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Epilogue. 피카레스크 (1) >
***
장로회의 사이버 공간에 셰이머스 폴란과 프랜시스 다윈이 알파와 함께 있다.
알파의 아바타를 쓰는 트랜센던서는 장로회에서 베타와 감마, 각각 서열 2위와 3위인 두 사람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권력의 정점과 생물의 정점이라는 자네들도 언젠가 로페즈에게 정점을 추월당할 것이네.”
폴란은 곧바로 수긍한다.
“예. 사실 로페즈가 드레이크의 지도자가 된 순간부터 전 이미 추월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 재단의 생물학적 기술력을 제외하고는 전부 압도당했죠. 영향력이나 재력이나 인력이나···. 그 어려운 인조인간 기술과 브레인 업로드 및 다운로드 기술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마저 생길 지경입니다.”
“뉴 아크 코퍼레이션이라고 하지. 기업과 재단이 합쳐진 인조인간 조직이 전 세계의 차원통로를 관리하네. 이미 이 세계는 로페즈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말이야. 어쩌면 나와 대등할 정도로···.”
“오오······. 그 정도입니까.”
트랜센던서는 분명히 전달한다.
“감마, 자네도 시급히 로페즈와 만나서 손을 잡는 편이 좋겠어.”
“아, 제가 현실에서 로페즈와 만나도 괜찮다는 말씀이신지요?”
“명령이지. 자네들은 앞으로도 로페즈와 긴밀히 협조할 필요가 있네. 베타, 자네도 마찬가지고.”
알파를 신으로 생각하는 폴란과 알파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다윈이 그 뜻을 감히 거부할 리가 없다.
“예.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아들었습니다.”
“알파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저희가 언제 알파 님의 뜻을 의심한 적이나 있었습니까. 하하.”
“그는 내가 후계자로 점찍은 사람이네. 장차 자네들의 윗사람이 될 인물이라 생각하고 겸허히 마주하도록.”
“예. 알파 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리하여 로페즈는 프랜시스 다윈의 초대를 받아 네메아 항성계의 오펠테스 구름에 방문했다.
태양계의 오르트 구름처럼 자그마한 질량이 드넓게 분포된 오펠테스 구름의 어느 한 곳에 다윈 재단의 시설이 있었다.
완성된 유토피아의 세 배는 될법한 크기의 거대한 콜로니에 우주정거장, 연구소, 대규모 실험실, 하이퍼 컴퓨팅 시설 등이 결합된 다윈 재단의 본거지이자 본사. 정식 명칭은 ‘아포프톨로지(Apoptology)’라고 한다.
이곳에 옵시디아몬의 함선이 정박했다.
“저도 알파 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후계자가 되실 분이라고 하셔서 있는 힘껏 대접해드렸는데 어떻게,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프랜시스 다윈은 로페즈가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신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나이는 35세, 축 처진 눈매가 졸린 듯한 인상을 만들고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검은 머리칼과 수염을 꼬아서 땋은 스타일이다. 그리고 현대식으로 정장처럼 개량된 황토색 토가를 입고 있다.
고대의 천문학자와 중세의 해군 제독이 합쳐진 듯한 차림, 생김새는 신비하면서도 지적인 느낌.
생체병기를 다루는 다윈 재단의 리더인데 가까이서 직접 보니 상상했던 이미지와 괴리감이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실내는 개방감이 느껴진다. 다윈의 자리와 로페즈의 자리는 하나의 긴 테이블을 두고 서로를 같은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거창하게 수놓인 고급 요리들을 다윈 재단의 사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치우고 커피와 디저트를 놓는다.
“이렇게나 대접해 주셨는데 입맛에 안 맞을 리가요. 하하. 다 못 먹어서 아쉬울 정도네요.”
“알파 님께 듣던 대로 아주 훌륭한 인품이시군요. 아, 혹시 아십니까? 알파 님께서 우리······. 실례지만 제가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름도 괜찮고 관리자도 괜찮아요.”
“로페즈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게 더 친숙한 감이 있어서. 하하하.”
“네. 저는 다윈 님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여기 사람들은 절 ‘수장’이라고 부릅니다.”
“수장님이라. 다윈 재단에 어울리네요.”
로페즈는 다윈이 준비한 커피를 몇 모금 마신다. 그러자 시야의 한쪽 구석에 로페즈의 눈에만 보이는 텍스트가 작게 출력된다.
