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등급 시험 (2)
* * *
시험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상점을 열어 업을 확인해보니 2753업이 남아있었다. 고블린의 숲에서 고블린을 처치함으로써 56 업, 던전 퀘스트 보상으로 100의 업을 얻어 3153까지 늘어났던 수치가 급격히 줄어든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크윽!"
'좀 전에는 방심해서 당했지만, 이번에는 안 봐준다!'
입구에서 창피를 당한 걸 생각하자 열이 확 올라 발을 구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
심호흡을 하며 열을 가라앉히고 좀 전의 상황을 복기한다. 보통의 오크와는 확연히 다른 덩치, 굳이 비교하자면 홉 고블린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근육이 좀 더 조각조각 갈라진 느낌이었다. 오우거나 놀 치프틴에 비하면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 이상이다.
꿈속에서의 기억을 되짚어봐도 저런 녀석은 없었는데…. 꿈속의 기억이 워낙 단편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크 전사의 움직임은 기존에 겪은 몬스터들과는 뭔가 달랐다. 단순히 빠르고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기존의 몬스터들이 본능에 이끌려 마구잡이로 공격을 해왔다면 오크 전사는 마치 무술을 배운 것처럼 절도가 있었고 내 방패를 치려는 것처럼 하다가 하단을 공격하는 계산적인 움직임마저 보였다.
근력은 물론이고 속도에서도 마나 폭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밀리는 상황. 오크 전사를 이기기 위해선 일단 마나 폭주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0초의 시간 동안 마나를 폭주시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몸 전체에 마나를 퍼뜨려 근육과 오감을 활성화하는 것이 1단계, 퍼진 마나를 폭주시켜 활성화된 능력을 극대화 2단계, 그리고 한계에 다다른 몸에 심장에 모여있는 증폭된 마나를 강제로 밀어 넣는 게 3단계였다. 3단계에 이르면 육체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하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나노 슈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는다. 랑스 때의 기억을 상기해보면 순식간에 의식의 끈이 끊어졌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몸에 관해 설명하자면 3단계까지 진행할 정도의 마력도 없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 유현
등급 : 2
능력치
체력 : 30 근력: 16 민첩 : 23 정신력 : 15 마력: 16
잔여 능력치 : 0
능력 : 입몽, 재래식 호흡법(9급), 뇌전신공(9급), 마나 폭주(9급)
지금의 마력으로는 2단계까지가 한계였다. 심지어 그 2단계도 급속도로 소모되는 마나 때문에 오래는 유지할 수 없었다.
"쓰읍…."
'좀 성장을 더 하고 와야 하나?'
던전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업의 양을 150 정도로 상정하면 순식간에 그 이상의 업을 소모하고 상상하기 싫은 고통까지 뒤따르는 일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너무 무턱대고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집에 가서 운동과 호흡법을 연마해서 능력을 키운 후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던전을 돌며 업을 모아 상점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200업을 소모하여 들어와 버린 후였기…. 잠깐만, 상점?
'아! 맞네, 상점!'
상점을 열어 자세히 훑어본다. 무기부터 방어구, 장신구, 소모품까지. 그리고 좌절한다.
"이야, 8급 무기 하나 사면 업 다 날아가네."
8급에 해당하는 장검의 가격이 2000업, 징이나 가시가 박힌 방패의 가격도 1800~2200업 정도였고 혹시나 하고 알아본 대검의 가격은 3000업이었다. 그렇다고 보급받은 무기보다 월등히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조금 더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일 뿐이었다.
방어구는 좀 더 저렴했지만, 부위별로 나누어져 있어 모든 부위를 사려면 오히려 무기보다 값이 더 나갔다. 게다가 방어구를 입는다고 해서 오크 전사의 도끼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방어구 째로 몸이 분쇄될 게 분명했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서 몸의 움직임을 방해할 것 같았다. 지금은 나노 슈트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리고 살펴보니 상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물품의 등급은 8급까지가 다였다. 7급부터는 아직 제한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뭐, 판매한다고 해도 사지도 못했겠지만.'
