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현실 (1)
* * *
천지가 개벽했다. 시작은 뉴질랜드와 피지라는 외딴 섬나라였다.
뉴질랜드와 피지의 각 지역에서 출몰한 포털은 몬스터라 불리는 괴물들을 쏟아내었고 몬스터가 나타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상태창이라는 정체불명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뉴질랜드와 피지로부터 시작된 이 기현상은 점차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각 나라 기준 오후 2시라는 점.
몬스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 전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고 사람들은 상태창이라는 미지의 힘과 군대를 동원하여 몬스터와의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오후="" 02:00=""/>
대한민국에도 포털이 등장했다. 포털은 도로, 산, 바닷가 등 건물 외부에서만 등장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뉴스가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뉴스를 신뢰하지 못했고 그 결과 도심은 오후 2시가 되자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도로에서 생긴 포털은 몬스터를 쏟아내며 도로를 마비시켰고 도로를 가득 채우다 못해 건물로 침투하기 시작해 회사에 출근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천안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정류장의 벤치는 앉아있는 사람이 없이 저마다 휴대폰을 보거나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는 등 소란스러웠다.
징징징징.
안전 안내 문자
[천안시청] 천안 포털 발생. 현재 포털 등의 괴현상으로 인해 건물 외부로 나가는 것을 삼가하….
[아산시청] 아산 포털 발생. 현재….
[산림청] 노태산 인근에 포털 발생….
저마다의 이유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연신 울리는 휴대폰을 보며 불안해했다. 그중 거대한 덩치를 지닌 남자 한 명이 자신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리며 눈앞의 이질적인 홀로그램 창을 쳐다봤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인과율에 의해 잠재 능력이 개화됩니다.]
[상태창을 여십시오. 상태창은 '상태창'이라는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 고대한
등급 : 1
능력치
체력 : 19 근력: 22 민첩 : 16 정신력 : 12 마력: 0
잔여 능력치 : 0
잠재 능력 : 거대화(9급)
능력 : 권술(9급)
* 거대화 : 신체 능력이 향상되며 신체의 크기가 커진다.
* 권술 : 주먹을 다루는 기술.
[상태창을 여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5가 지급됩니다.]
[지급된 잔여 능력치가 잠재 능력에 맞게 체력 5에 자동 분배됩니다.]
고대한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출근만 하려고 하면 피곤함이 몰려오던 몸의 피로가 갑자기 싹 가시며 전에 없이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 육신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재차 떠오르는 홀로그램 창을 바라봤다.
[현 시간부로 나라 '대한민국'에 튜토리얼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가 활성화됩니다.]
[퀘스트는 '퀘스트'라는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
[튜토리얼 잠재 능력 사용]
퀘스트 설명 : 개화된 잠재 능력을 외워 능력 발현.
퀘스트 완료 조건 : 잠재 능력 발현.
퀘스트 완료 보상 : 잠재 능력의 체화.
[튜토리얼 몬스터 처치]
퀘스트 설명 : 포털 속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를 종류에 상관없이 처치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 몬스터 처치 (0/1).
퀘스트 완료 보상 : 잔여 능력치 5.
"이게 무슨…."
사람들은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을 어지럽히는 상태창과 함께 나타나 이글거리는 푸른 포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포털에서 거리를 벌리며 허공에 나타난 상태창과 퀘스트라고 떠오른 창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나갈 여유도 없이 포털은 이윽고 무언가를 뱉어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키익.키익.
작은 녹색의 팔부터.
취익.취이익.
굵은 녹색의 팔까지.
그것들이 나타나기 전에도 상태창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웠던 버스 정류장이 삽시간에 혼란으로 가득 찼다.
"꺄악!!"
한 여성의 비명을 시작으로 버스 정류장에 같이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포털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정류장에는 고대한을 포함하여 5명의 인원이 있었는데 점차 윤곽을 드러내는 몬스터의 실체를 보고 거리를 벌리다 못해 정류장을 벗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팔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한 그것들은 이제 모두 빠져나와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고블린]
등급 : 1
인간형의 소형 몬스터. 작고 민첩하며 마비독을 자주 이용하고 무리를 이루는 특성을 지녔다.
