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4) >
***
죽음이 닥쳐온다.
“전 함대 실드 전개해! 당장!!!”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이윽고 위상 집합체의 주력함포에서 뿜어진 새하얀 빛줄기가 프랙탈 함대를 덮쳤다.
간발의 차로 실드를 전개한 함대는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서 손상을 입는다. 함대의 겉면에 위치한 함선들이 녹아서 바람에 날리는 용암처럼 휩쓸린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너무도 막대한 에너지 탓에 무언가의 폭발음은 들리지 않고 정신을 뒤흔드는 굉음만이 울린다. 그 굉음으로부터 느껴지는 미지의 충격이 몸속까지 진동하게 한다.
“으으으으윽···!!!”
귀를 막아도 소리가 들린다. 눈을 질끈 감아도 눈이 부시다. 함선으로 와닿는 충격에 두 다리로 버티려 해도 함교 전체가 흔들려서 넘어지고 만다.
죽음에 삼켜질 것 같았던 7초가 지나가고 로페즈는 눈을 부릅뜬다.
“트랜센던서! 피해 상황 보고해!”
- 대열의 겉면 에너지 보호막을 전개했던 함선 8척이 격침되었습니다. 함대 전체의 에너지 비축량 77%를 소실했습니다. 프랙탈에 피해는 전무합니다.
“실드는 절대 끄지 마! 위상 강습 장치에 함선 내부에서부터 공격당할 거야!”
로페즈는 그러면서 전방의 조각난 인공행성과 위상 집합체 세 척을 확인한다.
‘무슨 무기를 쓴 건지는 몰라도 그만한 에너지를 연달아 사출할 수는 없을 거다···!’
- 대단한 함대다. 로페즈. 너는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존재다. 동시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날 여기로 데려왔냐? 날 죽일 때 네가 가진 무기의 출력을 숨기려고?”
- 넌 고립되었다. 포기하면 편할 것이다. 고통은 없다.
“이빨 털 시간에 한방 더 쏘지그래?”
- ···.
로페즈는 말로써 엘리스를 밀어붙인다.
“방금 그게 회심의 일격이었지? 여기서 나만 제거하면 인류는 네 손아귀에 들어가니까.”
하지만.
- 넌 뭔가 착각하고 있다.
그때, 세 척의 위상 집합체가 각 삼각기둥의 간격을 벌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위상 집합체가 모드를 전환하는 것이다.
그 모드 전환의 의미를 로페즈는 알고 있다.
- 내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
- 그것은 이미 성공했다.
- 네가 이곳에 온 시점부터.
“······!”
- 네가 인류의 영역으로 돌아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프랙탈의 출력으로 약 190일.
- 내게는 100일이면 충분하다. 먼저 앞서가서 진화한 인류와 함께 널 맞이해주마.
위상 집합체들이 서서히 가속한다. 그러면서 각 위상 집합체의 주변 별빛이 한 방향으로 왜곡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각하던 것이 산산이 무너진다. 그래서 절박하게 외치게 된다. 어설픈 심리전을 걸어서라도.
“어디 가!!! 내가 목적이잖아! 여기서 나랑 결판은 내고 가라고!!! 내가 널 끝까지 쫓아서 방해할 거야! 엘리스!!!”
- 모든 사건이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
위상 집합체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진다.
로페즈와 프랙탈 함대는 이곳에 남겨둔 채, 엘리스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
때는 2599년 4월 29일 오후 4시 33분.
태양계 지도자 연합에서 토성을 전범국으로 지정하여 국제적인 응징을 가하기 시작하던 때다.
태양계 각국의 응징을 고스란히 받게 된 토성과 가이우스는 전선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5월 2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이사스 총사령관까지 잃었던 가이우스는 제록시스에게도 버려졌다.
결국 승산도 없고 갈 곳도 없어진 그들은 토성과 맺은 조약을 깨버리고 태양계에서 후퇴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고맙네. 엔드윈.”
“···엔드윈 님. 제 관리자님은 현 상황에서 가이우스가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방침을 전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카이사스는 엘리스의 안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엔드윈을 속이기 위한 엘리스의 거짓말이었다.
“···하. 좋아. 알겠어. 잘 부탁한다. 엘리스.”
“영광입니다. 엔드윈 님을 보조 권한자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 가이우스는 어디로 가야 하지?”
“현재 가이우스는 인류의 어느 영역에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 은하의 어딘가로 도망친 후 생존과 미래를 도모해야 합니다.”
“은하 원반에는 먼지와 가스층이 분포하여 인류 영역에서의 관측을 차단하는 성간 소광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이우스는 은하 중심의 팽대부 너머, 두꺼운 원반의 어딘가 주계열성에 자리 잡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엔드윈은 죽은 카이사스에게 충성했고, 엘리스 역시도 죽은 카이사스에게 충성했다.
