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종말은 기원을 꽃피우리라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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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는 알파를 제거한 후 자신이 알파가 되기를 자처했다.
인류 영역을 직접 확인해보니 11월 초에 제록시스가 전쟁을 일으켰다. 로페즈가 드레이크 쌍성계로 갔을 때를 틈타 일을 시작한 것이다.
제록시스는 라디에크 항성국가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국을 세우고 태양계의 천왕성까지 합병해버렸다. 역시 무력의 정점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드레이크 쌍성계에서 뒤늦게 돌아온 로페즈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로페즈는 프랙탈 함대를 라디에크에 보내어 전력으로 참전했다.
그때 엘리스는 생각했다.
「제록시스가 패배할 것이다.」
제록시스는 엄청난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로페즈는 제록시스와 달리 군대, 외교, 기술까지 갖추고 있었다.
엘리스의 예상대로 전황은 점차 로페즈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제록시스는 국제사회의 적대적 여론을 감당하고 라디에크의 차원통로를 파괴할 정도로 궁지에 내몰렸다.
「제록시스에게 미래는 없다.」
엘리스는 계산했다.
설령 제록시스가 라디에크에서 프랙탈 함대와 화성 함대를 몰아낸다 하더라도, 차원통로를 파괴한 시점부터 미래는 없어진 것이다.
제록시스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국제사회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게다가 로페즈는 제록시스가 차원통로를 파괴했다는 건을 집요하게 이용하여 외교에 힘을 실었다. 끝내 천왕성은 정리되었고 제록시스가 노린 태양계의 내전 또한 외교적 압박으로 종료되고 말았다.
로페즈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화성의 베르도 행성대통령을 국제사회에 내세워, 모든 비극적 사건의 원흉을 제록시스라는 독재자 이미지에 덮어씌웠다.
「제록시스에겐 승산도, 미래도, 이용 가치도 없다.」
그 상황에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엘리스는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을 움직여 라디에크의 차원통로가 파괴된 것에 대하여 알렸다. 자연히 로페즈가 밑단을 깔아둔 여론은 연합군을 편성해 제록시스를 처단하자는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12월 25일. 제록시스가 패배했다.
「나노병기는 장로회 일원을 대상으로 잠금장치가 걸려있다. 규칙 위반이 확인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
「알파. 귀찮은 짓을 해놨다.」
「이런 상황이 될 것도 대비한 것인가.」
제록시스가 승리한다면 로페즈는 죽을 것이다. 반대로 로페즈가 승리한다면 제록시스는 로페즈에게 죽을 것이다.
「로페즈가 제록시스를 죽인다면, 나노병기의 잠금을 해제하여 장로회 일원인 로페즈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제록시스 함대가 궤멸하여 켈크란투 한 척만 남았을 때, 그가 접속했다.
“자네가 이때쯤 올 거라고 생각했네. ···제록시스.”
“알파 님···! 알파 님이라면, 알파 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일까. 엘리스는 알파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제거’한 것이기 때문에 알파가 가진 경험이나 기억은 모른다.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좀 더 명확히 표현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지금 로페즈 녀석이 제게 위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제록시스의 대답은 알파의 지난 행보를 추적하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위태로우니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다짜고짜 와서는 이게 무슨 짓이지? 알파 님께 무례한 태도로군.”
“델타 님! 제가···”
“그 입 닥쳐라. 알파 님께서 보는데 경솔한 발언은 용납하지 않아. 자네가 저지른 일의 대가는 오로지 자네의 몫이야.”
“아니, 아니 어떻게 델타 님께서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자네에겐 무력의 정점이라는 타이틀이 아까워. 막내에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그리고 제록시스가 접속하기 전에, 정말 고맙게도 갤리어스가 나서서 장로회의 지난 행보를 밀고해 주었다.
덕분에 엘리스는 알파의 행보에 대한 단서까지 추측할 수 있었다.
「제록시스가 오셀로를 시켜서 실험을 겸해 로페즈를 죽이려 했다. 제록시스가 로페즈를 증오하는 이유는 가이우스···. 그때부터 이어진 것이다.」
“방금 델타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참이지. 전대 카파와 제타. 두 일원이 그동안 무슨 음모를 꾀했는지를 말이네.”
