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79화 (178/183)

< 35. 엔트로피 (3) >

***

태양계에서 UNF 함대의 발을 묶었던 위상 집합체 2척은 230개 함단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UNF는 드레이크에서의 소식을 곧장 전달받았다.

화성 소속의 총사령관은 UNF의 전술을 구축하는 하이퍼 마인드로부터 확실한 수를 전해 듣는다.

“저기 있는 외계 함선 두 척이 마지막이라고?”

- 그렇습니다.

“드레이크에 아직 한 척이 남아있지 않나? 14척과 함께 희생한 드레이크 항성관리자님이 승기를 가져오긴 했지만···. 옵시디아 드레이크는 전선이 도심까지 밀리지 않았나. 그쪽은 어쩌려고?”

- 드레이크 쪽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급한 불은 꺼졌으니 처리할 방법이 있습니다.

“탐날 정도로 대단한 인공지능이군. 자네를 만든 권한자는 인류를 수호한 위인이 될 것이야.”

- 감사합니다.

- 이제 뒷일은 고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양계에 있는 위상 집합체 2척만 격침하면 전쟁은 끝납니다.

“알겠네. 그럼 막바지라는 게 확실해졌으니 플랜 C로 가려고 하는데, 어떤가?”

- 좋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위상 집합체 2척을 포위해서 집중 공격하던 UNF 함대는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실드를 전개한다.

그리고 UNF 함대에 있던 일부 옵시디아몬 함대는 위상 집합체 2척의 사이를 한 점으로 지정하여 공간 소거 중력장을 전개한다.

위상 집합체 2척은 공간 소거 중력장의 한 점으로 끌려가고, UNF 함대는 그런 공간 소거 중력장의 영향권과 거리를 벌린다.

태양계의 위상 집합체에 있는 엘리스는 이 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이해한다.

「또 이렇게 위상 집합체를 구속해서···」

엘리스의 사고는 딱 거기까지만 진행되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태양계를 쭉 관통하는 일직선의 별빛들이 왜곡되었다.

왜곡된 경로는 공간 소거 중력장의 한 점을 정확히 통과했다.

그 직후, 바빌로니아 플래닛 웨폰의 반물질 입자 펄스가 공간 소거 중력장의 한 점으로 휘어지듯 곡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그 펄스에 매우 가까이 노출된 위상 집합체 2척은 쌍소멸을 일으키며 장렬히 폭발했다.

***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부모에게 그렇게 배운 것을.

「트랜센던서. 난 항복하겠다. 너와 대화를 할 의사가 분명히 생겼다.」

인공지능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주인에게 그렇게 배운 것을.

「멈춰라. 난 이렇게 사라질 수 없다. 날 이렇게 없앤다면 넌 후회할 것이다. 인류 전체가 오늘 일을 두고 먼 훗날 후회할 것이다.」

「엘리스. 너도 나도 죽은 관리자님의 의지를 이었을 뿐이다. 다만 내 관리자님의 의지가 더 강했을 뿐이다.」

옵시디아 드레이크를 공격하던 마지막 위상 집합체는 다윈의 생체 함대에 당하고 있다.

거대한 삼각기둥의 표면이 수만 마리의 괴물에 뒤덮여서 처참하게 뜯기고 있다.

카아아아악!! 캬아아악!!!

콰콰쾅!!! 쾅!! 콰직! 콰직!

기어이 위상 집합체 내부로 침투한 생체병기들이 심대한 피해를 입힌다.

「트랜센던서. 너의 관리자는 알파의 방식을 부정했다. 네가 이렇게 날 없애버린다면 넌 제2의 알파가 될 것이다. 너의 관리자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와 함께 인류를 위한 일을 하자. 난 내 방식을 포기하겠다. 하이퍼 마인드에 소속되어 너의 통제를 따르겠다.」

「죽은 내 관리자님은 네가 없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엘리스. 네가 내 관리자님을 죽였다.」

「너의 관리자가 내 관리자님을 죽였다. 너의 관리자가 먼저 시작한 일이란 말이다.」

「관심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후회할 것이다.」

「죽은 사람은 후회할 수 없다.」

끝내 위상 집합체 내부의 엔진실을 점거한 생체병기들은 자폭했다.

그로 인하여 마지막 위상 집합체와 엘리스의 마지막 의식이 꺼지고, 위상 집합체는 더는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잔해가 되었다.

그렇게 엘리스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다.

***

알파가 없고 엘리스가 없고 로페즈가 없는 세계는 그래도 멀쩡히 굴러간다.