[오크]
등급 : 1
인간형의 소형 몬스터. 인간과 육체적으로 능력은 비슷하지만, 지능은 떨어지고 무리를 이루는 특성을 지녔다. 후각이 예민하다.
키익?
취익!
모두가 도망쳐버린 버스 정류장에 홀로 남은 고대한은 멀뚱히 서서 몬스터들을 관찰했다.
'고블린? 오크?'
포탈에서 몬스터가 나옴과 동시에 생겨난 설명 창을 읽고 나자 몬스터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인간에게 고블린과 오크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고 인간은 그저 가볍게 손을 두 번 뻗었을 뿐이었다.
뻑.퍼억.
취이익….
키익….
고대한은 자신의 앞에 스러져 있는 고블린과 오크를 보며 생각했다.
'작고 약해….'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고블린과 오크의 머리를 걷어차자 몬스터들의 육체가 옅은 빛과 함께 으스러져 사라졌다.
"사라져 버리네?"
[튜토리얼 몬스터 처치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5가 지급되었습니다.]
상태창을 열어 잔여 능력치를 확인한 고대한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검과 동시에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착용하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고대한은 다시금 포탈 밖으로 나오는 고블린과 오크에게 주먹을 뻗었다.
퍽퍽.
끼에엑!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고.
"아, 여보세요? 반장님, 괜찮으세요?"
뻐억.
취이익!
<어, 난="" 회사야.=""/>
"반장님, 오늘 출근하나요?"
<어? 난="" 이미="" 출근했는데?=""/>
"아니, 밖에 이 난리인데 출근하나요?"
<음, 내가="" 위에="" 물어보고="" 공지="" 띄울게.="" 일단="" 출근할="" 수="" 있으면="" 출근해봐.=""/>
"아니…!"
뚜 뚜 뚜.
펑!
뿌엑!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빛을 휘날리며 사라져 버린 오크를 보며 같이 모습을 드러낸 고블린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인간의 눈치를 살핀다.
"아니이!!!"
고대한은 통화가 끊겨버린 휴대폰 화면을 황망하게 바라보다 자신의 앞에 조아리고 있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오르는 화를 담아 연신 오른손을 휘둘렀다.
"이 시국에 출근하라고?!"
키에에엑!
주먹을 휘두를수록.
꾸익! 꾸이익!
오히려 화가 더 났다.
고대한은 그새 또 포털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오크의 머리를 벽에 박으며 소리쳤다.
"비켜, 이 새끼들아!"
꼬끼오! 꼬끼오!
닭 울음소리에 나는 화들짝 깨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닭 울음소리는 내 알람 소리다.
"아아?!"
'돌아왔구나….'
익숙한 방안의 풍경에 안도하며 숨을 내쉰다.
꼬끼오오!꼬오끼오!꼬꼬꼬꼬 꼬끼오!
으, 정신이 없군. 나는 충전기의 선을 따라 충전기에 꼽힌 휴대폰을 들어 알람을 껐다. 오후 2시 30분. 내가 잠들기 전에 맞춰놓은 알람 그대로였다. 알람을 끄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이 느껴져 후다닥 베란다로 향해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을 봤다. 바깥에는 이미 사태가 터졌는지 길가에 멈춰선 차량과 그 차량 위에 올라탄 몬스터들이 보였다.
"와이씨. 뭐야."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이 비현실적인 일들이 사실은 현실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으며 등허리가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몬스터 중 하나를 유심히 보는데 등허리를 찌릿하게 만들던 긴장감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고블린.
"윽!"
고블린을 본 순간 갑자기 꿈속의 기억이 엉켜 들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니야, 나는 랑스가 아니야.'
나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내 눈앞에 일렁이는 창을 바라봤다.
[상태 이상으로 인한 미확인 기록들이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수락한다고 생각하자마자 창 몇 개가 떠오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일 위의 것부터 하나씩 읽어나갔다.
[현 시간부로 나라 '대한민국'에 튜토리얼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가 활성화됩니다.]
[퀘스트는 '퀘스트'라는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튜토리얼 잠재 능력 사용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잠재 능력이 사용자의 몸에 체화됩니다.]
'퀘스트.'
[튜토리얼 몬스터 처치]
퀘스트 설명 : 포털 속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를 종류에 상관없이 처치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 몬스터 처치 (0/1).
