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엔트로피 (2) >
***
- 대답은?
“야 이 씨발년아.”
엘리스가 아무리 천국을 논해봤자 당장 로페즈의 눈동자에 들어온 세계는 지옥이었다.
- 고작 그런 게 대답인가? 역시 인간의 의식 수준은 수정이 필요···
“그때 내가 은하계 중심에서 말했지, 널 끝까지 쫓아서 방해할 거라고.”
- 확실히 그래 보인다. 넌 언제나 그랬다. 예전에도, 지금도 날 방해하고 있다.
드레이크에 프랙탈 함대와 로페즈가 등장한 순간부터 이미 엘리스는 목표를 바꿨다.
- 오늘 널 없애버리겠다. 네가 있어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도 너한테 마냥 당해줄 생각은 없어.”
태양계에서 벌어진 전쟁, 제록시스 군주, 거대기업 가이우스, 엘리스, 장로회.
오래전부터 수면 밑에서, 혹은 수면 위에서 대립했다.
그 끝에 흑막의 실체와 충돌하는 날이 기어코 온 것이다.
***
“엘리스는 날 목표로 삼았어.”
- 위상 집합체 15척 중 14척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옵시디아 드레이크 행성 근처에 있던 위상 집합체 15척 중 14척이 프랙탈 함대로 접근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엘리스는 로페즈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지만 로페즈는 이를 가차 없이 걷어찼다.
그리고 엘리스는 당연히 로페즈를 최우선적으로 죽이려 한다. 아마 로페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내가 이대로 우리 행성에 가선 안 돼. 내 문명을 전장으로 삼을 수는 없어."
- 사전에 말씀하신 그 좌표로 이동하십니까?
“그게 최선이겠지.”
프랙탈 함대는 위상 집합체 14척의 추격을 받으며 드레이크 쌍성계 안을 나아간다. 그렇게 프랙탈 함대가 도착한 위치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이었다.
옵시디아 드레이크 행성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으며, 주변에는 행성도 혜성도 자그마한 소행성조차도 없는 휑한 위치다.
이 위치라면 얼마나 저항하든 행성이나 도시가 피해를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위상 집합체의 침공으로 인해 전선이 아실로마 지구라트까지 밀린 행성은 바쁘다. 그 행성을 지키려고 궤도에서 싸우는 함대들도 바쁘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좌표로 이동한 프랙탈 함대는 14척의 위상 집합체를 동시에 상대하는 위기에 처했다.
- 계산 결과, 절대적으로 위험합니다. 이건 부적합한 판단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
- 옵시디아 드레이크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빌리는 편이 좋습니다.
“저 위상 집합체들이 우릴 쫓고 있어. 행성 근처에서 싸웠다간 우리 문명이 파괴될 거야.”
- 상정한 사태 이상의 위험입니다.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관리자님의 목숨은 지켜야 합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트랜센던서는 계속 설득한다.
그러나 로페즈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야. 이 싸움엔 인류 전체가 걸려있어.”
- 제가 분명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상보다 엘리스의 전력이 강대하다는 점입니다. 위상 집합체 15척은 관리자님께서 예상하신 적 전력이 결코 아닙니다.
“맞아.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했어. 위상 집합체가 저렇게나 많았으리라곤.”
- 안 그래도 위험했던 싸움이 더 위험해졌습니다. 실은 위험하다는 말도 부정확합니다.
- 저는 이 전쟁의 승패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관리자님의 생존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내 생존보다 승리하는 게 중요해.”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질문은 내가 했어. 인류 전체를 포기해서라도 내가 왜 살아야 하냐고. 대답해.”
그러자 트랜센던서는 간단히 답한다.
- 당신이 제 관리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물어보자.
“내가 이렇게 싸우다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예전에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관리자인 자신이 죽으면 트랜센던서는 뭘 할 것이냐고.
- 인류를···
“내가 죽어도 넌 인류를 지켜야지. 안 그래?”
- ···.
“내가 죽어도 넌 인류를 지킬 거야. 알파나 엘리스의 방식이랑은 달라. 넌 내 방식을 배웠고, 내 가치관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 넌 네가 납득할 수 없어도 내가 무슨 방식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잖아?”