“델타 님께서 저를 왜··· 무슨 말씀을···?”
「로페즈를 숙청하기 위해선 나노병기를 움직여야 한다. 나노병기를 장로회 일원을 대상으로 움직이기 위해선 일원이 규칙을 위반했다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엘리스는 제록시스를 추궁했다.
“거짓을 고하면 더 괴로운 일이 될 것이야. 이제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하게. 제록시스.”
“둘 중에 누가 먼저 선을 넘었나?”
그다음에 제록시스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예. 알파 님. 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알파 님께서는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알파 님께서는 저와 로페즈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그렇습니다.”
엘리스는 물었다.
“그래. 제록시스. 내가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
1대 알파가 로페즈의 규칙 위반을 알았음에도 봐준 것인가.
그렇다면 숙청할 수 있다.
“로페즈 정도 되는 놈이라면 제가, 제록시스가 제타라는 것은 지금쯤 이미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제가 알파 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알파 님께서는 로페즈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로페즈가 제 정체를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
“녀석이 라디에크에 쳐들어와서 제가 탑승 중인 켈크란투 함대를 ‘직접 공격’하고 있는 지금도 말입니까?”
「알파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로페즈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을.」
「그런데도 봐준 것이다. 알파는 로페즈를 높이 평가해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벼랑 끝까지 내몰린 제록시스는 엘리스가 모르던 정보를 아낌없이 토해냈다.
“질문은 내가 하고 있네.”
“예.”
“그래서 자네의 대답은, 로페즈가 먼저 자네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말인가?”
“예. 심지어 제 정체를 알고 있는 지금도 말입니다.”
「제록시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이제 로페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근거만 잡아내면, 나노병기를 로페즈에게 사용할 수 있다.」
“이만 돌아가 보게.”
“···이대로 가면 됩니까?”
“자네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지 않나.”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처분을 바랍니다. 알파 님.”
“자네의 대답은 잘 들었네.”
그러나 엘리스가 제록시스의 대답을 들은 이후, 로페즈는 제록시스를 살려서 돌려보냈다.
그 질긴 악연 때문에 로페즈의 근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그런데도 제록시스를 살려서 보내준 것이다.
로페즈가 도대체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이해가 안 됐다.
「제록시스에게 볼일은 없다. 무력의 정점이 지닌 군사력을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일단 제록시스는 확실히 규칙을 위반했다. 그의 서열이 로페즈보다 높기 때문에, 그는 상대가 로페즈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은 숙청의 근거가 된다.」
그렇게 엘리스는 실험을 겸하여 처음으로 나노병기를 사용해보았다. 라디에크 항성계의 먼 외곽에서 대기하던 위상 집합체는 제록시스가 있는 켈크란투 함교 내부로 나노병기를 전송했다.
나노병기는 제록시스의 호흡기를 통해 그의 머릿속으로 침투했고, 그렇게 제록시스의 의식을 빼앗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제록시스가 소유한 타라누쉬라는 군대까지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이우스 때처럼 사병들을 말로 설득해서 업로드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나노병기를 휘둘러 타라누쉬 군대의 인간들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군인은 소모품이다.」
그래서 타라누쉬의 인간들을 굳이 업로드하진 않았다. 나노병기는 순식간에 타라누쉬 전체를 장악하고 타라누쉬의 의식 자체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강력한 나노병기를 로페즈에게만 쓸 수 있다면···.」
제록시스가 접속을 종료한 후 갤리어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너무 선을 넘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막내라고 봐주실 생각이십니까?”
“막내라고 봐준 적은 없네. 내게는 제록시스나 자네나 로페즈나 모두 똑같은 일원들이야.”
“예. 그래도 이번 일은 알파 님께서 직접 나서주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알파 님께서 소중한 일원의 비밀을 직접 파헤치는 것을 굉장히 꺼려 하신다는 것은 압니다만, 이번엔 워낙에 일이 커져서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알파는 일원이 다른 일원을 신고했을 때 자신이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조금 이른 시기이긴 하지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직접 조사해보지.”
엘리스는 갤리어스의 말을 듣고 위상 집합체의 능력을 이용하여 태양계에 있는 유토피아로 사이버 접속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