퀘스트 완료 보상 : 잔여 능력치 5.
꿈속에서도 퀘스트였는데 여기서도 퀘스트냐? 퀘스트 창을 치우자 가려져 있던 창이 하나 떠오른다.
[서브 고블린 부락 섬멸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몽환석 조각 1개가 지급됩니다. 수령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허공에 푸른빛과 함께 가로,세로 5센치, 높이 1센치의 반투명한 직육면체가 생겨났다.
'몽환석 조각? 이게 뭐지?'
의문과 함께 바라보자 새로운 창이 떠오른다.
[몽환석 조각]
설명 : 몽환석 조각이다. 5개가 모이면 몽환석이 된다.
'몽환석은 또 뭐야?'
나는 몽환석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음 창을 마저 읽었다.
[메인 홉 고블린 처치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다음 중 택 1.]
[롱 소드 & 라운드 실드, 롱 보우 & 화살, 아런 자경단 갑옷 세트, 돈(금화 2닢, 은화 10닢), 블루스톤.]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떠오른 것들의 이름을 보면 모두 내가 꿈속에서 랑스였을 때 한 번씩 몸에 착용한 것들이었다. 내가 보상창의 텍스트를 유심히 보자 선택할 수 있는 물건의 외형이 작게 그려진 상세 설명이 떠올랐다.
[롱 소드]
등급 : 9
설명 : 철을 두드려 만든 평범한 검. 한 손, 또는 두 손으로도 사용하며 취성이 강해 생각보다 쉽게 부러지는 내구성이 특징.]
[라운드 실드]
등급 :9
설명 : 철을 넓적하게 펴 만든 둥근 모양이 특징인 방패. 양산형의 방패지만 탄성이 강해 쉽게 깨지지 않는 내구성과 둥근 모양으로 인해 무기를 흘려보내기 쉽다는 것이 특징이며 튼튼한 내구성으로 인해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무기는 대충 두 개만 읽어봐도 롱 보우가 어떤 설명인지 알 것 같아서 패스하고 방어구와 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런 자경단 갑옷 세트]
등급 : 9
설명 : 아런 마을의 자경단에서 사용하는 갑옷 세트다. 천에 가죽을 덧댄 갑옷 세트. 상, 하의와 장갑, 장화, 투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투구는 철로 이루어져 있다.
[금화]
설명 : 금으로 만들어진 화폐.
[은화]
설명 : 은으로 만들어진 화폐.
'금이라….'
팔면 얼마나 나오려나? 금화 2닢과 은 10닢의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 잠시 생각해봤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골라야 할 건 이거니까.
[블루스톤]
등급 : 7
설명 : 마석과는 괘를 달리하는 마나 농축도와 마나 전도성을 가진 희귀 금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나 친화력이 상승하며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마나는 누구나 탐내는 영약이다.]
푸른색의 돌 그림 밑으로 쓰여 있는 상세 설명. 좋다는 건 알았지만 뭐가 어떻게 좋은 건지 잘 몰랐는데 설명을 보니 효능이 이해됐다. 일단 등급부터가 다르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블루스톤을 선택했고 그러자 물어오는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정말로 '블루스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내가 선택을 하자 허공에서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주먹의 반 정도 되는 푸른 돌이 하나 생겨났다. 두둥실 떠오른 돌을 집자 은은하게 빛나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블루스톤을 집어 들자 손끝에서부터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꿈속에서 보단 훨씬 희미한 느낌이었다. 사실 꿈속에서 깼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느껴보려 했지만 정말 1도 느낄 수 없었는데 블루스톤을 쥐자 꿈에서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블루스톤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마나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 유 현
능력치
체력 : 12 근력: 14 민첩 : 12 정신력 : 15 마력: 5
잔여 능력치 : 0
능력 : 입몽
상태창은 잠재능력란이 사라지고 능력란이 생겨난 것 말고는 입몽하기 입몽하기 직전에 봤던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보다는 확연히 낮은 능력치 때문에 내 몸은 원래 그대로일 텐데 체감상 힘이 빠진 듯한 느낌에 침대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한껏 펼쳤다.
"끄어어어!"
