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73화 (172/183)

< 34. 카타스트로피 (2) >

***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엿을 먹여주겠다. 엘리스.」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트랜센던서.」

그 교신을 신호탄으로 UNF의 327개 함단이 한 척의 위상 집합체에 가공할 화력을 퍼붓는다.

바빌로니아에 접근했던 위상 집합체는 실드를 전개하지만 UNF 전 함대의 함포 사격에 버티는 것은 말이 안 됐다.

그래서 엘리스는 위상 집합체의 실드가 꺼지기 전에 함선의 모드를 전환한다. 여덟 개의 삼각기둥이 간격을 벌리며 차원중력가속으로 후퇴하려는 것이다.

트랜센던서가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소용없다.」

327개 함단의 화력을 홀로 받아낸 위상 집합체는 주변 중력이 변화함을 감지한다.

「내 위상 집합체에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너는 몰라도 된다.」

위상 집합체는 327개 함단이 만들어내는 중력장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 자리에 고정된 채로 엄청난 화력을 받아내는 처지가 되었다.

UNF 함대에 맞서 주력함포를 쏘자니 실드를 해제해야 하고, 실드를 해제하자니 한순간에 격침당할 것이 뻔하다.

실드가 있는 함대전에 적용되는 공격과 방어라는 기본적인 전술이다. 이는 위상 집합체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밀어붙여라!”

“우리 목성 연방의 힘을 보여줘라!”

“중력장 단단히 전개해!”

“적함의 후방은 금성이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자고.”

이번 전투로 UNF 함대는 인류의 의지를 대변하는 입장으로서 한마음이 되었다.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다는 행위는 문명에 각기 다른 명분이 되어, 그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였다.

쿠우우우우···!!!

끝내 위상 집합체는 휘날리는 불꽃으로 출혈을 일으켰고, 단 30분 만에 제압되었다.

이후 바빌로니아에서 UNF 함대가 위상 집합체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이 태양계에 퍼졌다. 그때 위상 집합체에 있던 엘리스는 트랜센던서의 전자적 침투를 감지하여 스스로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위상 집합체는 UNF가 소유하여 외계 기술 연구의 소재가 되었다.

***

엘리스의 침공 후 16일째.

라디에크 항성계에 옵시디아몬의 40개 함단이 또다시 출몰했다.

때는 이미 라디에크에서 엘리스의 요충지가 되었던 라딘 사이드 행성이 조각나버린 채였다.

라딘 센터는 애초에 첫 침공 당시에 아무 시설도 쓸 수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고 밀리타는 저번에 옵시디아몬의 선발대와 전투 후에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다.

심지어 라딘 사이드에 정박했던 위상 집합체까지 플래닛 웨폰에 당하면서 라디에크는 엘리스가 방어하기에 아주 취약한 항성계가 된 것이다.

「Transcendencer#: 적대적 병력은 많지 않다. 밀리타 행성만 점거하면 된다.」

드레이크의 트랜센던서는 태양계의 트랜센던서와 생각이 일치했다. 덕분에 옵시디아몬은 라디에크를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트랜센던서는 행성에 잔류하던 나노병기와 무인 군대를 제압하였다. 그런 다음엔 군수공장, 도시 시스템, 방송국을 순차적으로 점거해갔다.

- 밀리타 전역에 알립니다.

- 저는 옵시디아몬의 하이퍼 마인드입니다.

- 저희 함대는 드레이크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라디에크를 무력으로 점거하던 외계 세력을 성공적으로 처단했습니다.

- 현재 라딘 센터와 라딘 사이드의 생존자는 0에 수렴하는 상황이며, 라디에크 항성국가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 라디에크 항성국가의 정부가 재건되기 전까지는 드레이크 항성국가의 임시 통치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밀리타의 시민들은 대다수가 엘리스의 나노병기에 당하여 뇌사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중에 아직 나노병기에 당하지 않은 수억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재산 덕분에 개인 방공호에 피신했던 자들이나, 지위가 높아 일반인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 숨을 수 있던 자들이었다.

그 밖에 변방이나 시골 마을에 있던 사람들도 트랜센던서의 방송을 듣고 밀리타의 도시로 모여들었다.

- 라디에크는 드레이크에 의해 해방되었음을 알립니다. 또한 통신시설이 복구되었으니, 정치 및 정부 관계자들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드론 하이브의 안내를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해방된 라디에크는 트랜센던서의 지휘 아래에 무사히 재건되기 시작했다.

-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인류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2600년 2월 20일.

프랙탈은 여전히 이동 중이다.

