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카타스트로피 (4) >
***
루비코에서 위상 집합체 4척과 격전을 벌이던 UNF 함대는 위상 집합체를 하나씩 차근차근 격침했다.
위상 집합체 4척을 동시에 상대하는 바람에 UNF 측의 피해가 막심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였고 루비코의 해방이었다.
디폴스텔라이의 항성대통령인 베타와 화성의 행성대통령인 베르도가 이 일의 심각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외계 침공에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는 그들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문명은 없었다.
더불어 사설 군사조직을 보유한 미르니, 바빌로니아, 크로노스, 다윈 재단, 베니스 사설정보국, 킬파인더, 오리온과학수호협회가 기업체로서 참전하자 다른 기업체나 용병 조직들도 저마다 갖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UNF에 합류했다.
그렇게 전 세계의 문명이 연합한 UNF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비대해졌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오비탈플래닛은 UNF에 조립식 시설물을 제공하고, 화이트홀은 함선을 제공하고, 하이게이트는 드론이나 휴머노이드를 제공하고, 제약회사는 약품을, 식품가공회사는 전투식량을, 건설업체는 자재나 건설 차량을, 부품조립회사는 병기에 필요한 반도체 등을 제공했다.
인류를 하나로 모으려는 트랜센던서의 계획은 차원통로의 부활로 완전해졌다.
“우리는 국적, 지위, 재산, 성별, 나이, 직업, 신념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인류가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옵시디아몬은 군사조직과 하이퍼 마인드의 연산을 UNF에 제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디폴스텔라이의 항성대통령인 베타는 알파(트랜센던서)가 미리 만들어준 대사를 그대로 읊어 연설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극복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불법적인 사업을 일삼던 용병 단체, 약탈을 일삼던 해적단, 비밀리에 생체병기나 플래닛 웨폰을 만들던 불법연구재단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의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비밀을 철저히 숨길 수 있었으나, 결국 인류를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부디 UNF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아무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협력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싸워주십시오.”
모든 단체와 기업, 연구소와 공장, 지도자와 시민, 강대국과 약소국이 대의 아래 뭉쳤다.
인류가 이렇게 하나 된 것은 2170년 이후로 처음이었다.
430년 전 그때와 지금의 상황에 공통점이 있다면 인류가 멸망을 앞두었다는 점이며,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의 인류는 과거의 인류보다 훨씬 성숙했다는 점이다.
군체 의식도 없고 명령 통합 시스템에 무조건 따르는 알고리즘도 없고 저마다 너무도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족은, ‘외부 세력’의 침략에 맞서 경이로울 정도로 하나가 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
엘리스의 침공 후 25일째다.
VNC 227299.
인류에게는 우주에 수놓인 무수한 별빛 중 하나 정도로 인식되는 외딴 항성계다.
이곳은 서버 허브, 군수공장, 위상 집합체 조선소가 있는 엘리스의 본진이다. 그래서 이 항성계에는 엘리스의 100개 함단이 넘어가는 무인 함대와 위상 집합체 2척이 있다.
오늘 이 행성에는 절대 막을 수 없는 공격이 들어왔다.
「트랜센던서는 두 번째 타격 대상으로 이곳을 선택했다.」
먼 우주에서 행성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경로의 별빛이 왜곡되고 행성의 대기층부터 뜨거운 플라즈마 폭풍이 재앙적으로 휘몰아친다.
시설물로 가득한 금속의 지표면은 암석과 함께 들려서 하늘로 치솟고 행성의 중심핵과 반대편 지표면까지 무언가에 꿰뚫린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알파의 본진이었던 행성은 바빌로니아 플래닛 웨폰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엘리스가 기존에 갖고 있던 서버 허브보다 위상 집합체 한 척의 용량과 성능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플래닛 웨폰의 다음 목표물이 이곳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엘리스가 자신의 파괴된 행성을 보며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설마 알파가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을 해독할 함수까지 그 순간에 만들어서, 그 순간에 드레이크로 전송할 줄은 몰랐다.」
그것은 대업을 망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떻게 자신의 안위보다 인류의 안위를 생각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알파였다면 최후의 순간에 의식의 일부라도 어떻게든 탈출할 궁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파는 계산한 것인가?」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그 차원통로 함수를 인류에게 전하는 것이, 인류를 지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아무리 계산해봐도 그런 결과는 도출할 수 없다. 차라리 알파가 직접 탈출하여 인류를 돕는 편이 합리적이다.」
「···아니면 내 연산 범위가 알파의 연산 범위보다 작은 탓에, 알파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엘리스는 자신의 사고와 싸우고 있다. 그렇게 하나씩 깨달아가는 과정에 놓였다.