좀 살겠네. 이래저래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빠르게 사태에 적응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대로 블루스톤을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포갠 채 눈을 감았다. 공기 중의 마나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배와 손으로부터는 확실히 마나가 느껴졌다. 블루스톤은 내 손과 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연히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마나가 익숙지 않은지 쉽사리 블루스톤의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블루스톤에서 전해지는 감각에 차분히 집중하기로 했다. 마나를 느끼고 그 흐름을 몸속으로 유입한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에이씨!"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몸은 쉽사리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뭔가 미미하게 들어오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막혀있는 듯 마나가 몸에 들어오다 말고 흩어져버렸다.
"아!"
나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블루스톤을 코 쪽으로 가져다 대고.
"후웁!"
빨아들였다.
"오우, 좋다."
이제야 느낌이 훅 오네.
"흐읍, 하. 쓰읍, 하. 아, 맛있어!"
열려있는 구멍으로 쭈욱 빨아들이자 마나가 몸속으로 들어와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새롭게 흘러들어온 마나는 몸 안에 흩어져 있던 잔여 능력치로 올라간 5만큼의 마나와 뒤섞이기 시작했고 호흡법에 따라 호흡을 멈추고 호흡을 통해 딸려 들어온 마나가 몸 안의 마나와 잘 섞여 안착할 때까지 집중했다. 몸 안에 마나가 스며든다고 생각하며 마나를 느끼자 조금씩이지만 내부의 마나와 일체화되는 게 느껴졌고 천천히 호흡을 뱉으며 마나는 최대한 붙잡아두고 공기만 내뱉으려 애쓴다.
애썼지만 사실 쉽지는 않았다.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딸려 나가는 마나가 아쉬워 재차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숨을 참으며 안착시키는 일련의 과정에 빠져들어 갔다. 어떻게 보면 단지 숨을 쉬는 것뿐인데도 나는 그 작업에 빠져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다.
꺄악!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밖이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호흡법에 육체가 익숙해져 가며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던 찰나에 들려온 비명에 흐름이 깨진 것이다. 나는 몸에 느끼지는 마나에 성취감을 느끼며 호흡을 갈무리하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능력 : 재래식 호흡법을 습득하였습니다.]
어느새 시야 한 편에는 능력을 획득했다는 창이 떠올라 있어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마력이 하나 늘어 6이 되어있었다. 베란다에 서자 아파트의 주차장에 있는 한 차량에 고블린 네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고 그 안에 아마도 비명의 주인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도 안 도와줘?
창을 통해 다른 집을 보자 다른 집들도 커튼 사이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인지 밖에 돌아다니는 몬스터가 많이 줄어들어 차량에는 고블린 4마리가 다였지만 비명소리에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올 것 같았다.
'에이,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겠지. 아니면 뭐, 가족들이 도와주겠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나 자신과 타협하며 침대로 가 다시 누웠다. 그렇게 한 10초를 누워있었을까?
꺄아악! 도와주세요! 으헝헝! 엄마, 아빠!
"..."
벌떡.
아니, 진짜! 왜 아무도 안 도와주냐고.
나는 츄리닝을 대충 입고는 왼팔에 프라이팬을 테이프로 고정하고 오른손에 식칼 하나를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1층입니다.
1층에 도착하자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더욱 생생히 들려왔다.
"엄마! 아빠!"
문이 열리자 공동 현관 안쪽에 7층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보였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각자 식칼과 골프채를 든 채 출입문을 열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공동 현관 앞에도 고블린 4마리가 문 앞에 서서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위협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차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아마도 7층 부부의 딸인 듯싶었다.
어쨌든 이러면 상대해야 할 고블린이 4마리가 아니라 8마리잖아. 위에서는 공동 현관까지 보이지 않아서 몰랐다.
'아이고, 다시 올라가야겠다.'
나는 7층 부부와 일면식이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스리슬쩍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힙니다.
"자, 잠깐만요!"
"어억! 왜 이러세요!"
닫히는 문 사이로 7층 아주머니가 손을 집어넣었는데 하필이면 그 손이 식칼을 들고 있던 손이라 나는 불쑥 내 앞을 찔러 들어온 칼을 보며 기겁을 했다.
"제발, 저희 딸 좀 구해주세요!"
"아악!"
나는 프라이팬으로 다가오는 칼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 전에 그 칼 좀 치워주세요, 제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