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다시 꿈속으로
* * *
멍
천재지변에 가까운 괴력을 겪고 나니 정신이 멍해진다.
"허, 허허…."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장막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1등급 시험의 방으로 갔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곧장 개인 전투 시험에 돌입하자 안에 있는 건 트롤이었다. 트롤은 2등급의 몬스터로 재생 능력이 뛰어나고 괴력 또한 갖추었지만 멍청했다.
"쿠웍, 쿠웍!"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달려드는 트롤의 양팔을 자르고 목을 베었다.
"끅!끽!"
"으잉?"
목이 잘려도 꿈틀거리는 몸을 보자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양팔과 목이 절단된 부위에선 피가 새어 나오질 않았고 기포처럼 세포가 꿈틀거리고 있다.
'저 상태로 두면 어떻게 되는 거지?'
궁금하긴 하지만 귀찮았다. 심장에 검을 박아넣고 마나를 방출하자 그제야 생명 활동이 정지하고 움직임이 멎는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업이 지급됩니다.]
그다음은 1등급의 '집단 전투', 2등급 몬스터 한 마리와 1등급 몬스터 20마리가 적으로 나타났고 아군으로 1등급의 인간 10명이 나왔다. 그 후로 이어진 건 말 그대로 집단 간의 전투. 승리 조건은 적 몬스터의 괴멸이었기에 내가 곧장 2등급 몬스터의 목을 베어내자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보상으로 1000업이 지급됩니다.]
다음은 '암살'이었다. 배경은 밤의 숲속이었고 고블린 부락 내에 잠들어있는 홉 고블린을 처치하는 것이었다. 그냥 고블린이고 뭐고 무시하고 달려들어가 죽이니까 끝이 났다.
[보상으로 1000업이 지급됩니다.]
호위 시험에서는 물품을 호송하는 마차를 호위하였는데 마차를 모는 마부와 상인, 그리고 물품까지 보호하는 것이 목표였다. 2등급의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1등급의 몬스터가 때때로 등장해 공격해왔다. 처음에는 마부와 상인을 마차 안으로 옮기고 몬스터들을 처치하였고 그다음부터는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파악해 처리했다. 시험을 진행한 지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통과했다는 메세지 창이 떠올랐다.
[보상으로 1000업이 지급됩니다.]
전투 탭의 마지막 관문은 '구출'이었다. '암살' 관문과 비슷했는데 2등급의 몬스터와 1등급의 몬스터가 함께 있는 부락에서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30분의 제한 시간이 있었고, 구출해야 할 사람은 부락 한가운데의 나무 기둥에 묶여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쉿!"
높게 뛰어올라 가장 가까운 움막의 위에 착지한 다음 줄을 검으로 베어내고 포로를 업고 일정 지역까지 뛰어가자 시험이 끝이 났다.
[보상으로 1000업이 지급됩니다.]
"휘유, 보상이 쏠쏠한데?"
1등급 시험 다섯 개를 통과함으로써 4500의 업이 추가로 쌓였다. 상점창에 쌓여있는 8953의 업을 보며 장막 근처의 세계수 뿌리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상점에서 오렌지 주스 하나를 3업으로 구매해 마시며 새롭게 갱신된 상점을 둘러본다.
'오, 이제 제법 괜찮은 게 많은걸?'
[미스릴 방패]
등급 : 7
설명 : 통짜 미스릴을 제련하여 만든 방패. 미스릴을 제련하여 만든 만큼 가벼운 무게와 금강석을 넘어서는 뛰어난 강도, 특출난 마나 전도성이 특징이다.
[미스릴 장검]
등급 : 7
설명 : 통짜 미스릴을 제련하여 만든 장검. 미스릴을 제련하여 만든 만큼 가벼운 무게와 금강석을 넘어서는 뛰어난 강도, 특출난 마나 전도성이 특징이다.
'근데 가격이….'
방패가 12만, 장검이 10만 업이었다. 방어구 같은 경우에도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부위별로 10만은 되었다. 갑옷 같은 경우는 20만에 달했고.
그나마 미스릴이 아닌 것들은 그보다는 저렴했다.
[날카로운 장검]
등급 : 7
설명 : 보통의 장검에 샤프니스 마법을 인챈트하여 그 예기를 더했다. 검에 걸린 마법은 마석의 마나가 모두 소모되면 풀렸다가 충전되면 다시 발동한다.
마법이 걸린 장검이 5만 골드로, 미스릴 장검의 2분의 1 가격이었다.
[추천 물품]
'추천 물품?'
