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14화 (14/62)

〈 14화 〉 튜토리얼의 끝 (3)

* * *

버스는 이따금 존재하는 방지턱을 덜컹거리며 넘어가고 그 흔들림에 내 몸은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남은 시간은 20분….'

고작 이틀 만에 상황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별다른 피해도 없이 흘러간 지난 이틀과는 분명 다르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될지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확실한 건 남은 20분의 시간이 모두 흘러간 후에는 피해갈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것이란 거다.

'오우거.'

고작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강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꿈속에서 만큼의 능력과 능력치가 존재한다면 어렵지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퀘스트의 보상으로 능력치가 급증했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이틀 정도의 시간으로 꿈속의 경지를 이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고 시련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굳이 내가 상대할 필요가 있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압박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라에는 시민을 지키는 군과 경찰이 존재하며 시민인 내가 굳이 나서서 재난과도 같은 상황을 해결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후우."

쓸데없는 책임과 의무를 집어던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상황을 보다 남은 잔여 능력치를 투자하면 여차할 때 도망갈 여력은 되겠지.

버스는 곧 회사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고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1시 50분.'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남은 시간은 이제 10분. 식당 아주머니들과 급식 업체 직원들은 음식을 배분하고 식당을 정리하는 등 여느 때와 별 차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이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사원들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있었지만,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나도 그런 분위기에 동화되어 음식을 배분받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 멀리서 같은 조 사원이자 친구인 홍민기, 이주헌, 정성진, 김태양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여어, 현아!"

"여어, 태양. 왔어?"

"이게 무슨 일이냐."

"너네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겉으로 봤을 때 큰 변화가 없는 나와는 달리 가까워진 친구들의 모습은 불과 이틀 만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본래 마른 편이었던 이주헌과 정성진은 근육이 붙어 덩치가 산만 해졌고 살집이 좀 있었던 홍민기와 김태양 역시 몸을 덮고 있던 지방 대신 울긋불긋한 근육들이 대체하고 있었고 키도 조금 자란 듯했다.

각자 원하는 메뉴를 골라 식당에 앉아 최근 벌어진 일들에 관해 얘기하며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때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오빠!"

"읭?"

다소 격앙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다가왔다.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자를 바라봤다. 7층 여자였다.

"어,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친구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와, 진짜 신기해요! 우리 같은 회사였네요?"

"그, 그러게요. 몸은 괜찮으시죠?"

"덕분에요. 근데 왜 그렇게 그냥 가셨어요!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아, 좀 피곤해서…."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둘러댔다.

"통성명도 못 했는데. 아 참, 제 이름은 김지원이에요!"

"유현입니다."

김지원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통성명을 하자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했다.

"오, 외자에요?"

"예, 외자입니다."

"와, 멋있다. 오빠 지금 출근하시는 거예요?"

"아, 예. 지금 출근했습니다."

내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생기 넘치고 환히 빛나는 눈빛은 이뻐서 더 마주하기 힘들었다.

"앗, 죄송해요. 식사하시는데. 저 카톡으로 연락해도 되죠?"

"아, 예. 연락주세요."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몰랐지만, 회사 어플에 사원의 이름만 검색하면 연락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번호 교환은 따로 하지 않았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신의 일행에게 돌아가는 김지원의 뒷모습을 보자 입가가 씰룩대다 입술을 비집고 미소가 흘러나왔다.

"훗."

"이야, 유현 뭐야!"

"뭐야, 뭐야!"

옆에 앉아 있던 친구 녀석들이 야단법석이다. 나는 우쭐해져서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야, 잘나가네. 유현!"

"아니, 뭔데? 누군데 저 여자?"

'몰라도 된다. 자식들아.'

나는 녀석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빨리 밥이나 먹어. 곧 2시다."

"아, 맞다. 근데 이거 출근해도 되는 거 맞냐? 영상 장난 아니던데."

"몰라, 일단 사내에는 포털이 안 생기는 것 같으니까 지켜봐야지."

"일하느라 뭔 일 있는지도 모르는 거 아냐?"

시계를 보며 빠르게 식사를 진행했지만, 밥을 다 먹고 나니 시곗바늘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식당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다행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파트 부지와 마찬가지로 회사 역시 입구 내부에는 포털이 생성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튜토리얼 ­ 보스 몬스터 처치(1)]

­ 퀘스트 설명 : 붉은 포털 속에서 출현하는 보스 몬스터를 종류에 상관없이 처치할 것.

