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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2화 (2/62)

〈 2화 〉 입몽(?夢) ­ 꿈속에 들어가다. (1)

* * *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꿈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꿈이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 곱씹으며 관찰할 뿐이었다.

꿈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의 세계. 의식을 토대로 자랐지만 무의식의 세계인 꿈에서는 의식에서 경험한 말도 안 되는 것들. 예를 들면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들마저 구현해내는 비현실의 극치였다. 비현실의 세계답게 역설적이고 때론 외설적이며, 괴이하고 신비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그 몽환의 세계를 관찰하는 게 내 소소한 일상이자 취미가 돼버렸는데 그런 내 일상에 다른 무언가가 침범해 버렸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인과율에 의해 잠재 능력이 개화됩니다.]

[상태창을 여십시오. 상태창은 '상태창'이라는 생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상태창?'

무심코 생각하자마자 정신없이 뭔가가 떠오르며 시야를 한껏 채운다.

[상태창]

­ 이름 : 유현

­ 등급 : 1

­ 능력치

체력 : 12 근력: 14 민첩 : 12 정신력 : 15 마력: 0

­ 잔여 능력치 : 0

­ 잠재 능력 : 입몽

* 입몽 : 꿈속으로 들어간다.

[상태창을 여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잔여 능력치 5가 지급됩니다.]

[지급된 잔여 능력치가 잠재 능력에 맞게 마력 5에 자동 분배됩니다.]

내 꿈 위에 어지럽게 덧입혀진 이 창들은 대체 뭐지? 나는 몽롱한 상태로 내 꿈의 한복판에 떡하니 떠오른 문자들을 읽어나갔다. 그 홀로그램 메시지를 읽어나갈수록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에 몽롱한 정신이 조금씩 깨는 것 같았다.

아, 이것도 꿈의 일부인 건가?라고 하기에는 주변의 흐릿한 꿈속 풍경에 비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선명한 문자들이 묘한 위화감을 계속해서 가중시켰다. 읽을 것은 그리 많지 않아 금방 마지막까지 읽을 수 있었다.

'입몽, 꿈속으로 들어간다?'

이게 무슨 말……!

생각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터지며 내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키익! 키이익!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비명소리. 그와 함께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와 짙은 숲내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얼굴 가려!"

"뭐하는 거야! 랑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머리를 강하게 눌렀고 눌러진 내 머리 위로 연신 쇳소리가 울리며 무언가가 연속으로 튕겨져 나갔다.

"흡!"

온갖 냄새가 섞인 공기는 너무도 역해서 호흡을 무겁게 만들었으며 갑작스레 다가온 익숙지 못한 환경은 그 무거워진 숨을 쉬는 것조차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으랴아압!"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고함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이 치워졌다.

손이 치워지자마자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광경을 본 순간 내가 모르는 기억이 썰물처럼 밀려들어왔다.

"크윽!"

나는 찌릿한 통증이 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새 부릅떠진 눈은 무엇 때문인지 온몸의 피가 쏠린 것처럼 힘이 들어가 순식간에 뻐근해졌다. 바위와 나무 뒤편에 숨은 채 작은 대롱으로 마비침을 쏘아대는 녹색 괴물들. 그 괴물들을 보면 볼수록 더욱 가빠지는 호흡과 함께 처참하고도 비참하던 어떤 기억이 눈앞의 녹색 괴물들과 오버랩되며 내가 꿔온 어떠한 악몽보다도 더 끔찍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핏물처럼 번져나갔다.

키이이익!

피로 물든 방안에 차게 식어있는 부모님과 동생의 시체. 그리고 그 시체에 올라타 내 가족의 신체에서 뼈와 살을 분리해가며 우걱우걱 게걸스럽게 살점을 뜯어먹고 있는 녹색 괴물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힌다. 순간 발끝에서 아니 그보다 더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피가 머리끝까지 뜨겁게 치솟아 올랐다.

빠드득.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 빌어먹을 고블린 새끼들!!! 오늘 다 죽인다!!!"

녹색 괴물, 고블린 무리를 향해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토해내며 미친 듯이 뛰어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빠르게 그리고 힘차게 움직이며 몸 안에서 분출된 분노가 어느새 쥐고 있던 내 검을 타고 올라가 푸르스름한 기운을 이글대며 뿜어댔다.

"대열 지켜!"

누군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내 몸은 본능에 이끌려 움직인 후였다.

고블린 무리로 뛰어들어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의 목을 향해 휘두르자 녀석의 목은 검이 닿기도 전에 푸른 기운에 닿아 잘려나가며 피분수를 내뿜었다. 뜨끈한 피분수가 내 얼굴을 적셨지만 오히려 내 열기를 식힐 뿐이었다. 피 같은 건 지금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혀로 핥으며 반쯤 녹색으로 물든 눈을 광기로 채워나갔다.