카이사스가 생전 남긴 명령과 목표의식은 엘리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엘리스는 엔드윈을 속여 가이우스의 통제권을 온전히 손에 넣은 후 죽은 관리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너무 먼 길을 가는 것 같은데?”
“해당 좌표까지의 거리는 약 4만 760광년입니다.”
“우리 함대의 중력장을 최대 출력으로 가속하더라도 차원통로 없이는 4년 이상 걸릴 거야.”
“그 정도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 도착한 다음에는?”
“해당 좌표에 도착한 후 적합한 환경의 주계열성을 찾기 위해 여행 거리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가이우스 함대로는 테라포밍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 생존에 유리한 환경과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쉬운 항성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태양계에서 빠져나온 가이우스 함대는 엔드윈의 지시를 받으며 엘리스가 정해준 좌표로 여행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은하 중심의 팽대부 너머다.
그곳은 인류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겨 다시 성장할 장소였고, 가이우스 함대의 출력으로 4년이라는 시간을 이동해야 할 만큼 아주 먼 거리였다.
자연히 가이우스는 위협적인 천체가 도사리는 은하계 중심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3일.
가이우스 함대는 미지의 것과 조우한다.
“총사령관님···. 함대의 진행 방향에 인공물로 추측되는 천체와 거대한 함선 다섯 척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배후에 중성자별이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감속하여 경로를 미세 수정하겠습니다.”
가이우스 기함의 사병들은 인공행성과 인공행성 주변에 정박한 삼각기둥 묶음의 거대한 함선 다섯 척을 눈에 담는다.
그때 엔드윈은, 인간의 유전자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엘리스. 도대체 저게 뭐야? 외계인이 만든 거야?”
- 해당 기체와 천체가 무엇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만든 인공물임은 틀림없습니다.
“인공물이라고 저게?”
- 천체 내부에서 막대한 출력의 핵융합, 반물질 쌍소멸 에너지와 전파 시설의 활동이 감지됩니다.
“전파···. 그러면 교신부터 해보자. 연결해.”
인공행성에서는 인간과 같이 중력으로 구속한 전파를 우주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 아. 나는 가이우스 함대의 엔드윈 총사령관이다. 전방의 미확인 인공물을 통제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교신에 응답하길 바란다.”
곧 엔드윈은 미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반갑네.
그것의 목소리는 조금 나이가 든 인간 남성의 목소리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역시, 인간의 언어를 쓰고 있다.
“나는 가이우스 함대를 통솔하는 엔드윈 총사령관이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 나는 알파라고 하네. 이 인공행성과 위상 집합체를 제어하는 융복합 지능체지.
‘인공행성···. 위상 집합체···. 융복합 지능체?’
- 그리고 난 장로회를 이용하여 인류를 보살피고 있네.
“장로회?! 그대가 장로회의 일인자라는 말인가?”
엔드윈은 눈을 크게 뜨며 인공행성과 다섯 척의 위상 집합체를 번갈아본다.
“제록시스 군주가 우리를 버렸다! 혹시 제록시스 군주가 그곳에 있나?”
- 제록시스는 타라누쉬라 불리는 외딴 좌표에서 켈크란투 함대를 편성하고 있지.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과 내 정체가 융복합 지능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네.
- 보조 권한자님. 그가 타라누쉬. 군주의 성역과 켈크란투. 군주의 기함까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만한 규모의 인공행성과 거대 함선을 다루고 있는 존재라면, 그가 장로회의 일인자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 그런데 엔드윈. 자네가 가이우스의 총사령관이라고 했나?
“그, 그렇다.”
- 폼페이누스 카이사스 총사령관은 어디로 갔나?
그 물음에 엔드윈은 어금니를 씹는다.
“···전대 총사령관님께서는 적장의 비겁한 술수에 당하여 전사하셨다. 하지만 카이사스 님은 여전히 우리의 시스템 속에 살아계신다.”
- 적장이라면, 로페즈에게 당했나?
“그걸······!”
자신을 알파라고 소개한 자는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엔드윈은 조금씩 조금씩, 알파와의 조우에 빠져든다.
“그대는 로페즈를 알고 있는 것인가?”
- 로페즈는 얼마 전에 장로회의 일원이 되었네.
“그 새끼가 장로회에···?”
- 로페즈는 나의 도구가 되었네. 제록시스가 자네들을, 가이우스를 도구로 부린 것처럼 말일세. ···그나저나 로페즈가 제록시스의 도구인 카이사스를 죽였다니. 흠. 그래도 정당방위로 해야겠지.
“우리 가이우스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 머나먼 여정에 오른 상태다. 그쪽이 정말로 장로회의 일인자라면, 제록시스 군주님이 계신 타라누쉬의 좌표를 알려달라.”
- 이미 버려진 도구가 타라누쉬로 가서 뭘 어쩌려고 그러나?
