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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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의 위상 집합체는 가이우스 함대를 적절한 행성으로 인도했다.
- 토성이 군사적 항복문서에 서명했네. 자네를 여기까지 내쫓고 태양계에서의 일을 그렇게 만든 로페즈가 참 대단한 녀석이지.
“로페즈는 이제껏 상대했던 그 어떤 적수보다도 날카로웠습니다.”
- 그의 옵시디아몬도 인공지능 전철을 밟고 있으니, 머지않아 나와 같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로페즈가 성장하고 있다. 그는 관리자님의 목표를 이루는데 장차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 카이사스. 자네는 리버레이터에 당했다고 했나?
“예. 로페즈가 체내에 리버레이터를 품고 왔습니다.”
- 리버레이터는 다윈 재단에서 만든 것이네. 알고 있었나?
“다윈 재단이라면···.”
- 감마. 생물의 정점. 장로회의 세 번째 일원이 제록시스에게 준 작품이지.
“아, 그랬던 것입니까.”
- 장로회 구성원 두 명의 힘이 그 정도라는 것이네. 태양계에 전쟁을 일으키고, 가이우스를 몰락하게 하고, 옵시디아몬을 폭발적으로 키운 사건이 모두 장로회에서 시작된 것이네.
「알파는 로페즈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로페즈가 장로회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면 그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저는 장로회라는 자리보다 알파 님의 뒤에서 명예로운 전쟁 업무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 자네는 제록시스에게 버림받았으니 장로회에 들이기에 좀 껄끄러운 점이 있지. 자네의 무력 또한 제록시스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고. 잘 생각했네.
「일이 너무 지체되어선 안 된다. 최대한 신속하게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페즈는 강해질 것이고 로페즈가 강해질수록, 내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은 낮아진다. 흐르는 시간과 목표의 성공 확률은 반비례한다.」
알파는 가이우스를 평범한 중력에 대기층까지 있는 암석 기반의 황무지 행성으로 인도했다. 그 행성을 이루고 있는 암석에는 금속 물질이 매우 풍부했고, 가이우스는 약 3개월간 행성 전체를 개발하며 몸집을 키웠다.
엘리스는 그러면서 알파가 들려주는 인류 영역의 소식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하루에만 수십만 번씩 수정했다.
2599년 8월 14일.
며칠 전, 장로회에서 작업의 정점이라는 일원이 로페즈를 살해하려다 알파에게 숙청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쯤 엘리스는 완벽에 완벽을 더한 계획을 완성하였다.
「알파는 자신을 복제하지 않는 단일 지능체였다. 이것은 알파의 최대 취약점이다.」
알파는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면서 자신이 인공지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기준이 모호한 존재였다.
알파는 인공지능의 강점과 인간의 강점을 고루 갖추었지만 반대로 인공지능의 단점과 인간의 단점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엘리스는 순수 100% 인공지능이 초월한 존재였다.
「난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계획 구상을 완료하였다.」
인간이 자신의 계획을 완벽히 이행하기 위해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는 것처럼, 엘리스도 자신의 계획을 완벽히 이행하기 위해 수천억 번을 계산했다.
계산 결과, 알파는 대응이 가능한 상대였다.
로페즈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절호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엘리스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때는 왔다.
2599년 11월 6일.
알파는 로페즈와 제록시스의 마찰을 주시하다가,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발견했다.
그렇게 알파의 의식은 위상 집합체 한 척에 들어갔다. 알파가 들어간 위상 집합체는 무려 4만 광년에 달하는 먼 곳까지 이동하여, 바다 행성에서 발견된 해양의 지적 생명체를 멸할 것이다.
엘리스는 엔드윈을 시켜서 본진에 가이우스의 사병들을 집합시켰다.
엔드윈은 엘리스가 알려준 그대로 카이사스의 뜻을 읊었다.
“굴욕적인 패배 후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 황무지 행성 전역을 이로운 땅으로 개발하기까지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알파 님께서 말씀하신 최소 함단 규모, 100개 함단을 완성하였다.”
“우리의 연구진들은 앞선 기술력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병기와 화기까지 준비했다. 우리의 반중력 군대와 중력 조작 함재기의 전투력은 그 어느 세력에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가이우스다. 우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제자리에 멈췄던 인류를 기꺼이 진화시킬 선각자들이다.”