장신구는 9급의 2돈짜리 금반지가 400~500 업이었고 보석 같은 게 붙으면 가격은 더 상승했다. 8급으로 가면서 뭔가 세련되긴 했지만 단지 그뿐. 장신구라는 말답게 몸을 치장하는 용도 외에는 사용하기가 애매했다. 전투에 사용한다면 차라리 장신구보다는 너클같은 게 나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소모품.
[최하급 힘의 비약]
등급 : 8
설명 : 5분간 근력을 5만큼 상승시켜주는 힘의 비약이다.
[최하급 마력의 비약]
등급 : 8
설명 : 5분간 마력을 5만큼 상승시켜주는 마력의 비약이다.
그나마 쓸모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비약 시리즈. 그러나 가성비를 따졌을 때 몹시 좋지 않았다. 하나에 1000업. 지금으로서는 2개의 비약을 살 수 있었지만 이걸 사는 건 첫 번째로 비용적인 측면에서 좋지 못했다.
등급 시험의 보상이 2000업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2000업을 사용한다? 물론 업을 제외하고서라도 등급이 올라감으로써 얻는 혜택이 훨씬 더 많겠지만 문제는 두 번째에 있었다.
바로 효율.
등급 시험에 들어가서 비약을 복용함으로써 능력치를 올린다? 그 시간에 마나를 폭주시키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일 것이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복용하고 들어가는 방법도 존재하지만, 그 상태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걸 시험해보기 위해 2천의 업을 소모한다는 것도 수지가 안 맞았고.
길게 늘어놨지만 결국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좀 더 성장을 꾀한 후에 도전해야겠지.
대충의 계획은 상점을 살피는 동안 짜냈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실패하면 1등급 시험의 방이나 가봐야겠다.'
아마도 그곳에선 등급 2의 몬스터가 나올 테니 충분히 상대할 만할 것이다.
"후우."
그리고 다시 한번 개인 전투의 문을 열었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2번째 도전입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취이익!
그리고 열자마자 곧장 뒤편의 숲속으로 뛰었다.
시리릭.
수풀의 잔가지를 스쳐 지나가며 마나를 온몸에 퍼뜨리자 오감이 활성화되고 육체의 능력이 향상했다. 증폭된 감각에 의하면 오크 전사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나는 쾌조를 느끼며 능력을 더욱더 끌어올렸다.
'마나 폭주.'
오크 전사로부터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면서 동시에 전신에 퍼진 마나를 폭주시킨다. 천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마나는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서 육체의 근섬유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져 주위의 풍경이 점차 흐릿해지다 사고 또한 가속화되며 균형을 잡아간다.
'아직이야.'
쾅.
멀리서 땅을 박차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 있는 것처럼 크게 들려온다.
이미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발을 멈추지 않고 마나도 계속해서 끌어올린다.
쾅!
다시 한번 땅을 박차는 소리. 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콰앙!
조금 더.
콰앙!
유지.
쾅!
소리가 다시 조금 작아졌다.
쾅.
조금 더.
콰앙….
소리가 조금 더 작아지고 마나가 한계치까지 증폭되었을 때.
비로소 몸을 돌렸다.
콰아앙!
'복수 시작이다!'
내 발돋움에 땅의 흙이 흩날리며 비명을 토했다. 나무와 바닥의 자갈, 풀 따위가 시신경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전달하고.
드디어 만났다.
취익!
이를 악물고 온 힘을 실어 검을 내리그었다. 방향은 오크 전사의 머리.
팽! 콰앙!
오크 전사가 다급히 푸르스름한 도끼를 들어 올려 머리를 막았지만 그대로 튕겨 날아가 나무에 처박힌다. 나무가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려 하고 나는 나무가 쓰러지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취이익!
그새 자세를 정비한 오크 전사가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날아드는 검을 향해 자신의 도끼를 마주 휘둘렀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검을 멈추고 허리를 한껏 뒤로 꺾었다.
"흡!"
부웅.
'훼이크다, 이 자식아!'