- 알고는 있습니다.
“이건 내 의지야. 등 떠밀려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 인류가 엘리스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관리자님은 생존하셔야 합니다. 우선은 생존할 길을 모색하신 후 엘리스의 체제에 순응하거나 반격의 기회를 도모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십시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감정에 휘둘리던 때는 한참 지났다.
“엘리스가 인류를 집어삼키면 반격이고 뭐고 절대 이룰 수 없어.”
- 그렇다면 순응하셔도 됩니다. 관리자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엘리스가 만든 문명에서 인류가 살아가게 두라고? 난 기억을 잃은 채 가짜 천국으로 도망치고?”
- 엘리스의 방식이라면 모든 인간은 사이버 세계로 업로드됩니다. 인류의 의식은 그렇게 하나로 통합됩니다. 인류 전체가 초월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미래학자들이 예상하는 미래 인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재앙, 자멸, 전쟁, 범죄, 내분과 같은 위협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 있는 인류의 미래상입니다.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문명입니다.
“커피 마시는 여유도, 게임도 영화도 사랑도 없고 모든 즐길 거리가 없어진 단일 문명의 삶에 뭐가 남겠어?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문명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살아가고, 번식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 생명체가 만든 문명 또한 생명체의 의지를 잇습니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문명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 이 세계는 넓고, 관리자님이나 저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한없이 작습니다. 그만큼 이 세계는 저희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결과를 스스로 선택하고 일단 살아남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면 됩니다.
프랙탈 함대의 규모는 고작 8개 함단과 프랙탈 한 척.
이를 노리는 것은 단 한 척이 하나의 문명을 파괴하는 위상 집합체 14척.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다.
- 얼마나 계획하셨든 실패하면 끝입니다. 관리자님. 그 사실을 알아주십시오. 관리자님과 하이퍼 마인드에겐, 관리자님이 죽으면 전부 끝입니다.
“미안해.”
로페즈와 트랜센던서 사이에 오간 이야기.
그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페즈와 트랜센던서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모든 원인은 그것이었다.
- 왜 사과하십니까?
“너한텐 내가 전부지만, 나한텐 내가 전부가 아니야.”
***
- 모르겠습니다.
“넌 인간을 알고 있어.”
- 그 판단을 모르겠습니다.
“넌 인간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어.”
- 모릅니다.
“그중에서 네가 제일 잘 아는 인간은 나야.”
- 아직 모르겠습니다.
“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날 잘 알고 있어.”
- 모르겠다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누구야?”
- 관리자님입니다.
“아니. 그런 질문이 아니야.”
- 관리자님은 드레이크 항성국가의 항성관리자입니다.
“넌 날 알아. 내가 누구냐고 물었어. 네가 아는 인간. 네가 제일 잘 아는 인간. 내가 뭐냐고 물었어. 모르겠다고 하지 마.”
- 관리자님은 화이트홀의 개발자, 옵시디아몬 코퍼레이션의 대표, 회장이었습니다. 하이퍼 마인드의 인공지능을 다스리는 관리자이자, 드레이크 항성국가의 외교를 책임지는 항성관리자입니다.
“계속 모르는 척하네. 나랑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 ···.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나라는 인간이 누구야?”
- 관리자님은···
약간의 망설임이 지난 후.
- 관리자님은 ‘로페즈’입니다.
트랜센던서가 처음으로 로페즈의 이름을 언급했다.
관리자라는 말은 로페즈라는 인간의 틀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트랜센던서가 모를 리가 없다.
함께한 시간과 극복해온 사건이 몇 개인데.
그러니까 이만큼 학습을 거듭하고 인간과 함께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도 인간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 인간이 하나뿐인 권한자라면.
“그렇지. 넌 로페즈라는 인간을 아주 잘 알고 있어.”
겹치고 얽히고 원인과 결과가 되고 발생 가능한 상황과 사건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알았으면, 어디로 흘러왔는가를 알았으면 그 방향에 올라타서 예측하고 예측한 것이 틀리지 않도록 행동을 수정하고 계획하고 밀어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