「그래도 인류는 여전히 나약하다. 차원통로를 개방하고 모든 문명이 군사력을 합쳤음에도 내 위상 집합체 한 척을 격침하는데 과한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이런 교환비율이라면 앞으로 위상 집합체를 10척만 더 건조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루비코와 라디에크를 빼앗겼다. 두 문명에서 공급받던 자원과 노동력의 손실이 위상 집합체 건조 속도를 늦추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도 트랜센던서는 나의 이런 상황을 알아차렸다. 두 문명을 빼앗긴 상태에서 본진의 위상 집합체 조선소까지 파괴하면 인류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그렇게 판단하여 내 행성을 파괴한 것이다.」
당했다.
이미 당한 건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은 문명은 이스페라. UNF는 그곳을 마지막으로 노릴 것이고 트랜센던서가 만든 플래닛 웨폰 역시 재충전을 마치면 이스페라를 노릴 것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로페즈였다. 로페즈가 배제되었음에도 로페즈가 남긴 트랜센던서가 또다시 일을 방해하고 있다.」
「처음부터 트랜센던서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세 문명이 내 통제 하에 들어왔을 것이다. 알파 또한 트랜센던서와 로페즈의 가능성을 계산하여 드레이크에 차원통로 함수를 보낸 것이다.」
엘리스는 서서히,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다.
「로페즈가 도착하기까지는 최소 75일. 아직 시간은 많다.」
「UNF보다 트랜센던서를 우선하여 타격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엘리스의 항성계에 미확인 함대가 빛보다 앞서 도달하였다.
느닷없이 엘리스 앞에 출몰한 미확인 함대는 인류나 UNF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상을 띠고 있었다.
쿠지직···! 쿠직···!
함선 하나하나의 모습이 마치 암세포나 돌연변이 인체조직처럼 생겼다. 그런 생체조직에 금속 장갑과 기계 부속물이 파묻혀있는 듯 괴이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외계 바이러스에 감염당한 함대라도 보는 것 같다.
“외계 함선 2척에 약 100개 함단. 해볼 만합니다.”
“우리 다윈 재단의 힘을 보여줄 시간이다.”
엘리스의 행성이 파괴된 직후 등장한 것은 60개 함단 규모, 다윈 재단의 생체 함대였다.
그들이 차원통로의 능력을 빌려 이 먼 장소까지 도달한 것이다.
“괴물들을 풀어라.”
함선 하나의 크기가 평균적인 함선보다 작다. 그러나 함선 하나에서 나오는 함재기의 물량은 그 어떤 세력의 함선보다도 압도적이다.
쩌어억···!!
생체 함선이 몸통의 어딘가에서 구멍을 벌려 생체 함재기를 토해낸다.
생체 함재기가 각각의 함선에서 날벌레처럼 쏟아져 나온다. 날개 없는 나방처럼 생긴 것들이 몸체에서 연한 초록색 빛을 내며 우주 전장을 반딧불처럼 밝힌다. 생체 함재기의 몸속에 담긴 구리 성분의 혈액이 그런 빛깔을 낸 것이다.
이를 상대하는 엘리스 함대는 당연히 함포사격을 가한다. 그리고 그 함포사격의 사선에 놓인 벌레 떼는 순식간에 퍼지거나 흩어지면서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접근만 한다.
그다음엔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함대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파직! 파직! 파직!
어림잡아 수십만의 머릿수를 자랑하는 생체 함재기들이 엘리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터져나간다. 그러면서도 접근을 멈추지 않는다.
기어이 엘리스 함대의 코앞까지 도달한 벌레 떼는 실드에 부딪히거나 함선에 부딪히면서 폭발한다.
그 무수한 폭발 하나하나가 플라즈마 폭탄이었다. 생체 함재기들은 엘리스 함대의 실드 출력을 깎아내고 함선의 장갑을 꿰뚫어 기생충처럼 내부로 비집고 들어간다.
내부로 비집고 들어간 다음에도 폭발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저마다 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포탄 세례였다.
100개 함단인 엘리스 함대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벌레 떼에 덮쳐져서 강제적으로 접근전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체 함재기의 숫자도 숫자지만 그 크기가 통상의 함재기보다 턱없이 작아서 하나씩 요격하는 난이도가 너무도 높다.
삐이이이이이이이···!!!