­ 퀘스트 완료 조건 : 보스 몬스터 처치 (0/1)

­ 퀘스트 완료 보상 : 등급 2, 2000 업.

[등급 2]

­ 달성 보상 : 잔여 능력치 20, 인벤토리 활성화.

우리는 식당 건물에서 빠져나와 우리가 근무하는 건물인 화성동으로 향하였다. 화성동에 도착해 탈의실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선배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형, 안녕하세요!"

"어, 왔어?"

우리 회사는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형, 동생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서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김태양이 옷을 벗고 있던 우리 조 최고령의 대리 정한진의 곁에 다가가 감탄을 자아냈다.

"와, 한진이 형 몸 장난 아니신데요?"

"그짓말 하지 마라! 무슨 몸이 좋아. 야, 김태양이 몸 직이네!"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형.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서로 너스레를 떨며 칭찬하던 중 D조의 나이 서열 2위, 이철연이 전달사항을 말했다.

"얘들아, 오늘 조회 생략하고 교육실에서 그룹 회의한다고 하니까 교육실로 모여."

"옙!"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자 먼저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로 화장실이 붐볐다. 나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내 수납함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내 들었다.

"와, 얘네들 봐라. 몸이 커져서 화장실이 꽉 차네."

"마, 비키라! 어우, 진절머리 나는 구로!"

먼저 이를 닦은 이철연과 정한진이 화장실을 나가자 그제서야 움직이기가 수월해졌다.

"야, 근데 라인이 조용하다."

"세웠나 보지 뭐."

"오늘 비가동인가?!"

"비가동이 문제냐?"

이를 닦고 휴게실로 향하자 전근인 B조 사원들과 후근인 D조 사원들이 엉켜 쉬고 있었다.

"형, 안녕하세요. 와아, 개꿀이네. 한성곤이!"

"에이, 행님. 아님다. 오늘 하나도 몬쉬었어요."

"킥, 지금 쉬고 있구만. 뭘. 그리고 거짓말 하지 마.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구만."

"와, 부럽다. 부러워. B조는 놀다가 퇴근하겠네."

"다 된다. 다 돼."

보통 이렇게 많은 사람이 휴게실에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인지 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나는 B조에서 나와 친한 형인 목대승에게 다가갔다.

"여어, 현이 왔어?"

"어, 형. 몸 미쳤네?"

몸이 커져서 작업복이 터질 거 같은 팔뚝을 만지자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어, 난 근력이랑 체력에 몰빵했지. 너는 어디에 투자한 거야?"

"난 일단 마력만 10 올렸어."

"어이구. 마력 안 좋다던데. 튜토리얼 아직 다 안 깬 거야?"

"아니 깼는데. 10은 남겨놨어. 무기도 아직 안 받았고."

"그래? 근데 영상 보니까 큰일이던데. 밖에 괜찮아?"

"어, 잘 모르겠는데 일단 회사 내부에는 포털이 안 생기는 거 같더라고."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오늘 퇴근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잔업하고 가, 크큭."

"안되지. 안그래도 3시에 무슨 회의 한다고 해서 퇴근 못 하는데."

"잘됐네. 어차피 퇴근 못 하는데 잔업 해."

"아, 안돼. 안돼. 나 피곤해."

손사래를 치는 목대승과 재밌게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2시 50분이 되어 교육실로 향했다. 교육은 3시부터 시작이었지만 다들 미리 와서 착석을 시작했다. 교육실은 화성동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M동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또한 모여서 금세 가득 찼다. 교육실의 스크린에는 빔프로젝터가 오우거와 관련된 영상을 정지된 상태로 송출하고 있었다.

"자, 사인들 하세요."

윤호영 차장이 오늘 그룹 회의 참석을 확인하는 A4용지를 전달하자 사원들이 저마다의 이름에 사인을 시작했다.

"다들 집에 전화 한 통화씩 하셨죠?"

"예."

아직 가족과 통화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뒤늦게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교육실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반장 류문상에게 말했다.

"반장님. 태석이 형 안 왔는데요?"

"어, 태석이 아까 전화했어. 집 앞에 몬스터가 나타나서 못 나온대."

"아, 진짜요? 야, 태석이 형 집 앞에 나타났다는데?"

"뭐? 태석이 형 큰일이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사인지가 모두 돌았을 때 때마침 그룹장이 도착했다.

"자, 여러분들 소식은 다들 들으셨죠?"

"예."

"아, 정말 곤란한 상황이야.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생산도 밀려있는데, 허허…."