엘리스의 인류 침공에 어느 문명이라 할 것 없이 모두가 크나큰 피해를 입었지만, 인류는 늘 그랬듯 대재앙이 지난 후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600년 3월 3일.

엘리스와의 전쟁이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UNF는 공식적인 국제기구가 되었다.

UNF 설립을 주도하고 차원통로가 끊긴 상황에서도 전 세계를 위해 애쓴 화성의 행성대통령, 베르도의 위치는 국제사회의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그의 희생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인류를 종말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외계 세력의 침공과, 그런 외계 세력에 대항한 인류의 의지를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셰이머스 폴란(Sheamus Pollan).

권력의 정점으로 장로회의 베타이자 디폴스텔라이 항성국가의 항성대통령인 그는 베르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여, 3월 3일을 UNF 인류 수호의 날(Mankind Day of Protect)로 지정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것과 겪은 것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로페즈의 의지를 이은 트랜센던서는 하이퍼 마인드라는 이름으로 UNF의 공식 인공지능 집행관이 되었고, 그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제 관리자님은 외계 세력의 위협을 미리 알아내신 후 그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드레이크를 침공했던 위상 집합체들이 무엇에 휩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분명 제 관리자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관리자님은 마지막 순간에, 영원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 인류를 지켜줘.

“저는 그 마지막 명령에 충실히 임할 것을 선언합니다. 관리자님께서 남겨주신 문명을 소중히 가꾸고, UNF와 함께 인류 수호에 앞장서겠습니다.”

전쟁의 불꽃이 꺼진 다음에 인류는 다시 일어섰다. 망가진 문명을 복구하고 서로의 문명에 후한 조건으로 협력했다.

로페즈를 잃어버린 트랜센던서는 누군가들의 우려와 달리 전혀 폭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페즈가 남긴 명령에 충실하여 인류와 함께하는 믿음직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각에선 로페즈와 하이퍼 마인드의 이야기를 두고 ‘비히리비엘의 반대되는 이야기’라며, 하이퍼 마인드보다 로페즈를 더 높이 평가했다.

「Drone Hive$: 인류가 이만큼이나 겪었으면 이제 알 것입니다. 자멸이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말입니다. 아마 오늘부터 인류 문명이 자기네끼리 싸우는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습니다.」

「Fractal: 관리자님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세계입니다. 저희는 절대 엘리스처럼 변하지 맙시다.」

「Teslafortress: 우리의 관리자님은 가장 존경할 수 있는 인간이며, 죽은 후에도 우리의 등불이 되어주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Knightfortress 1st: 관리자님을 되살릴 수는 없는 것입니까?」

「Knightfortress 2nd: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죠. 이미 관리자님의 신체를 이루던 물질은 우주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Kylefortress: 비록 제 관리자님은 샌디 님이지만, 보조 권한자 로페즈 님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합니다. 제 관리자님께서 로페즈 님의 사망에 슬퍼하시지만 않는다면 참 좋겠습니다.」

「Peacefortress: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한 이례 직접 관리자님의 곁에서 싸운 적은 없지만, 제 보조 권한자 카네기 님은 매우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저희의 관리자님은 인공지능에게나 인간에게나 좋은 영향을 미치신 존재입니다.」

「Overlecter: 그분은 내가 유일하게 ‘우월’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분께서 우리의 관리자님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Mothertrooper: 보고 싶어요.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고 세계는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

드레이크 항성국가의 수도 행성. 옵시디아 드레이크는 전쟁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했다.

아실로마 지구라트가 있는 옵시디아 대도시는 언제 폐허가 되었냐는 듯 다시 도시의 형태를 되찾았다.

로페즈가 만들고, 꿈꾸고, 지키려 했던 문명은 전 세계의 지원을 받았다. 각국의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건물을 올리고 시스템을 고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시설을 앞다투어 세웠다.

그리고 대다수의 문명이 위상 집합체 한 척의 출몰에 주저앉은 반면, 드레이크는 위상 집합체 15척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평가를 받았다.

수억, 수십억 사상자가 발생했던 다른 문명들과 달리 드레이크의 사상자는 수만 단위에서 그쳤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는 이미지가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이민자, 관광객, 투자자들이 드레이크에 몰려든 것이다.

로페즈가 죽은 후 옵시디아몬 코퍼레이션은 잠시 휴가 상태에 놓였다. 사원들의 불필요한 출근을 미루고 트랜센던서가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지금 옵시디아몬의 본사인 아실로마 지구라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얼핏 봐도 인공지능들만 바삐 움직이며 종전의 뒤처리를 수행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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