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등급 시험 (1)
* * *
산 중턱에 도착하자 눈앞을 가득 메우는 나무의 결. 그것은 흡사 나무의 기둥이라고 착각할 법했으나 온전히 뿌리 하나였다. 뿌리 하나하나가 마치 천년을 자라온 고목처럼 굵직하게 자라 땅속 깊숙이 틀어박혀 있다. 고개를 들자 목이 90도에 가깝게 꺾어서야 가까스로 나무의 가지와 잎이 보이기 시작했고 몸을 반 바퀴 돌리자 그제야 산 전체, 아니 산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길게 뻗어있는 가지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뭐 이리 커?'
그나마도 이 노태산은 산치고는 아주 작은 편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였다. 다른 큰 산은 아마 더욱 거대한 세계수가 자라나 있겠지. 그리고 기이하게도 산 중턱에 오르는 동안 이 커다란 나무의 잎은 단 한 장도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지고 사람의 몸에선 털이 빠져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그런 당연한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느껴진다. 이 나무의 가지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는 방대한 마나가 티끌만큼의 마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곳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근데 시험의 방이라는 건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막연히 산 중턱까지 올랐지만 보이는 것은 거대한 뿌리뿐. 일단 한 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 10분쯤 뛰었을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곧 세계수의 기둥 아래 뿌리가 좌우로 기형적으로 벌어져 있는 공간 앞에 도착했다. 좌우로 50여 미터 높이도 20미터는 넘어 보이는 반원형의 공간은 그 안을 볼 수 없게 푸른색의 장막이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이건 대체…?'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푸른 장막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본다. 그러자 통과하거나 튕겨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딱딱한 벽을 만진 것처럼 가로막혀 버렸다. 그리고 창이 하나 떠올랐다.
[시험의 방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등급을 선택하세요. (1등급/2등급)]
'음?'
등급을 선택하라고? 나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2등급'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의 방(2등급)이 개방됩니다. 입장 시 200 업이 소모됩니다.]
그리고 딱딱하던 장막에 다시 손을 내밀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손이 쑤욱 들어간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 몸을 장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공기가 바뀐 것을 느끼고 다시 눈을 뜨자 주변이 목재로 이루어진 방의 중앙에 서 있었다.
[시험의 방에 처음으로 입장하신 '유현'님 환영합니다.]
[시험의 방의 시험은 4가지 종류로 분류되며 하나의 종류에 총 5가지의 시험이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만 통과하셔도 등급 시험은 통과되며 한 번 통과한 시험은 다시 치를 수 없습니다. 단, 통과하지 않은 시험은 업을 소모하여 치를 수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할 시 해당하는 등급이 상승하며 소모된 업의 열 배를 보상으로 받습니다.]
[시험은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되며 시험이 종료될 시 현실의 육체와 함께 시험의 방 바깥으로 배출됩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떠오른 창의 설명대로 직육면체의 방은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각 면마다 하나씩 총 네 개의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문 위에는 글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제작, 전투, 생활, 모험이라…."
가장 먼저 제작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자 그 안에 또 다른 '무기', '방어구', '예술', '연금술', '마법 물품'이라고 적힌 5개의 문이 새로 있었으며,
전투라고 적혀 있는 문 안에는 '개인 전투', '집단 전투', '암살', '호위', '구출'의 문이 있었고
생활이라고 적혀 있는 문의 안쪽에는 '요리', '건설', '의술', '정리정돈', '정보 수집'의 문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험의 문 안에는 '탐색', '지식', '채집', '절도', '조련'의 문이 존재했다.
그렇게 각각의 문을 살펴보고 나서 나는 하나의 문 앞에 섰다.
'개인 전투.'
내가 전투의 문 안쪽에 있는 '개인 전투'의 문 앞에 선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냥 다른 걸 할 줄 모른다.
먼저 제작에 관해 얘기하자면 내가 태어나서 해 본 제작이라고 해봐야 컴퓨터 조립, 가구 조립…. 아니, 애초에 조립을 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립을 빼놓고 보면 제작이라는 행위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싯적에 학교에서 교과서에 낙서하던 걸 예술로 쳐준다면야 모르겠지만.