그룹장은 교육실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다들 마음이 급한 것 같으니까 빠르게 회의 진행할게요. 자, 다들 봤겠지만, 같이 한 번 더 볼게요. 자료 틀어봐."

윤호영 차장이 마우스를 딸깍 클릭하자 영상 하나가 재생된다. 오우거와 관련된 해외의 영상이 재생되자 사람들은 여느 때보다 집중해서 시청했다. 붉은 포털과 오우거의 등장. 교육실의 사원들은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러다 오우거가 몽둥이를 휘둘러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장면에서는 몇몇 사원이 공포 영화를 본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짤막한 영상을 끝으로 그룹장이 입을 열었다.

"자, 영상처럼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나라도 지금 저런 게 나타났다고 하니까. 어휴, 회사에 나타난다고 생각해봐. 이게 일이 되겠어? 그러니까 일단 생산은 멈췄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 지금 당장 회사 내부로 저런 게 들어온다고 해봐. 어떻게 막냐고. 누구 의견 있는 사람 손들어봐."

"..."

아마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저어…."

누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손을 들었다. 자재 관리 담당인 김지후 차장이었다.

"어, 얘기해 보세요."

"어…. 일단 집에 가서 있다가 군인들이 정리하면…."

"아니, 그럼 회사는 누가 지켜? 저런 게 회사에 들어와서 설비 다 부숴놓고 건물 무너뜨리면 생산은 어떻게 하냐고!"

그룹장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벙찐 채 그룹장을 쳐다봤다. 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푸하핫, 재밌네.'

나는 속으로 폭소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김지후는 재차 말을 이어갔다.

"일단 집에 가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우리가 회사에 남아있어봤자 저런 괴물이 쳐들어오면 막을 수도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회사를 지키라는 말씀은 죽으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아니라 이 상황을 해결할 방안을 얘기해 보자는 거잖아요!"

"아니…!"

사원은 재차 입을 열어 반문할까 하다 이내 닫아버린다.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실 보통의 회의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다들 처음 겪어보는 목숨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쉽사리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이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조 반장 류문상이 손을 들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룹장님."

"어, 류 반장."

"일단 김지후 프로 말대로 가족들이랑 떨어져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회사는 누가…!"

박승권이 또 큰소리치려 할 때 류문상이 말을 막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럼 가족들을 사내로 부르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회사 밖에는 저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족들을 회사로 불렀다가 오히려 오는 길에 괴물을 마주쳐서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M동의 이름 모를 사원이 류문상의 말에 반박하며 회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몇 차례 의견이 더 오고 갔지만 의견을 나눠봐도 이렇다 할 해결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에 회의는 흐지부지 끝을 맺었지만, 그룹장이 원하는 대로 회사를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고 오늘은 일단 생산 라인을 비가동하고 집에 돌아가서 상황을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거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콰앙.

"꺄악!"

불안한 생각을 하자마자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건 포성인가? 귀가 먹먹하다. 재차 이어질지도 모를 굉음을 차단하기 위해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이어플러그를 꺼내 귀에 꽂았다.

'안 좋은 생각은 왜 이렇게 잘 들어맞는 거야?'

"다들 빨리 나가세요! 아니 천천히!"

"그룹장님! 이쪽으로!"

사람들이 횡설수설하며 교육실을 빠져나간다.

콰앙.

교육실은 2층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이어플러그를 껴서 그럭저럭 참을 만했지만, 귀를 막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귀를 찢는 고통에 뒤늦게 귀를 부여잡았고 특히 여사원 중 몇몇은 혼비백산하다 못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억!"

척.

나는 계단을 굴러떨어지려는 목대승을 붙잡고 말했다.

"형. 괜찮아?"

"어, 어. 고마워, 현아."

"형 이어플러그 있어?"

"뭐, 뭐?"

"이어플러그 있냐고!"

"아, 아니!"

나는 내가 끼고 있던 이어플러그를 빼내 목대승에게 주었다.

"이거 끼고 있어."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나는 마나를 운용해 귀를 보호했다.

"난 괜찮아. 근데 여자들 좀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어?"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본 그는 계단을 채 내려오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

"흐아아앙!"

"너, 너무 무서워!"

나이 드신 누님들은 엄마의 강한 생활력 때문인지 이를 악물고 꿋꿋하게 내려갔지만 젊은 애들이 오히려 자포자기하여 울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윤이 챙길 테니까 형이 소진이 챙겨줘."