날카로운 장검의 옆에 하나의 글귀가 떠올라 바라보자 푸른색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 하나가 떠올랐다.
[마법 장검 검집]
등급 : 7
설명 : 마나 응집을 유도하여 마법 장검의 소모된 마나를 빠르게 충전시켜주는 검집.
'7만 업?!'
"허, 참…."
7등급의 장비가 파는 것은 좋은데 아직은 살만큼의 업이 모이질 않았다. 일단 업을 좀 더 모아야겠네.
마침 주스를 다 마셨기에 상점은 그 정도만 둘러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등급 시험의 방에 들어가 전투와 관련된 등급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그 중 '호위'의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한 느낌을 받았는데 2등급의 몬스터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면서 싸우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시험은 과감히 포기했다. 괜히 업만 소모할 것 같았으므로.
그렇게 2등급의 전투 시험까지 모두 마치자 16150업이 되었고 배도 고프고 조금 피곤해진 터라 집으로 향했다.
"아, 배고파…. 뭐 먹지?"
배달 어플을 실행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자 그새 쌓인 카톡이 눈에 띄었다.
단톡방
류문상 반장님 : 여러분 오늘은 근무가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내일부터는 정상 출근하시면 됩니다.
한진이 형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봐요.
철연이 형 : ㅅㄱㅇ
민기 : 아싸, 퇴근 개꿀!
주헌 : 뭘 개꿀이냐, 당연히 오늘은 쉬는 게 맞지.
태양 : 밥 먹으러 가실 분?
성진 : 나 여자친구 만나러 가야 돼.
하윤 : 나나.
회사 단톡방을 대충 보니 젊은 애들은 놀러 간 듯 보였고 형들과 반장님은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나에게도 나오라며 톡이 와 있었지만 포털 내부로 들어가면 휴대폰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서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때 마침 김지원에게 카톡이 왔다.
김지원 : 오빠, 어디야?
약속 없으면 우리 집에서 밥 먹을래? 엄마, 아빠가 저번에 정말 고마웠다고 대접하고 싶대!
톡 보면 연락줘~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
김지원 : 그럼 저녁 먹으러 올래?
'저녁이라…. 조금 부담스러운데.'
나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하나의 카톡을 보냈다.
메뉴가 뭔데?
김지원 : 고기랑 된장찌개랑 이것저것.
응, 집에 가서 씻고 바로 갈게!
고기는 못 참지!
#
띵동.
"아, 안녕하세요."
"오빠, 왔어?"
"어서 들어와요! 저번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초인종을 누르자 김지원과 그녀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하….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신발을 벗고 그녀의 집 안에 들어가자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꿀꺽.
군침을 삼키며 식탁으로 향하자 식탁에는 김치부터 시작해서 온갖 나물과 쌈 채소들이 즐비했고 아주머니가 고기를 구워서 식탁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저번에 다친 곳은 좀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몸이 그새 더 좋아진 것 같네. 원래 키가 그렇게 컸었나?"
"그러게? 오빠, 아까보다 키도 그렇고 몸도 더 좋아진 것 같아."
"어, 그 세계수에 갔다 왔더니 이렇게 됐어."
"아,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다리 아플 텐데."
아저씨가 자신의 옆에 의자를 빼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술 좀 드시나?"
"아, 술이요? 자리가 되면 먹는데 굳이 찾아서 먹지는 않습니다."
"아, 그래요? 우리는 술 먹는 사람이 없어서."
"아! 괜찮습니다. 저는 고기만 있으면 됩니다!"
"하하, 고기는 많으니까. 많이 들어요."
"옙,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하하, 그럴까?"
"네, 그게 편합니다."
"자자, 찌게 나갑니다. 조심들 하세요!"
아주머니가 뚝배기에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이어서 고기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비주얼이었다. 적당히 익은 부챗살은 야들야들한 살코기 위로 적당한 기름기가 둘러져 식욕을 자극했다.
"어서 들어."
"아뇨, 먼저 드시면 먹겠습니다."
"허허, 그래."
왠지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내 시선은 아저씨의 젓가락만을 향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입에 음식을 집어넣는 순간, 내 젓가락은 재빠르게 가장 두툼해 보이는 녀석에게 쇄도했다.
'처음엔 그냥.'
"음…."
부드러운 살코기가 입 안에서 잘게 부서지며 그 안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냥 먹어도 맛있네.
곧장 다음 고기를 집는다.
'이번에는 소금 살짝.'
소금의 짭조름한 맛이 고기와 뒤섞이며 그 감칠맛을 더 했다.