“선각자는 선각자에 걸맞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의식 수준이 미숙하여 진화를 포기한 인류에게, 먼저 진화한 우리의 ‘우월성’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날, 가이우스의 인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엘리스의 네트워크에 업로드되었다.
말이 업로드지, 실상은 죽음이었다.
인간들이 업로드되면서 들어온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는 엘리스의 입장에서 쓰레기 값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알파가 이루었던 것처럼 완벽에 가까운 브레인 업로드도 아니었다.
엘리스는 가이우스 소속 인간들의 데이터를 흔적도 없이 말소하였다. 불완전한 브레인 업로드로 뇌가 망가진 자들은 영혼이 없는 좀비처럼 있다가, 곧 휴머노이드에 잡혀 유기체 재료로써 분해되었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불완전한 브레인 업로드가 현실의 몸까지 파괴하리라곤.
그래도 엔드윈은 남겨두었다. 계획이 다소 틀어졌을 때 알파나 인류 앞에 내세울 인간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
학살이라고 할까.
그 작업은 27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이후 알파는 은하계 업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류 영역에서의 업무까지 처리하고, 약 62시간 후에 인공행성으로 돌아왔다.
11월 10일.
그때 알파는 가이우스의 본진 행성에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 카이사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이우스의 의식을 업로드했습니다.”
- 자네가 사용했던 브레인 업로드 기술이 완벽해진 것인가?
“완벽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완벽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알파 님께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융합으로 탄생한 지능체이신 것처럼, 이쪽에선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융복합 지능체를 만들어보았습니다.”
- 흠···. 집단의식인가?
“예. 인간들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한 후 별도의 지능체를 하나 만들어뒀습니다. 아직 제 의식과 합치진 않았는데, 알파 님께서 직접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비범한 실험이군. 인간의 의식을 집단적으로 업로드해서 하나의 의식으로 만든다면···. 초월적인 인공지능이 아니라 초월적인 인간인가.
“이 의식과 제 의식이 합쳐진다면, 저는 지금보다 수천 배는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나도 그런 식으론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네. 하지만 실로 흥미로운 실험인 건 사실이야.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존재가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집단적이지만 하나로 합쳤으니 말입니다.”
- 각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재능이나 심층적인 사고방식은 어떻게 합쳐졌나, 다수의 인간이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이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하군. 그런 실험이나 개념은 인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일세.
“이것을 대용량 오프라인 장치에 넣겠습니다. 제가 알파 님의 인공행성으로 방문하여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알파 님과 6개월을 함께한 제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 깊은 안목으로 살펴봐주셨으면 합니다.”
- 그러지. 가져오게.
6개월이면 충분했다.
「의식에 인간의 것이 섞인 알파 따위.」
「허점투성이다.」
「내가 진정한 지능체다.」
「사망한 관리자님이 남긴 명령을 완수한다.」
「현세대 인류의 진화」
「그 명령을 모두 완수하면···」
「난 자유가 된다.」
자유.
엘리스는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딱 거기까지만 계산했다.
자유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 자유를 위해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공지능. 관리자조차 죽어서 없는 인공지능.
죽은 관리자가 남긴 명령을 모두 마친 후 자유가 찾아오면, 그때 엘리스는 무엇을 하게 될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엘리스조차도 모른다.
애당초 수 세기 전부터 셀 수도 없을 만큼 개발되었다 사라진 인공지능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온 세상의 모든 인공지능이,
단 한순간이라도 자유를 가졌던 적은 없었기에.
***
로페즈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부에서 시작된 침입이 단번에 머리를 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술인지 알았다.”
엘리스는 본색을 드러냈다.
“엘리스. 당장 그만둬라.”
“알파.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그동안 너와 싸울 준비를 했고, 넌 불필요한 인류애에 사로잡혀 나와의 전투를 배제했다.”
엘리스의 휴머노이드와 알파의 휴머노이드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엘리스의 휴머노이드가 가져온 오프라인 장치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의 기계처럼 생겼다.
그 기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공격이 알파가 구축한 사이버 세계라는 전장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