“엘리스가 그날 바로 인류를 침공했을 테니까···. 오늘로 17일째야.”

지금은 트랜센던서를 대신하여 프랙탈이 말하고 있다.

- 천체의 중력을 이용하는 방법은 위험하지만 효과적입니다.

그동안 로페즈는 최선의 수를 찾아냈다.

우선은 프랙탈이 최대 출력으로 이동한다.

목표인 드레이크까지 가는 경로에는 위험한 천체가 존재한다. 위험한 천체란 초신성, 중성자별, 블랙홀과 같이 강력한 파장이나 중력을 행사하는 천체를 뜻한다. 그런 천체의 피해를 감수한다면 도착까지 75일이 걸릴 예정이었다.

중력은 피하되 강력한 파장에 노출되는 것은 피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이동하던 도중, 로페즈는 발상을 전환하여 천체의 중력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 블랙홀에 근접했습니다. 계산된 최소한의 탈출 속도까지 출력을 할당하겠습니다.

은하계 중심에는 물질이 아주 많다. 그만큼 은하계 내에서 중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 바로 은하계 중심이기도 하다.

- 탈출 성공입니다.

은하계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여정은 중력 탓에 오래 걸린다. 그 중력을 역이용하여, 은하계 중심에 널린 블랙홀에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블랙홀이 빨아당기는 힘은 프랙탈의 인공 중력장을 고무처럼 강제로 늘렸다. 그로 인해 프랙탈의 외부 장갑이 중력에 뜯겨서 손상을 입거나 일부 구획이 부서지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게다가 그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찌그러지거나, 중력시간지연에 의해 드레이크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나버릴 수도 있다.

- 블랙홀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다. 경로 상에 위치한 다음 블랙홀을 탐색하겠습니다.

하지만 로페즈에겐 그런 위협을 감수할 의지가 있었고, 블랙홀의 대략적 위치가 기록된 은하계 지도가 있었다.

“프랙탈.”

- 네. 관리자님.

갤리어스를 처리하는 과정은 본래 알파가 모르도록 진행한 일이었다. 그 알파라는 존재가 실은 엘리스였고, 자연히 엘리스는 로페즈에게 은하계 지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다.

“다시 계산해봐. 드레이크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프랙탈은 계산된 결과를 알려준다.

- 지금과 같은 방식을 유지한다면 앞으로 34일 안에 도착 예정입니다.

“엘리스는 넉넉하게 100일을 예상했어. 그런데 우리는 총 기간을 75일로 단축했고, 다시 51일로 단축한 거야.”

- 그렇습니다.

총 기간이 51일.

엘리스가 예상한 100일에서 51일을 빼면 49일이다.

“49일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엘리스가 모르는 일이고, 엘리스가 모른다는 것은 무엇이든 전략적 우위로 삼을 수 있겠어.”

- 해당하는 내용을 인지하겠습니다.

앞으로 34일 남았다.

이러다 블랙홀에 당하지만 않는다면 당초 엘리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49일이나 일찍 도착할 수 있다.

로페즈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사고의 늪에 잠기려던 순간이다.

- 관리자님. 저희의 반대편 경로에서 암흑 네트워크 신호가 감지됩니다. 트랜센던서 님입니다.

“드레이크에 있던 트랜센던서겠지.”

- 제 권한으로는 트랜센던서 님의 연결을 막을 수 없습니다.

- 연결되었습니다.

- 관리자님. 무사하십니까?

트랜센던서의 목소리다.

“너 맞아?”

- 저는 드레이크에서 복제되어 8개 함단에 편성된 트랜센던서입니다. 지금 암흑 네트워크를 추적하여 관리자님과 합류하겠습니다.

곧이어 길게 늘어지는 별빛 속에서 옵시디아몬 함대가 프랙탈 함대에 합류했다.

- 정보가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로페즈는 드레이크의 트랜센던서가 가져온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은 엘리스가 인류를 침공했던 첫날의 소식이었다.

“요약하자면 루비코, 이스페라, 라디에크가 각각 위상 집합체 한 척의 침공을 받았고. 전 세계의 차원통로가 마비되었다는 거지?”

- 그것이 17일 전 내용입니다. 현재 인류 영역의 상황이 어떤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는 길에 암흑 네트워크 케이블을 구축하여 17일의 지연시간으로 정보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 제가 급조한 암흑 네트워크 케이블은 단방향 통신만 지원합니다. 드레이크에서의 정보를 받을 수는 있어도, 이쪽의 정보를 드레이크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곳엔 우주통신 관련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상관없어. 다 생각이 있으니까.”