머리 위로 살벌한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도끼가 보인다. 그리고 그걸 휘두르고 있는 오크 전사의 당혹스러운 표정까지도.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하체가 터질 듯이 팽창하고 뒤로 접혔던 허리가 용수철처럼 펴짐과 동시에 회전한다.
하체로부터 시작된 힘의 이동은 어깨와 팔, 그리고 손에 이어 짙푸른 마나가 이글거리는 검까지 이어졌다.
서걱.
뀌이익!
오크 전사의 허리가 통째로 베어지며 그 상체가 요란하게 떨어져 내린다.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는 오크의 머리를 내려찍자 그제야 주변에 고요가 찾아왔다.
푸시이이.
"후우우…."
수증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육체를 달아오르게 만든 마나가 폭주를 제지하자 급속도로 사그라든다. 나노봇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육체는 붕괴하지 않았고 마나도 10분의 1 정도는 남아서 마나 탈진 상태에 이르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전력으로 끌어올린다면 30초 정도가 한계인가?'
전력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적당히 유지한다면 2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2000업이 지급됩니다.]
[2등급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이 3이 되었습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5칸 늘어납니다.]
[등급 상승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30이 지급되었습니다.]
[상점의 이용 가능한 물품이 갱신됩니다.]
[3등급 시험의 방에 입장이 가능해집니다.]
눈앞에 시험의 종료를 알리는 창이 떠오르고 푸른빛을 빛내는 포털이 나타났다. 떠오른 창을 천천히 읽고 포털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야, 미친 사람 또 나왔다."
"어디? 어, 진짜네."
아니,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없나? 그리고 누구보고 자꾸 미친 사람이래!
내가 눈을 부릅뜨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제야 시선을 피하며 멀찍이 떨어진다.
"어우, 무서워! 자기야, 저쪽으로 가자!"
"응, 오빠. 나 너무 무서웠쪄…."
'아, 기분…. 하….'
좋았던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게 가능하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구나!
나는 울컥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장막으로 향하였다.
[시험의 방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등급을 선택하세요. (1등급/2등급/3등급)]
'3등급.'
새롭게 열린 3등급 시험의 방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시험의 방(3등급)이 개방됩니다. 입장 시 300 업이 소모됩니다.]
안에 입장하자마자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 잔여 능력치부터 분배하였다.
[상태창]
이름 : 유현
등급 : 3
능력치
체력 : 30 근력: 30 민첩 : 25 정신력 : 15 마력: 30
잔여 능력치 : 0
능력 : 입몽, 재래식 호흡법(9급), 뇌전신공(9급), 마나 폭주(8급)
마력에 14, 근력에 14, 민첩에 2의 능력치가 추가되자 곧바로 몸에 반응이 왔다.
우드드득.
"우오오오!"
온몸에 힘이 넘친다! 근육과 골격이 실시간으로 늘어나며 몸에 강대한 힘이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오크 전사를 만난다면 도망치며 시간을 벌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자신감 넘치게 개인 전투의 문을 열어 재꼈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으음…?"
거대한 그림자가 땅을 뒤덮었다. 고개를 들어 나의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곧장 뒤로 달렸다.
[오우거 전사]
등급 : 4
설명 : 단독 생활을 하는 오우거이지만 오우거 전사가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우거가 강제로 부족을 이루게끔 할 정도로 강대한 힘의 화신.
뛰어가는 동시에 마나를 전신에 퍼뜨려 강화한다. 그리고 마나를 폭주하기 시작하자 확연히 늘어난 마력과 근력으로 인해 증폭되는 속도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10초가 채 되기도 전에 육체가 버틸 수 있는 상한선까지 능력을 끌어올린 나는 뛰던 걸 멈추었다. 그리고 수풀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오우거 전사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오크 녀석 곁으로 보내주마!"
콰드드드득!
'응?'
나무 수십 그루가 순식간에 쓰러져 내리며 수풀로 만들어진 쓰나미가 슬로모션처럼 덮쳐온다.
"하, 하하…. 다, 다음에 와야겠…으아악!"
콰과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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