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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17화 (17/62)

〈 17화 〉 업데이트 (1)

* * *

"잘들 살아남아 주셨네요."

은발의 미청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묘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릴 때 그가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아니, 이걸 말을 내뱉는다고 할 수 있을까? 저 높은 허공에서 나직이 내뱉는 말은 그리 크지 않은데도 귀에 쏙쏙 박혔다.

"앞으로도 잘 살아남으시길 바랍니다."

'살아남는다라….'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의 관리자이자 행성 지구의 담당자, 아이반이라고 합니다. 현 시간부로 지구, 대한민국의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음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딱.

자신을 소개한 아이반이 손을 튕기자 여러 개의 창이 떠올랐다.

[ '상점'이 활성화됩니다.]

[상점은 '상점'이라는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으며 '업'이라는 재화를 소모합니다.]

['업'은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몬스터의 처치, 생산, 수집 등 다양한 방면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세계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계수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 '마나'가 활성화됩니다.]

['등급 시험'이 개방됩니다.]

[등급 시험은 '세계수'에 위치한 '시험의 방'에서 치를 수 있으며 시험의 방 입장 시 등급에 따라 '업'이 소모됩니다.]

['던전'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된 던전이 일정 시간 이상 방치될 시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이 던전을 벗어납니다.]

[ '파티', '친구'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파티', '친구' 기능은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개의 창이 시야를 뒤덮음과 동시에 대기가 확연히 바뀌었음을 느낀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기였으나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메말라 있던 허공이 순식간에 마나로 가득 채워진다.

드드드드득.

"어어?"

"꺄아아악!"

"지진이다!"

그리고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며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거대한 나무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거대한 나무는 순식간에 자라나 산의 정상까지 그 범위를 넓혔고 그제야 땅을 울리던 진동이 멈췄다.

"저, 저게 세계수?"

세계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산의 중턱에도 똑같이 자라났고 아마도 지역 곳곳에 있는 산에 다 자라났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존의 포털과 똑같이 생긴 푸른 빛을 환하게 내뿜고 있는 것들이 사내 운동장 곳곳에 생겨났다. 저것들이 창이 말하는 '던전'인 듯싶었는데 본래의 포털이 회사 내부에는 생겨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던전은 달랐다.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설명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야 몬스터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인 듯했다.

'상점.'

[상점 ­ 등급 2]

ㅁ 업 : 3000

­ 무기

­ 방어구

­ 장신구

­ 소모품

­ 채집 도구

­ 제작 도구

­ 책

­ 재료

상점은 8가지 종류로 대분류되어있으며 각각의 대분류마다 세세하게 소분류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무기'는 '검', '활', '석궁', '도끼', '창', '스태프', '완드', '방패' 등으로 다양했고 검의 경우는 '단검', '장검', '대검'의 세 가지로 다시 분류되며 활의 경우에는 '단궁', '장궁', '대궁'으로 분류되며 재질에 따라 또 나뉘는 듯했다. 방어구나 장신구도 마찬가지로 세세하게 소분류가 되어있었으며 눈에 띄는 것은 소모품이었다.

'생필품에 의약품, 요리까지?'

제일 먼저 생필품에 들어가자 빗자루, 쓰레받기부터 시작해서 청소기, 걸레, 주방 세제, 세탁 세제, 비누, 클렌징폼, 바디워시 등등 온갖 생필품 목록이 쭈르륵 나열되어 있었으며 하나의 목록에 들어가면 갖가지 물품이 떠올랐다.

'나무 빗자루, 플라스틱 빗자루, 쇠 빗자루…. 어디 보자 비누는 장미 비누, 오이 비누, 쌀겨 비누…. 쌀겨 비누 하나가 얼마야? 10 업?'

나무 빗자루 하나가 15 업이었는데 쌀겨 비누 하나가 10 업이면 가성비가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아직 업의 값어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빠르게 대충 훑어나갔다.

음식에는 '빵', '면류', '육류', '생선류', '달걀', '우유'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빵으로 들어가자 단팥빵, 꽈배기 따위가 보였다. 빵은 대부분 3~6포인트 사이였다.

'꽈배기나 하나 사볼까?'

[꽈배기를 구매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그러자 상단의 업이 2997로 바뀌며 허공에 은은한 빛과 함께 꽈배기 하나가 나타났다.

"어? 오빠! 이게 뭐야?"

"상점에서 하나 사봤어."

"우와! 나는 업이 0이던데. 업을 어떻게 얻은 거야?"

김지원의 순수한 질문과 함께 사람들이 허공에 나타난 꽈배기에 관심을 가지자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다른 사람들은 업이 없구나!'

명백한 실수라는 걸 깨달았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몰라, 나는 있던데? 이거 먹어봐."

"앗, 고마워."

자연스럽게 허공에 있던 꽈배기를 집어 반을 떼 주었다. 사람들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다시 하늘에 떠 있는 아이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 맛있는데."