"와…."
"맛있어?"
"응! 와, 진짜 맛있네요!"
"다행이다! 엄마도 빨리 와서 먹어!"
"다 됐어, 다 됐어! 금방 갈게."
아주머니는 입은 다 됐다고 하시면서도 손으로는 고기 굽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번에는 아주머니가 좀 억세고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여서 사실 불편했는데 오늘 보니 이해가 되었다. 아주머니는 그저 자식이 소중한 엄마일 뿐이었다.
식사도 안 하고 음식을 계속해서 내오시는 모습을 보자 그날에 다소 까칠하게 대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좀 더 태연하게 굴 수도 있었는데 흠….
아주머니는 고기를 두 접시는 더 굽고 나서야 자리에 앉으셨다.
"밥은 입에 맞아요?"
"아, 예! 정말 맛있습니다!"
"호호, 부족하면 말해요."
"아, 그럼 저 밥 한 공기만 더…."
"아, 오빠! 내가 줄게. 엄마는 앉아서 밥 좀 먹어."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순조롭게 끝이 났고 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께 양해를 구하고 김지원을 데리고 나왔다.
"오, 오빠. 정말 괜찮을까?"
"괜찮아, 괜찮아. 내 뒤에만 있으면 돼."
내가 그녀를 데리고 나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너, 튜토리얼 퀘스트도 안 깼다면서."
"웅…."
"어차피 파티 맺으면 같이 몬스터 처치한 걸로 되니까. 문제는 없을 거야."
"알겠어, 오빠. 대신 꼭 지켜줘야 돼."
"그럼, 걱정 하지 마!"
우리는 비어있는 던전을 찾아서 거리를 헤맸다. 둘이서만 진행을 하기 위해 다른 파티를 맺지 않고 던전을 찾으려니까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2등급의 던전은 비어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혹시나 김지원이 다칠지도 모르기에 안전한 1등급의 던전을 찾다 보니까 찾기가 힘들었다.
아파트 근처에서부터 번화가인 먹자골목까지 가니 그제야 비어있는 1등급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던전은 번화가 옆의 공원에 있었는데 이름은 '오크 평원'이었다.
던전 내부에 진입하자 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오크 무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여기 있어."
취익.
취이익.
나는 곧바로 달려 나가 오크 무리를 하나씩 도륙했다. 평원이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금방 끝이 났다. 오크를 모두 처치하고 김지원에게 돌아가자 그녀는 놀란 듯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오, 오빠, 뭐야?"
"응?"
"오빠, 왜 이렇게 쌔?"
"풋, 뭐가 쌔."
"아니, 막! 여기서 슝! 저기서 샥! 어?"
"아니야, 하하. 그보다 퀘스트는 완료됐어?"
"응! 몬스터 처치2까지 완료됐어. 몬스터 처치3은…. 39마리 잡았대. 업도 들어왔어."
"음…. 그럼 두 번은 더 돌아야겠네."
"아니야, 오빠.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돼."
"됐어, 봤잖아. 찾기만 하면 금방 끝나."
그 찾는 게 오래 걸려서 그렇지 처치는 금방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튜토리얼까지만 도와주고 그 이상은 나도 생각이 없었다. 그 이후의 등급 시험 같은 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
그렇게 동네를 몇 바퀴 돌자 그녀의 퀘스트는 모두 끝이 났다.
"고마워, 오빠."
"아냐."
"근데 능력치는 어떤 걸 올려야 돼?"
"능력치?"
"응!"
"어…. 일단 상태창에서 능력치랑 능력 좀 알려줄래?"
"체력이 9, 근력이 8, 민첩도 8, 정신력 12, 마력이 5고. 능력은 신성한 기도 9급이래."
"신성한 기도? 그거 설명도 읽어줄 수 있어?"
"기도를 올려 상처를 치유하고 저주를 해제한다고 쓰여 있어."
굉장히 쓸모 있어 보이는 능력이었고 또 능력의 이름을 듣자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너 기독교야?"
"어렸을 때 교회 다니긴 했는데, 지금은 무교인데?"
"그래…?"
잠재 능력의 원리를 모르겠네.
"일단 체력에 6, 근력에 7, 민첩에 2를 올리는 게 좋겠다."
'육체 능력이 너무 떨어지니. 마력을 올리는 것보다는 효율이 좋겠지.'
"응."
바로 능력치를 올리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눈이 허공을 훑는다. 그리고 우두둑 소리와 함께 몸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악!"
"왜 그래, 아파?!"
