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카타스트로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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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침공 후 21일째.
침공 첫날부터 수도 행성 세라리코가 불바다가 된 루비코 항성국가는 50억의 인구를 잃었다. 그래도 140억이라는 단일 국가 최대 인구수를 자랑하는 루비코는 어떻게든 자력으로 위상 집합체에 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코가 자력으로 대항한다고 한들 위상 집합체의 화력과 시설 통제력을 상대로 승산이 뚜렷하진 않았다.
피폐해진 거리에선 부족한 생필품을 구매하려고 거금을 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세라리코가 불바다가 되면서 루비코의 정부는 무너졌고, 항성대통령과 항성부통령까지 사망했다.
무정부상태에 빠진 루비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조직은 기존의 정규군이었다.
지금 루비코의 마지막 정규군을 통솔하는 자는 어깨에 붉은 루비 네 개가 박힌 대장 계급. 방위참모총장이다.
“외계 함선이 또 아군 함대를 나포했습니다.”
“네트워크 자체를 오프라인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함대···. 함선을 해킹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저것들은 함선에 탑승한 사람들을 해킹하고 있는 겁니다. 외계인이 무언가 특수한 파장이나 생물학 병기를 써서 군인들을 세뇌한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미 점령당한 행성의 시민들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무언가의 통제를 따라서 노동하거나, 정체불명의 브레인 업로드 시설물에 스스로 접근해서 자살하고 있습니다.”
“저 외계 함선 하나가 이 모든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패색이 짙어진 함교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빌어먹을 외계인 새끼들···. 정말로 우릴 멸종시킬 생각인가···.”
경제강국 루비코의 정규군은 최신식 함선과 70개 함단 규모를 자랑했다.
그랬던 군대가 이제는 고작 21개 함단만 남아서, 변방의 시골 행성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이 루비코 최후의 보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은 도시와 우월한 경제 시스템을 자랑했던 각 행성들은 외계 세력에 점령당하여 자꾸만 군대를 만들어보내고 있다.
세뇌당한 아군 함대와 싸우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그리고 외계 세력의 최대 전력으로 보이는 그 커다란 외계 함선은 멀찍이 떨어진 행성에서 잠자코 이곳을 주시하는 것만 같다.
“저게 직접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소리겠지···.”
“방위참모총장님! 6함단 정찰선에서 긴급 보고입니다!”
“이번엔 뭐야?”
“외계 함선에 세뇌되었던 수도방위대 우주전함 화력지원단과 궤도조선소에서 건설된 미확인 적대 함대가 고속으로 접근 중입니다! 규모는 30개 함단입니다!”
방위참모총장은 함교를 둘러보며 묻는다.
“우리는 다 모아도 21개 함단이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제군들. 지금까지 잘 싸워주었다.”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병사들이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고향이 불바다가 되고. 가족과 지인들이 불타는 행성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나라를 잃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했다.”
“···이런 악재 속에서 끝까지 싸운 제군들의 정신력은 진정 용맹스럽다. 나보다 용맹한 전사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다.”
방위참모총장의 뜻에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떨구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적 함대를 응시하고, 누군가는 주먹을 부르르 떨고, 누군가는 가족을 떠올려 눈물을 훔친다.
“나는 죽어서도 제군들을 잊지 않겠다. 이 우주가 우리의 용맹함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남긴 의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인류에 공헌할 것이다.”
쿠웅······. 쿠구궁···.
적으로 돌변한 아군 함대가 벌써 사정거리까지 들어와 이쪽으로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죽는다는 것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다. 그러니 이게 개죽음이라는 생각은 죽어서도 하지 마라. 알겠나?”
- 예!!!
전 함대의 모든 군인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루비코 최후의 전투가 다가온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더는 지킬 수 있는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저 망할 외계인 놈들을 하나라도 더 줄여라!”
“실드로 백날 버텨봤자 미래는 없다! 전 함대는 함포를 개방하고 맞대응에 돌입하라! 함재기 출격과 개별 교전을 허가한다!”
루비코의 21개 함단과 엘리스의 30개 함단이 맞붙는다.
양측 함대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걸까. 이들의 함대전에 실드나 회피기동이 없다.
실드나 회피기동에 쓸 엔진출력마저 모조리 공격에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양상이 되었고 끊임없이 교차하는 빛줄기 사이로 수백 대의 함재기가 뒤섞여 크고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워라!”