"정말, 뜨끈뜨끈해!"

꽈배기는 갓 오븐에서 나온 것처럼 뜨끈한 게 맛있었다. 나와 김지원도 꽈배기를 연신 베어 물며 아이반을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지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뭐,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은 어느 곳을 불문하고 존재하니 다들 잘 아시겠죠? 성장하지 않고 도태되는 사람, 지역, 나라, 행성은."

딱.

아이반이 손가락을 다시 한번 튕기는 순간 배경이 급변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세상에 나 혼자만이 남아있다. 그러다 발을 받치고 있던 땅마저 사라지더니 어두컴컴한 우주가 배경이 되었다.

"흐읍!"

다급하게 숨을 참아보지만, 다행히도 숨은 잘 쉬어졌다. 내 눈앞에는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아름다운 행성이 보였고 그 행성은 점차 아름답던 빛을 잃고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내 조각조각 갈라지더니 터져버린다.

콰앙.

"...!"

소리가 없는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 파괴된 지구의 거대한 파편이 눈앞으로 날아온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순간.

"이렇게 파괴될 겁니다."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지만, 싱긋 웃는 아이반의 모습은 공포로 다가왔다.

"아무쪼록 노력해주세요.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저렇게 되기도 전에 죽을 겁니다. 그럼 이만."

아이반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남은 한 손으로 펄럭이는 망토를 살짝 집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디오스."

'에엑.'

좀 깨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짝!

"자, 퇴근할 사람은 퇴근들 하시고 일할 사람들은 어서 일하러 갑시다!"

그룹장 박승권이었다.

"어휴, 쯧쯧. 일에 미친 사람."

옆에 있던 아저씨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의 말대로 일하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들 전화를 하며 회사를 벗어났다. 나 역시 어젯밤 반장인 류문상과 면담하며 퇴직 준비를 마쳤기에 미련 없이 자리를 나섰다.

"야, 현아! 진짜 퇴사하냐?"

"엉, 고생들 해!"

물론 퇴직 처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퇴직 처리가 되기까지 연차가 쓰이고 그 와중에 한 번은 회사에 와서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남아있었다.

"오빠, 집에 갈 거지?"

"너도 가려고?"

"응. 엄마, 아빠가 기다리셔."

"그래, 같이 가자."

그녀는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자율 출퇴근제였기에 언제든 퇴근이 자유롭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주차장을 향해 걸어 나갔는데 입구의 보안검색대에는 보안 요원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회사 털면 다 털겠네.'

"오빠, 왜 웃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피식 웃자 김지원이 물었다.

"아냐, 그냥 보안 요원이 하나도 없길래."

"아, 진짜 다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어…. 잘 도망가지 않았을까?"

검색대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자 주차장 기둥 몇 개가 박살 나 있었고 셔틀버스 정류장에 있던 버스들도 심각히 파손된 상태였다.

"지원아, 너 차 몇 층에 주차했어?"

"나? 1층에 했었는데…. 괘, 괜찮겠지?"

"빨리 가보자."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 1층 주차장 끝 쪽으로 향했다.

"휴. 다행이다."

다행히 그녀의 차는 무사했다. 우리는 얼른 차에 탑승했다.

'친구.'

차에 탑승하자마자 안전띠를 매고 친구라고 속으로 외자 친구창이 떠오른다.

'텅 비어있군. 친구 추가를 어떻게 하는 거지?'

그에 대한 답은 친절하게도 홀로그램 창이 떠오르며 해주었다.

[상대방의 손을 잡고 '친구 요청'이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친구 요청이 됩니다. 상대방이 수락할 시 '친구' 목록에 저장되며 친구에게는 귓속말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귓속말은 '귓속말 차단', '귓속말 차단 해제'라는 생각으로 기능을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아하.'

나는 그대로 기어에 손을 얹고 있는 김지원의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친구 요청.'

"어엇, 오, 오빠?"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친구 요청 갔어?"

"으, 으응…."

"수락해봐 얼른."

"응!"

곧 친구창에 김지원의 이름이 새겨졌다. 내친김에 귓속말과 파티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그치고 출발했다.

차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오자 아파트의 입구와 나무들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건물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들어가."

"응, 오빠도."

5층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와 헤어지고 곧장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후아, 역시 집이 최고다!"

­오빠?

"응?"

뭐지 이 귓속을 간질거리는 음성은.

­오빠 안 들려?

아, 이게 그 귓속말 기능인가.

"하아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번 하고는 생각한다.

'친구.'

­안되는 건가…? 뭐지?

친구창이 떠올라 그곳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김지원의 이름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귓속말 기능이 활성화된다. 그리고 말을 하려는 순간 혼잣말을 하던 그녀의 이어진 말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오빠사랑해! 헤헷!

'갑자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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