"아니, 놀라서…. 헤헤."
민망한지 순박한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보자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버는."
"무기는 뭐 받아?"
"무기? 무기는 안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필요하면 받아. 무기 들고 들어가면 부모님 놀라실 수도 있으니까."
나야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도 있고 혼자 살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그녀는 환경이 다르니까. 지금 이렇게 나온 것도 알게 되면 부모님께 혼이 날 수도 있다.
"그럼 받아서 오빠 줄게. 뭐 필요해?"
"아니야, 나 필요한 거 없어."
"그래도…."
"정 뭐 주고 싶으면 나중에 밥이나 사세요."
"응!"
"이제 집에 가자."
집에 도착해서 내가 먼저 한 것은 운동이었다. 그리고 바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운동이 되지 않아….'
근력이 오른 반동인지 기존에 집에 있던 운동 기구의 무게가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결국 깔짝대다 헬스방에서 나왔다.
"흐음…."
'능력치를 올리지 말고 운동으로 최대한 능력치를 끌어 올린 다음에 능력치를 분배했어야 했나….'
후회하기엔 늦었지만, 다음에 잔여 능력치가 생기면 좀 아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원판을 주문하였다.
"무게를 더 늘리지 뭐."
그리고 다시 샤워를 했다. 밥 먹기 전에 씻었지만 던전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옷도 지저분해지고 땀도 좀 흘러서 어쩔 수 없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자 사이트의 메인이 현 사태에 관한 뉴스 기사들로 가득했다.
'학교가 휴교했다고? 그래서 아까 돌아다니는 애들이 많았구나.'
그런 기사들을 하나씩 읽다가 유튜브를 들어가 보니 그곳의 유튜버들도 하나같이 다 현재 일어난 일들에 대한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어 보인다.
던전 내부에서 몬스터들과 전투하는 영상을 보다가 이내 휴대폰을 덮었다.
그리고 눈꺼풀도 덮고는 생각에 잠겼다.
'왜 꿈속에 들어가지지 않는 거지?'
세상이 변한 지 고작 3일이 지났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자던 중 오후에 갑작스레 입몽하게 된 것이 첫 경험이었고 이후에 김지원을 구해주고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가위에 눌리면서 입몽하게 된 것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 그 이후 이틀 동안은 입몽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할까?
입몽을 시도해볼 새도 없이 그냥 잠들었다가 깨니 날이 밝아있었다. 꿈은 꾸기도 했지만 입몽을 한 건 아니었고.
'입몽, 입몽, 입몽! 오늘 무조건 입몽한다!'
입몽의 감각은 확실히 새겨져 있다. 문제는 잠들었을 때 의식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지난 이틀처럼 오늘도 그냥 자고 일어날 뿐일지도 몰랐다.
'입몽한다, 입몽한다, 입몽한다, 입몽한…다, 입…몽….'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하던 중 어느 순간 의식이 끊어졌다.
'입모옹….'
#
'여긴 어디지?'
몽롱한 상태로 밤의 숲속을 거닐고 있다. 밤의 숲은 너무도 어두워서 휘황찬란한 달빛조차 그 속을 비추지 못하였고.
나는 그 어둠 속을 비척비척 걷고 있었다.
그러다 마주친 벽.
'응? 이게 뭐지?'
나무는 아니었다. 나무라기엔 결이 매끄러웠고 그렇다고 바위라기에는 오히려 거친 느낌.
벽을 더듬어 벽이 없는 길을 찾아간다. 얼마를 걸었을까?
뭔가 더러운 느낌과 함께 말캉한 것이 손에 잡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마나를 실어 그것에 주먹을 휘둘렀다.
콰직.
무언가 알이 깨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거대한 괴성이 울려 퍼진다.
"쿠워어어어!"
지진 같은 진동과 함께 삽시간에 주변의 나무들이 치워지고 나 또한 어딘가로 튕겨 날아간다.
"어…어어…?"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영청 밝은 달 아래 거대한 실루엣이 보인다.
'오, 오우거 전사?'
산만큼 거대해 보이는 오우거가 손을 휘젓자 땅이 뒤집히며 거대한 흙의 해일이 몰려온다.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땅의 바다를 마주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거대한 흙의 장벽, 그보다 위에서 고고하게 땅을 내리쬐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염원했다.
'터져라!'
무겁게 가라앉은 밤의 어둠을 들추던 달빛이 눈이 멀 듯한 섬광과 함께 온 세상을 밝히었다.
.
.
.
달빛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다른 세상의 내가 되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