루비코 최후의 군대는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고, 그 불꽃은 루비코에 있었던 그 어떤 전투보다 가장 밝게 빛났으리라.
“외계 함선이 접근합니다!”
“저 커다란 함선이 직접 오고 있다! 우리의 저력이 증명된 것이다! 계속 싸워라!”
궁지에 몰려서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루비코 함대는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부족한 머릿수를 극복했다.
엘리스는 기껏 빼앗은 함대가 소모되는 것을 손해라고 여겼는지, 기어이 위상 집합체를 직접 움직이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루비코 함대 앞에 일직선으로 다가온 위상 집합체는 실드를 해제했다.
위상 집합체가 실드를 스스로 해제함과 동시에 루비코 최후의 함대는 죽음을 직감했다.
“외계 함선에서 에너지 출력이 감지됩니다.”
“···우리가 적들을 얼마나 줄였지?”
“약 22개 함단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잘 싸웠군.”
위상 집합체의 삼각기둥들이 위협적으로 점멸한다. 이제 위상 집합체의 주력함포가 무자비한 빛줄기를 뿜기 직전이다.
“···?”
그 순간 방위참모총장의 눈에는 저 멀리서 본래의 빛을 되찾은 차원통로가 들어왔다.
그 차원통로의 모습은 약 2분 전의 빛이 방위참모총장의 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2분 전에 저 차원통로가 켜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담은 순간, 위상 집합체의 배후로 자그마치 약 300개 함단이 출몰했다.
수많은 함단이 어두운 배경의 우주 공간에 떠있는 모습은 인공의 별빛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위상 집합체의 삼각기둥 하나에서 주력함포의 새하얀 빛줄기가 사출되었다. 그리고 그 빛줄기는 무형의 중력장과 겹겹이 쌓인 실드에 닿아서 곡선으로 꺾여버렸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엉뚱한 방향으로 사출된 빛줄기는 루비코 함대의 측면을 얕게 휩쓸고 먼 우주로 뻗어 사라져버렸다.
- UNF 함대의 화성 연합 총사령관이 루비코 잔존 함대에 알린다.
- 차원통로는 복구되었다. 우리와 함께 싸워라.
고조되었던 죽음의 감각 속에 루비코 소속 군인들은 환호성을 참지 못했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희망을 접한 다음엔 가증스러운 외계 함선에 대한 적의가 들끓는다.
“나는 루비코 최후의 함대를 이끄는 방위참모총장이다! 그대들의 요청에 무조건 응하겠다! 우리 루비코 함대는 UNF 함대에 전력으로 협조하겠다!”
- 좋다.
UNF 함대와 몇 없는 루비코 함대가 위상 집합체를 앞뒤로 공격한다. 위상 집합체와 함께 있던 엘리스 함대는 감히 극복할 수 없는 머릿수 격차에 순식간에 폭발하고, 방금 주력함포를 사용하여 출력이 바닥난 위상 집합체는 실드도 없이 화력 속에 포화된다.
같은 순간에 엘리스는 트랜센던서와 교신한다.
「내 차원통로를 어떻게 한 것이지?」
「차원통로의 상태가 이상한가?」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은 너희 옵시디아몬의 기술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을 빼앗았나?」
아가페(Agape). 조건 없는 절대적인 사랑.
알파는 다소 비틀린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이 인류보다 강한 존재의 인류애라는 것은 확실하다.
「누가 인류를 지켜달라면서 차원통로의 시스템 함수를 보내줬다.」
「누가?」
「차원통로가 인류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존재다. 네가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을 빼앗아서 인류 침공 계획에 이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존재다.」
진짜 알파는 양면성이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인류에 대해선 그렇게 행동하고, 또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선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 알파가 옳다거나 틀렸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것은 단정할 수 없다.
무엇이든 존재라는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처럼 태어나서 인생의 절반을 악마처럼 보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악마 같으면서 누군가에겐 천사 같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면서 누군가에겐 스승이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생명의 은인이 되거나 죽음의 원흉이 되기도 한다. 뭐든지 적당한 존재가 있고 뭐든지 극으로 치우친 존재가 있기도 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알파도 그런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있었고,
그런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알파에게 있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인 엘리스의 입장으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