"어, 알았어. 야, 소진아, 뭐해! 빨리 가자!"

'이 자식들은 벌써 내려갔네.'

친구 놈들은 벌써 보이지도 않는다.

"하윤아, 가자."

"엉엉. 오, 오빠. 흐어엉. 모, 못 가겠어."

"귀 막아."

"엉? 자, 잘 안 들려. 히끅!"

나는 양손 검지로 귀를 막으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비로소 이해하고 귀를 막은 김하윤을 들쳐업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생각보다 묵직하잖아. 젠장, 상태창!'

나는 상태창을 열어 체력에 6, 마력에 4를 분배했다. 당장 힘을 강하게 하려면 근력을 올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마력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체력이 더 중요했다.

마나를 전신에 운용하며 탈의실까지 빠르게 뛰었다.

'여기까지 했으면 됐다.'

"하윤아, 옷 갈아입고 잘 도망가!"

"어, 엉. 고마워, 오빠!

콰앙! 쾅!쾅!

탈의실까지 오니 굉음이 더욱 커졌다. 포성 같은 굉음 말고 오우거가 내는 것 같은 커다란 폭음 또한 들려왔다.

'이거 안에 있는 게 안전한 거 아냐?'

일단 옷은 다 갈아입었는데 건물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출구로 향하자 다들 출입문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안 나가고 뭐 하세요!"

"모, 못 나가! 나갈 거면 너나 나가!"

제일 앞에 있던 사람이 나가지 못하고 어물쩍거리자 뒤에 있던 사람이 그를 제치고 출입문 앞으로 올라섰다.

"아이씨, 뭐 하는 거야…? 헉! 이, 이건 못 나가!"

입에 욕설을 머금고 올라갔던 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다시 내려왔다.

"나 원 참."

나는 그런 사람들의 행태에 고개를 절레절레 짓다가 중간쯤에 모여있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이 자식들. 나만 빼놓고 도망가?"

"어, 현아. 먼저 간 거 아니었어?"

"너 먼저 간 줄 알았지!"

"어휴! 말이나 못 하면."

뻔뻔한 연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친구들을 제치고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올라갔다.

과연.

"크와아아!"

"아오우우우우!"

문을 나서지 못할 만했다. 뭐야 저건?

밖은 사내로 쳐들어온 몬스터들과 전차를 동원한 군인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보스 몬스터는 영상에서 본 것처럼 오우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우거만큼 큰 키에 군더더기 없이 날렵해 보이는 근질의 몸을 붉은 털로 두르고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며 사자의 갈기같이 기다란 털을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몬스터. 놀 치프틴이었다.

[오우거]

­ 등급 : 2

­ 인간형의 중형 몬스터. 단독 생활을 하며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 뽑을 정도의 힘을 지닌 힘의 대명사. 힘만 세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순간적인 속력 또한 무시 못 할 수준.

[놀 치프틴]

­ 등급 : 2

­ 수인형의 중형 몬스터. 머리는 개. 몸은 인간에 가까운 수인형 몬스터 놀의 우두머리. 근력은 중형 몬스터 중 평범한 편이지만 타고난 민첩성은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

포탄에 맞은 듯 성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오우거들과 달리 놀 치프틴은 어디 하나 그을린 자국 없이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어 기다란 할버드를 휘둘렀다. 전차가 빠르게 포구를 돌려보지만 놀 치프틴은 포구가 완전히 돌아가기도 전에 도륙을 끝내고 유유자적 경쾌한 발걸음으로 전차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어느새 포구의 반대편에 나타나 또다시 살육을 자행하는 놀 치프틴을 포기한 전차가 한발 늦게 오우거를 바라봤을 때는 말 그대로 한발 늦은 후였다. 오우거의 손에 붙잡힌 포신이 젓가락처럼 구부러지고 뒤늦게 발사된 포탄이 전차 내부에서 폭발했다.

콰아아앙!

"끄아아악!"

"사, 살려줘!"

거대한 할버드에 몸이 토막 난 병사들은 몸에 흐르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 핏기가 증발해버린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지막 비명을 내질렀다.

"어, 엄마 나 살고 싶ㅇ…!"

콰직.

입술과 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던 젊은 병사의 머리가 놀 치프틴의 발뒤꿈치에 두부처럼 으깨지고 그로 인해 터져 나온 뜨거운 뇌수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흘렀다.

잡고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진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시리도록 아픈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낮게 울부짖었다.

"네놈들은 내가 모조리 찢어죽여주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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