「성분분석 완료」
「나트륨 17㎎」
「탄수화물 2.6g」
「당류 0.2g」
「지방 0.3g」
「단백질 0.5g」
「원산지 불명의 커피 고형분과 합성착향료로 구성된 블랙커피의 일종」
「······검색 결과. 시중에서 판매된 기록이 없는 성분 비율.」
“먹어본 적 없는 맛이네요.”
로페즈가 그렇게 말하자 다윈은 놀랍다는 듯 축 처진 눈매를 밀어올린다.
“오, 입맛도 고급이시군요. 그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맛은 똑같은데 향만 조금 특이한 블랙커피 같다.
「합성착향료는 석류 추출액으로 분석됩니다.」
“석류 향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요. 맛도 미묘하게 달라서 솔직히 자세히는 모르겠고···.”
“저희 재단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기른 커피나무에서 열매를 딴 겁니다. 이게 통상의 커피 열매보다 재배 속도가 빠르고 맛도 더 진하죠. 우리 주방장이 고심 끝에 이 커피가 석류 향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아하. 어쩐지.”
“농부 한 명 없는 저희 재단에서 새로운 먹거리가 탄생한 겁니다. 하하! 재밌지 않나요?”
‘관심 없다.’
다윈은 로페즈와 친목을 다지려는 듯 이런 이야기도 하는 것 같지만,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 게 로페즈의 마음이다.
“재밌네요. 저는 여러모로 다윈 재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저번에 보여주신 생체 함대의 위용을 잊을 수가 없었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로페즈 님의 옵시디아몬은 한참 전부터 인조인간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최근엔 사이버브레인 관련 기술까지 자체적으로 개발하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알파 님께서도 칭찬 일색이랍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본론의 궤도에 올랐다.
“그래도 제가 만든 인조인간 같은 것은 세상에 보여주기에 좀 부끄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라곤 했지만 어쨌든 금기는 금기니까요.”
인조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조인간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예민한 주제.
그것에 당당하지 못한 로페즈의 모습.
다윈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금기가 맞죠. 맞는데,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아니지, 그냥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로페즈 님 앞에서는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하기가 싫네요.”
“얼마든지요. 수장님과 제가 굳이 현실에서 만난 게 다 진중한 대화를 위해서잖아요?”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솔직히 로페즈 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필요악’이었습니다. ‘절대악’에 대항하는 인류의 필요악. 만약 로페즈 님께서 절대악에 대항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렸다면 지금쯤 인류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나쁜 꼴은 면치 못했겠죠.”
“불법으로 여겨졌던 우리 재단도 인류의 생명기술발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아, 저번 전쟁 때 알파 님께서 저보고 UNF에 합류하라고 하더군요. 뒤처리는 다 알아서 해주시겠다고. 그래서 있는 힘껏 활약했더니 인식이 싹 바뀌었습니다. 금기는 금기고 불법은 불법이지만 어쨌든 우리 재단이 하는 일은 인류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거죠.”
“저도 그 생각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다윈은 솔직해졌다. 상대가 로페즈라서.
“인류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감내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인류의 관점인가요? 꽤 넓게 보시네요.”
“전쟁과 약탈이 없었으면 군대와 경찰이, 치안이라는 개념이 있었겠습니까. 마녀사냥이 없었으면 오늘날 종교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알았겠습니까. 동물실험, 인체실험이 없었으면 의학이 있었겠습니까. 핵폭탄이 없었으면 오늘날 핵융합이 있었겠습니까. 독재가 없었으면 자유의 중요성을 알았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로페즈의 눈은 그가 진실을 고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동안 음지에 숨어살면서 응어리가 좀 생긴 모양이다. 다윈은 그 능력에 비해 처지가 항상 어두웠으니.
로페즈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오가는 동안, 다윈은 계속 어두운 면에서 끙끙 앓고 있었으리라.
“이 세계에 그런 이야기를 토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보편적으로 잘못된 것이든 올바른 것이든,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이죠.”
‘아무튼 내가 이제부터 할 제안에 부정하겠다는 입장은 아닌 것 같네.’
로페즈는 옅은 미소를 지어준다.
“악이 있었기에 더 큰 악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 뜻이네요.”
“예. 그렇죠. 이 세상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 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영향력이 작은 사람은 경쟁을 하면서 남을 밟고, 영향력이 큰 사람은 움직이는 도중에 밟아버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현실이니까요.”
“손에 피도 묻히고 똥도 묻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밝은 면의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로페즈 님과 저처럼요.”
다윈은 자신과 로페즈 사이에 공통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