었다. 다행히 늑대 무리 이후로 내 식사를 방해하는 녀석들은 없었고 느긋하게 멧돼지 한 마리를 먹어치운 뒤 걸음을 재촉했다.
오크의 눈은 밤이라 하여 어두워지는 법이 없었고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흘러드는 달빛과 별빛을 증폭시켜 낮과 다름없는 시야를 보여주었다.
'마력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하긴 하네.'
밤은 주로 야생의 사냥꾼들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무력을 가늠해보니 여태껏 조심스레 움직인 것은 괜한 기우였다. 오우거조차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만 한 능력으로 슬금슬금 걸어 다닌다는 건 실로 비효율적.
물론 숲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무저갱과도 같았으니 예상 못 한 변수의 등장에 당혹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
그 변수 하나 때문에 죽을지도 몰랐다.
'근데 그게 뭐?'
나는 내 몸을 둘러보았다. 근육질의 거대한 몸. 전신에 힘이 넘치고 마력 또한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러나 그 위에 걸치고 있는 건 해골 모양이 양각된 벨트 하나와 그 벨트에 고정된 수통 하나. 그리고 조잡해 보이는 가죽 바지와 장화, 손등 위로 팔을 보호하는 건틀릿과 벨트와 마찬가지로 실용성 없이 멋에만 한껏 치중된 해골 모양의 견갑과 거대한 양날 도끼가 다였다.
뭐,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값어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굳이 심력을 소모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죽으면 죽지, 뭐.'
그렇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나는 하얀 바위산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취익! 이 맛이지!"
달빛이 내리쬐는 숲속을 뛰어다니며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자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씻겨나가는 것처럼 상쾌해졌다.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해가 지기 전 걸어 다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바위산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침 동이 틀 무렵에 하얀 바위산의 초입에 들 수 있었다.
"취익…. 취익…. 힘들긴 하네…."
산은 여느 산의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산보다 끝이 높아 정상이 구름과 눈으로 덮여있을 뿐이었다. 근처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수통을 열었다.
똑, 똑.
"츄릅! 에이, 다 먹었네."
한두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비어버린 수통을 다시 허리춤에 차며 아쉬워하고 있을 때 수풀을 헤치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이미 그 정체는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알아차렸다.
"취익, 이 물 마실래?"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오크였다. 오크 특유의 숨소리와 함께 나무로 만들어진 수통을 내미는 오크의 모습은 꽤 신선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와 오뚝하게 솟은 버선 같은 코, 입술을 비집고 나왔지만 내 것보다는 훨씬 작아 보이는 송곳니와 머리카락을 비집고 나온 기다란 귀. 탄탄한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을 덮고 있는 뭔지 모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가슴 가리개 밑으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와 탐스러운 골반. 그리고 그 아래로 쫙 빠진 다리까지.
'여자 오크는…. 원래 이렇게 다른거야?'
남자 오크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 정도면 인간으로 쳐도 상당한 미인….
"저, 저기 너무 빤히 보지 말아줄래?"
두 뺨을 진한 녹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배배 꼬는 여오크를 보며 실례를 깨닫고 수통을 받아들었다.
"고, 고마워. 잘 마실게."
"아, 아냐."
꿀꺽꿀꺽.
시원한 물이 목 안을 적시자 청량감과 함께 갈증이 해소되었다. 여오크가 건네준 수통은 금세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미안. 다 마셔버렸네."
"괜찮아. 그나저나 이 근방에서 못 보던 오크인데 어디에서 온 거야?"
"나는 오크 왕국에서 왔어."
"아앗! 정말?"
여오크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게 놀랄 일이야?"
"그럼! 나 왕국에서 온 오크는 처음 봐!"
"그랬구나."
여오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한번 얼굴을 진한 녹빛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이거 예감이 불길한데….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저기…. 괜찮으면 나랑 짝짓기하는 게 어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