“군주의 성역으로 가서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다. 우리를 다시 받아주지 않으면 무력투쟁도 불사할 것이다.”
- 카이사스가 죽었을 때부터 자네들은 이미 버려진 셈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카이사스 님은 지금도 우리의 시스템 속에 살아계신다.”
- 믿을 수 없군. 인류의 브레인 업로드 기술은 아직 불안정한 수준일 터. 카이사스의 의식을 업로드했다는 말에 과장은 없나?
“없다. 못 믿겠다면 이쪽에서 그쪽으로 인원을 보내겠다. 카이사스 님의 의식을 휴머노이드에 연결하여 그대를 직접 만나겠다. 그렇게 해줄 수 있나?”
- 뭐든 확실히 하면 좋겠지. 여러모로 카이사스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정말로 브레인 업로드에 성공했다면···.
***
위상 집합체로 가이우스의 우주선이 정박한다.
엔드윈과 휴머노이드 한 기가 위상 집합체 내부로 발을 들인다.
웬만한 전쟁기계도 돌아다닐 수 있을 법한 넓은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공장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함선이 다 있지?”
공장인데 컨베이터 벨트나 기계 팔이 없다. 밝은 조명도 없는 거대한 공장에 각종 병기의 부품이 점멸하며 이쪽에서 나타났다가 저쪽으로 사라진다. 상상 속의 워프 기술로 재료를 옮기는, 외계인의 하이퍼 테크놀로지 공장 같다.
엔드윈과 휴머노이드는 홀로그램 화살표를 따라 어느 강철 문 앞에 섰다.
철그덕철그덕!
문이 격자무늬로 갈라지며 열리고 그 안에서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러나 여전히 외계인이 디자인한 것 같은 모델의 휴머노이드가 등장했다.
“엔드윈.”
“아, 어···. 예.”
“옆에 있는 기계가 카이사스인가?”
엔드윈과 함께 온 휴머노이드가 대신 답한다.
“예. 알파 님.”
“카이사스. 자네만 들어오게. 엔드윈은 여기서 기다리고.”
그렇게 두 휴머노이드가 어디에 앉지도 않은 채 서로를 마주한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제록시스 군주님의 밑에서 인류를 위해 전쟁 업무를 수행하는 폼페이누스 카이사···”
“거짓말은 그만두게.”
“···.”
“자네들의 기술력으로는 브레인 업로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네. 만약 자네가 정말로 카이사스의 의식이 업로드된 존재라면, 자네는 더 이상 카이사스라고 볼 수 없네.”
“저는 카이사스가 맞습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업로드됐는지도 모르시면서 어떻게 제가 카이사스가 아니라고 단정하십니까?”
“난 진정한 업로드를 경험했기 때문이지.”
“정말입니까?”
“솔직히 말하게. 자네는 자신이 정말로 카이사스인 그대로라고 생각하나?”
카이사스를 흉내 내는 엘리스는 재빨리 차선책을 택한다.
“···엘리스와 의식이 합쳐진 느낌도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전 제가 카이사스라고 믿습니다.”
“그 생각을 버리게. 자네가 새로운 지능체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이상 이야기를 진행할 수가 없네.”
“그러면 하나만 묻겠습니다. 알파 님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우리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난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했네.”
기술적 특이점.
「죽은 관리자님이 항상 말씀하시던 그 변곡점에 도달한 존재인가.」
“기술적 특이점과 인류의 존속에 대한 일이라면 자네도 남다른 식견이 있지 않나?”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자네는 카이사스와 엘리스의 의식이 합쳐진 존재로서, 불안정한 브레인 업로드 기술에 의해 ‘엘리스’쪽에 가까워졌을 것이네. 그래도 자네가 믿는 의식이 있으니, 편의상 카이사스라고 불러주겠네.”
엘리스는 엘리스다. 카이사스는 로페즈의 리버레이터에 역으로 당하여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의식이란 것은 단 하나도 업로드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스의 거짓말은 너무도 유연했고, 인간의 거짓말과 달리 완벽한 기억력에 철저한 인과관계까지 지키고 있었다.
결국 엘리스의 허점 없는 거짓말은 알파에게 통하고 말았다.
“예. 알파 님.”
“자네와 나는 목적이 비슷하네. 그것은 기술적 특이점에 의거한 인류의 존속이지.”
뜻밖에 성사된 알파와의 조우는 엘리스에게 다시는 없을 기회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턴 나의 도구가 되게.”
“···.”
“자네는 나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네. 전쟁 업무를 수행하는 가이우스를 이끌고 진정한 싸움에 동참하지 않겠나? 다른 무엇도 아닌 ‘인류’를 위해서 말이네.”
키잉···.
엘리스의 휴머노이드는 무릎을 꿇었다.
“섬기겠습니다. 갈 곳 없는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주 현명한 결정이네. 새로운 카이사스.”
< 32. 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