광기의 시선이 내 왼편에서 왼쪽 허벅지를 노리는 듯 단검을 휘둘러오는 고블린을 보는 동시에 자세를 낮추며 왼손의 방패를 들어 어깨에 견착한 채 땅을 강하게 디뎠고 체중을 실은 실드 어택에 왼 편에 위치하고 있던 고블린 하나가 자신이 휘두르던 단검과 함께 하늘을 날았다. 나는 물 흐르듯 다시 한 발짝 땅을 디디며 허공에 뜬 고블린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즉사하였는지 축 늘어진 고블린을 방패로 밀어내며 고블린의 가슴팍을 찢고 들어간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다시 한번 피분수가 터져 나오며 축 늘어진 고블린의 육체가 땅에 스러진다. 바닥에서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는 고블린 두 마리를 뒤로한 채 굶주린 야수처럼 고블린이라는 먹이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한 놈의 목을 베면 다음 녀석의 심장을 찔렀고 그다음 녀석의 사지를 잘라내었다.

그와 동시에 대열을 이탈한 대가로 고블린 무리에게 좋은 과녁이 되어버린 내 몸 곳곳에는 마비침이 꽂혀있었고 그로 인해 마비독이 스며들어 몸 이곳저곳의 감각이 둔감해졌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내 심장은 더욱 빠르게 펌프질하며 혈액을 온몸으로 흘려보냈고 혈액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은 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하며 산소를 태워대고 있었다.

오늘 저 추악한 고블린들을 모조리 죽여 고블린이라는 것들의 씨를 말리겠다!

"으아아아!"

이성이라는 게 마치 사라진 것처럼 오로지 분노만 가득한 채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싸움, 아니 일방적인 학살은 금방 끝났다. 대열을 이탈한 내가 고블린의 대열을 흩트려놓았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나를 피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려는 녀석들을 다른 사람들이 착실하게 제거했기 때문이다. 조우한 고블린의 수가 많지 않았기도 했고.

다만 학살이 끝나고도 내 분노는 사그라들 기색이 없어서 숨통이 끊어진 놈들의 시체를 마구잡이로 쑤셔댔다. 그러고도 주체를 못 하고 숲 깊숙이에 존재할 고블린 부락을 향해 뛰어들어가려 했는데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으며 숲속으로 뛰어들어가려던 날 멈추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뿌려치며 팔꿈치를 휘두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내 기억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 탓이었다. 나는 내 몸에 강력한 경종을 울린 주인을 바라보았다.

"랑스!"

"…."

랑스.

그래, 내 이름이 랑스... 가 아닌데? 내 이름은 유현인데. 여긴 대체, 지금 이 상황은 다 뭐지? 이건 꿈이어야 할 텐데... 이 기억은 대체 뭐지? 너무 생생한 기억들... 지금도 떨리고 있는 이 손은 대체 뭐냐고! 나는 본래의 내 기억과 랑스라는 또 다른 기억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의 충돌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지자 머리에 씐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고 나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머릿속이 개이며 숨도 한결 편히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괜찮나?"

'아차.'

내가 머릿속으로 뒤엉킨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굵고 안정적인 저음의 음성이 재차 말을 걸었다. 뭐라고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집중하며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자경단장님."

말을 하면서 속으로 흠칫했다. 마치 군 시절로 돌아간 듯 딱딱한 어투의 말이 입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다니.

자경단장, 아던.

아던 마을의 자경단장이자 전(?) 아던 용병단의 용병단장이자 현(?) 아던 마을 촌장을 겸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주신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비록 기억 속의 나는 과거의 상처 때문인지 그를 살갑게 대하고 있진 못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가족처럼 대해준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나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인물로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육중한 체구는 나이를 초월한 우람한 근육들이 육체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고 구릿빛 피부와 말끔하게 민 머리, 몸 이곳저곳에 난 크고 작은 흉터들이 그가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던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경단원들을 살폈다.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은 없었고 그나마 두드러지게 부상을 입은 사람은 나 혼자인듯했다. 애초에 고블린 부락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찰병들인지라 다칠 일도 아니었고 내 실력 자체도 고블린 따위에 다칠만 한 실력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기억의 오버랩으로 인한 급발진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만 것이다. 물론 나에게 당한 고블린들의 사체는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끔 흉측하게 파쇄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말이다. 쯧, 저런 상태라면 가죽도 제값을 못 받겠군.

"안 그러더니 왜 그래? 갑자기 옛 생각이라도 떠오른 게냐? 네 몸을 봐라."

"……죄송합니다."

아던의 말대로 내 몸 곳곳에는 마비침 십 수개가 꽂혀있어 그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 같았다. 크흠, 죄송하단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네.

멋쩍은 미소를 짓자 아던이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딸아이가 보면 또 한소리 하겠군."

딸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또 다른 기억 하나가 스며 들며 날 걱정하는 듯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떠오르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뒤로한 채 마비침을 하나씩 뽑아내었는데 다행히 입고 있던 가죽을 덧댄 천 갑옷 덕분에 마비침이 깊게 박히진 않아서 쉽게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의 수통을 풀어 상처 부위에 물을 흘려보냈다. 흘러내려가는 물과 함께 고통이 뒤따를까 싶었지만 마비독 때문인지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쉽사리 마비침을 다 뽑아내고 난 후에 가죽 주머니에서 약초를 으깨만든 새하얀 고약을 꺼내어 상처에 찍어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일련의 과정을 끝내자 다른 단원들은 이미 고블린들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두고 채비를 마친 후였다.

"다들 주변을 정리하고 마을로 돌아간다!"

"예!"

아던의 외침을 끝으로 나와 자경단원들은 주변의 핏자국을 흙으로 덮어 수습한 뒤고블린의 사체를 두세 구씩 둘러메고마을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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