그리고 생활. 자취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요리라고 해봐야 김치볶음밥, 계란말이 정도가 한계였다. 또 라면은 기가 막히게 끓인다고 자부하지만…. 라면을 요리라고 생각하기엔 솔직히 낯부끄러웠고. 건설은 건설 현장에서 일해본 경험은 있지만, 그냥 무거운 거 들고 옮기고 공구 가져다주고 하는 잡부 일을 한 게 다였고 의술은 다치면 연고 바르고 밴드 붙이고 감기 걸리면 약국에 가서 약 사 먹고 군대에서 배운 심폐소생술 정도가 다였다.
정리정돈은 뭔가 쉬울 것 같아 약간 끌리긴 했는데 시험이라고 한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고 평소에 적당히 치우는 타입이지 깔끔떠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제외한 정보 수집 역시 해 본 적이 없으므로 생활 쪽은 깔끔히 포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험의 문을 고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볼까. 탐색은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자신이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기 전에는 리모컨을 어디에다 뒀는지 지갑을 어느 옷에 넣어놨는지 기억이 안 나 찾아다닐 때도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마나 운용으로 오감을 활성화할 수도 있었고 적은 반경이지만 마나를 퍼뜨려서 감지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실 탐색과 개인 전투 사이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지만, 탐색보다는 전투가 좀 더 익숙해서 결국 개인 전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내 스스로를 내가 잘 안다. 머리에 든 게 많이 없다는 걸. 자랑할 건 아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채집 역시 경험이 전무. 절도는 어렸을 때 도벽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이야기였고 뭔가를 훔치는 기술 같은 게 전무했다. 조련은 그 흔한 개 한마리 키워본 적이 없었고 다만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사 와 키운 적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며칠을 못가 모두 죽었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나 정말 형편없구나…. 퇴근하면 맨날 게임이나 했지. 어휴.'
결국에 이 중에서 최근 들어 가장 익숙히 접하고 있는 전투. 그중에서도 개인 전투를 고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문고리를 잡고 개인 전투의 문을 열었다.
"잉? 아무것도 없잖…!"
분명 아무것도 없이 벽만이 존재했었는데 순식간에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이 돌아오며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그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창이 떠올랐다.
[전투 개인 전투 시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방의 적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취익! 취이익!
갑자기 목재의 방에서 숲속의 공터로 바뀌어버린 상황에 앞에는 웬 오크 한 마리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다.
[오크 전사]
등급 : 3
설명 : 오크 부족의 전사로 전투 능력이 보통의 오크보다 뛰어나다.
'등급이 3?'
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인벤토리에서 무기부터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노 슈트를 온몸에 두르며 곧장 마나를 폭주시켰다. 그러나 마나가 채 증폭되기도 전에 마나를 두른 도끼가 날아들었다.
콰앙! 콰직!
"크헉!"
가까스로 방패에 마나를 둘러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허공을 날아 뒤편에 있던 나무에 거세게 부딪힌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나노봇이 육체의 손상을 고치기 시작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 쉴 틈도 없이 쇄도해 들어오는 도끼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자리를 박찬다.
"헙!"
우드득!
도끼가 나무를 단번에 베고 지나가자 나무가 단박에 쓰러져 내린다. 오크 전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내 좌측 상단을 노리고 공격을 해왔고 나는 왼손의 방패를 들어 올리는 한편 오른손의 검으로 반격할 준비를 했다.
"……!!!"
'이런 미친!'
그런데 좌측 상단을 향해 오던 도끼가 순간 멈칫하더니 방향을 틀어 하단을 베어온다. 피하기는 이미 늦었기에 나도 뒤늦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악!"
취이익!
순식간에 양다리가 잘려 나가며 중심을 잃은 몸이 뒤로 쓰러진다. 오크 전사의 목을 베려고 휘두른 검은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 녀석의 왼팔을 잘라내었다. 살과 뼈가 통째로 분리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 잠깐 눈을 깜빡였을 때 흐릿한 시야로 오크 전사가 하나 남은 팔로 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눈을 완전히 떴을 때 그 도끼는 어느새 내 코앞까지 도달했다.
콰앙!
"크아아아악! 어, 얼굴! 내 얼굴!"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미친 사람인가?"
"으아아악! 내 얼굴…! 응?"
나는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얼굴을 감싸 쥔 손을 펼쳐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괘, 괜찮다?'
그리고 양다리에도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 눈 쪽의 손가락을 벌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에잉, 미친놈. 쯧쯧."
"말세야, 말세."
그러자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경멸스러운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손가락질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하, 하하…."
나는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리곤 곧장 푸른 장막으로 몸을 던졌다.
'오크 새끼 뒤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