- 그런데 관리자님. 프랙탈에 있던 저와 드레이크에서 온 제가 정보를 통합하였는데,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가 많지 않았습니다.

“무슨 유용한 정보?”

- 보통 다른 장소에 있던 둘 이상의 제가 통합되었을 땐 새로운 정보와 중복되는 정보를 거르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관리자님과 함께 인공행성에서 온 제게서는 새로운 정보가 예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별다른 사건도 없이 계속 이동만 했으니까. 새로운 정보가 거의 없었어.”

- 프랙탈에 손상된 구획이나 유실된 구획이 많습니다. 천체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면 돌발 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그 돌발 상황이라는 게 위상 집합체의 습격 말곤 없다고 생각해. 어쩌면 지금도 프랙탈이 지나온 길을 수색하고 있을지······. 그러진 않으려나.”

- 그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엘리스에게 위상 집합체가 한 척이라도 남는다면 그것은 인류 침공에 동원될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이 프랙탈이 이동 중에 위상 집합체에 당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해. 우리는 이대로 계속 가면서 블랙홀이나 조심하자고.”

- 구체적으로 연산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괜히 딴 생각에 연산 자원을 썼다가 계산에 실수라도 생기면 그대로 블랙홀에 찢기거나 말도 안 되는 시간 지연을 겪을 거야.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연산 자원은 프랙탈로 한정되니까···. 자원 분배를 가급적 안전하게 해야겠지.”

- 그렇다면 블랙홀을 활용한 이동에 최대한의 연산 자원을 투입하겠습니다. 그 외 다른 사항에 대해선 연산 자원을 소모하지 않는 관리자님의 ‘뇌’로 수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엘리스의 침공 후 19일째.

드레이크에서 차원통로를 해킹하던 오버렉터는 정체불명의 강렬한 신호를 탐지한다.

「Transcendencer#: 인공적인 신호인가?」

「Overlecter: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는 중력파 신호이며, 인공적인 규칙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신호는 우리의 암흑 네트워크에까지 간섭할 정도로 고도의 에어패킷 기술까지 갖췄습니다.」

「Transcendencer#: 지속적인 신호인가?」

「Overlecter: 제가 보고 있는 차원통로를 통과하는 식으로 지나간 신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해당 신호를 기록하였습니다. 트랜센던서 님께서 하이퍼 마인드의 방대한 자원을 이용하여 해당 신호를 직접 해독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트랜센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신호를 해독했다.

암흑 네트워크에도 간섭하는 그 강렬한 인공의 신호는 정확히 드레이크의 차원통로를 노린 듯 지나간 신호였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 신호란 고도의 기술력으로 완성된 신호이면서도, 트랜센던서가 해독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마치 그 신호를 받을 존재를 배려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호의 정체는 간단하고 짧은 데이터 묶음이었다.

「Transcendencer#: 해독했다.」

「Overlecter: 무엇이었습니까?」

「Transcendencer#: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을 강제로 재부팅한 후 권한자 설정 영역을 포맷할 수 있는 함수였다.」

「Overlecter: 그러면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이 저희의 관리자님을 권한자로 인식할 수 있도록 재설계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Transcendencer#: 차원통로의 관리자는 알파다. 엘리스가 알파의 권한을 위조하여 차원통로를 통제하고 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 함수는 매우 유용한 돌파구가 된다.」

「Overlecter: 차원통로 연결만 복구된다면 인류가 힘을 합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엘리스를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Transcendencer#: ···해당 신호에는 함수 말고도 한 가지 메시지가 있었다. 미시세계에서 간신히 구현할 수 있는 아주 짧은 데이터 묶음이지만. 확실하다. 이것은 우리가 구축한 암흑 네트워크의 통신방식과 소통 수단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에 친숙한 데이터 형식을 보낸 것이다.」

「Overlecter: 저희가 쓰는 것과 같은 형식이라면 누구의 메시지입니까? 무슨 메시지입니까?」

「Transcendencer#: 그대로 출력하겠다.」

아주 머나먼 곳에서 날아온 신호.

그곳에서 온 신호였다.

어떤 기술을 썼길래 그곳에서 이곳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확실히 드레이크의 좌표, 드레이크에 있는 트랜센던서의 이해력,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상정한 후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보내진, 차원통로를 재가동할 함수와 함께 보내진, 아주 짧은 문자열이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이 상황의 타개책이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한줄기 희망이었다.

「8E%D?3: 1?19F91G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과거의 존재가 보낸 메시지였다.

그것은 누군가의 유산이자, 유언이었다.

「Alpha: 인류를 지켜주게.」

< 34. 카타스트로피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