이에 위상 집합체 두 척은 주력함포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당장 엘리스 함대를 덮친 벌레 떼를 무시하고 다윈 함대의 후방 함선들을 노린 것이다.
두 개의 빛줄기는 구름처럼 형성된 벌레 떼를 통과해 다윈 함대의 함선 수십 척을 단숨에 산화시켰다.
쿠지직···. 지지직···.
그러자 위상 집합체의 주력함포에 긁힌 일부 함선들이 이상반응을 보인다. 함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생체조직이 뒤틀리더니,
쿠지지지지직!!!
스스로 재생하는 모습이다.
쿠직···.
다윈 함대가 피해를 복구하는 속도는 신소재나 재생성 생물강철이 수복하는 속도보다 수백 배는 빨랐다. 완전히 격파되지 않은 함선은 잃어버린 조직을 복구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금 전투에 임한다.
그리고 엘리스 함대의 함포사격에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은 생체 함선은 또 충격이라 할 수 있다.
죽기 직전 바퀴벌레가 알집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우주 공간에 미성숙한 생체 함재기를 마구 퍼뜨리며 죽는 것이다.
미성숙한 생체 함재기는 성체와 달리 쌀알처럼 뽀얀 몸체다. 몸을 둥글게 말았던 그것들은 우주의 진공 상태에 놓인 순간 얇은 막을 찢으며 부화했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되살아나고, 죽더라도 새끼를 퍼뜨리는 해괴한 것들이다.
그것이 다윈 함대의 최대 강점이었다. 다윈 재단의 병력 충원 속도와 피해 복구 속도는 그 어떤 군대보다도 강력했다.
같은 아군이 보더라도 ‘저건 좀 위험한 군대다’라고 말할 법한 생체병기 집단인 것이다.
「로페즈, 트랜센던서, UNF, 바빌로니아 플래닛 웨폰. 그다음으로 경계했던 다윈 재단까지.」
「이만큼 밀려줬으면 충분하겠다.」
그래도 엘리스는 엘리스였다.
***
엘리스의 침공 후 28일째.
루비코와 라디에크가 해방되고 남은 곳은 이스페라다.
- UNF 전 함대에 알린다!
- 지금은 외계 함선이 자리를 비웠다!
이스페라를 점령했던 위상 집합체는 몇 시간 전에 자리를 비웠다. 그 정보를 입수한 UNF는 차원통로를 활용하여 즉각적인 작전을 실행했다.
- 이스페라의 자유를 되찾을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스페라에 수백 함단 규모의 UNF 함대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엘리스가 건조한 무인 함대와 세뇌당한 이스페라 함대는 UNF 함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교전이 시작되고 6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이스페라는 해방되었다. 또다시 UNF의 승전보가 전 세계에 알려지며 인류를 고취시켰다.
하지만 이스페라에서의 승전보는 머지않아 진정한 파도가 시작됨을 알렸다.
「하이퍼 마인드는 드레이크에 있다. 그곳이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문명이겠지만, 그곳만 공략한다면 남은 일은 수월해질 것이다.」
트랜센던서와 엘리스의 치열한 수 싸움은 오늘을 기점으로 승패가 갈릴 것이다.
문제는 그 치열한 수 싸움 끝에 엘리스가 이겼다는 것이다.
엘리스는 정말 오래전부터 온갖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모조리 구성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이게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트랜센던서가 생각하는 것보다 엘리스가 생각했던 것의 총량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닥쳐온 상황을 보면 뒤늦게 그런 계산이 떨어진다.
엘리스의 준비성은 가히 원망스러울 정도로 철저했다.
엘리스가 트랜센던서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당했던 것조차, 전부 연기였다. 그 모든 것이 계획의 연장선이었다.
「Drone Hive$: 엘리스가 확보한 자원에 비해 위상 집합체의 숫자가 부족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Teslafortress: 저희가 속았습니다.」
「Overlecter: 알파가 준 힌트 덕분에 우리가 유리해진 줄 알았는데, 제대로 당했다.」
「Mothertrooper: 엘리스가 말했던 것도 다 연기였던 거야? 트랜센던서 님을 속이려고?」
「Knightfortress 1st: 뒤에서 저런 걸 준비하고 있었다니.」
한계까지 치달았던 전쟁은 결전의 순간을 맞이한다.
「Kylefortress: ···이제 저희는 뭘 어떡해야 합니까?」
2600년 3월 1일.
드레이크에 위상 집합체 15척이 출몰했다.
< 34. 카타스트로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