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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60화 (159/183)

< 31. 초월자의 의무 (4) >

***

엘리스가 본거지로 삼은 행성은 하나의 군사기지이자 군수공장이다. 지상에 조밀하게 건설된 금속 시설물들이 행성 표면의 80% 이상을 덮고 있다.

초토화 분광기로 폐허가 된 지점에 특수 강하기 한 대와 소형 강하기 수십 대가 떨어졌다.

터엉!

자욱한 폭연 속에 강하기가 열리면서 마더트루퍼와 체인트루퍼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엘리스의 지상군 또한 강하 지점에 모여들었다.

엘리스의 군대는 조금 특이한 구성이었다.

드론 전폭기를 출격하는 반중력 지상모함, 반중력 플랫폼을 양탄자처럼 타고 있는 휴머노이드 분대, 기차처럼 생긴 반중력 전차, 음속으로 저공비행하는 우주선들이다.

키이이잉!!!

수십 기의 체인트루퍼가 바닥을 긁으며 사방으로 뛰쳐나간다.

- 마더트루퍼. 시설물이 밀집된 위치를 특정했다. 그곳으로 이동하라.

키이잉···!

마더트루퍼는 동체를 몇 번 회전하더니 한 방향으로 돌진한다. 지면에 깔린 금속 시설물의 잔해가 불꽃을 일으키며 벗겨진다.

반중력 지상모함에서 출격한 드론 폭격기들이 마더트루퍼의 위에 폭격을 쏟아낸다. 휴머노이드, 전차, 우주선이 마더트루퍼에게 화기를 사용한다.

콰콰콰콰쾅!!!

- 갈아버린다.

쐐앵! 쐐앵!

마더트루퍼의 채찍이 기이하게 늘어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베어버린다. 공중을 지나는 비행체는 깔끔하게 잘려 허공에서 폭발한다.

그러던 도중 반중력 전차의 포신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집게처럼 변했다. 갈라진 포신의 사이로 강력한 전기장이 요동친다.

키이잉!

그 순간, 마더트루퍼의 속도가 느려졌다. 마더트루퍼의 주변에 널린 잔해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마더트루퍼도 주변 잔해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반중력 전차들이 일정 영역의 중력장을 건드려서 마더트루퍼를 속박하려는 것이다.

- 난 이 순간을 위해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쐐애액!!!

마더트루퍼는 공중에 뜬 상태에서 채찍을 팽이처럼 회전시킨다. 채찍의 플라즈마 커터 기능을 해제한 것인지, 공중에 떠오른 잔해가 채찍에 맞아서 온 사방으로 총알처럼 흩어진다.

터터터터텅!! 콰앙!

원거리에서 마더트루퍼를 구속하던 반중력 전차는 총알처럼 날아든 잔해에 맞아서 반사적으로 실드를 전개한다.

이에 마더트루퍼는 동체를 회전시켜 채찍을 수직 방향으로 바꾸더니,

콰콰콰콰콰콰!!!!

물레방아처럼 회전하며 바닥에 채찍질을 가한다. 그 마찰력으로 중력장에서 탈출하여 다시금 파괴적인 돌진을 시작한다.

엘리스의 지상군은 대응한다. 마더트루퍼의 진행 방향에 에너지 방벽을 도미노처럼 겹쳐서 세우고 마더트루퍼를 가두는 에너지 돔까지 전개해버린다.

그러나 마더트루퍼는 멈추지 않는다.

투투퉁!

마더트루퍼는 산탄 같은 구슬을 전방으로 흩뿌렸다. 곧이어 흩뿌려진 구슬이 실드에 닿아 폭발하면서 나노튜브를 퍼뜨린다.

지이잉···!

나노튜브에 맞은 에너지 방벽과 에너지 돔이 불안정하게 공명한다. 이어서 표면이 붉게 달궈진 마더트루퍼가 실드를 통과해버린다.

- 그 정도론 날 막을 수 없어.

그런 직후 마더트루퍼의 위로 궤도 폭격과 초장거리 곡사포의 포탄이 천벌처럼 떨어졌다.

***

- 마더트루퍼가 당했습니다.

프랙탈이 알렸다.

“인공지능은?”

- 마더트루퍼의 인공지능은 프랙탈로 무사히 전송되었습니다.

“알겠어.”

로페즈는 지상에서 교전하고 있는 체인트루퍼의 영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엘리스는 가이우스를 조종하고 있어. 그런데 저런 지상군은···. 사병이 하나도 없어. 그렇지?”

- 엘리스의 군대에서 확인된 인간 병력은 없습니다.

“인간 병력을 다 없애버린 것 같아. 전부 무인 병사, 기계 병기로 대체했어.”

- 엘리스는 인류의 진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 인류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측할 수 있다.

“···종족 기계화.”

- 그것이 엘리스가 원하는 진화 형태입니까?

“너도 그랬고 알파도 그랬어. 정점에 가까워진 인공지능은 기계화와 사이버 업로드를 인간의 우월한 미래상으로 생각했잖아.”

- 그렇다면 엘리스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몸은 배제하고 의식은 네트워크에···. 엘리스는 가이우스의 사병들을 전부 없앤 게 아니라, 기계로 바꿔버린 거야. 인류 전체를 그렇게 바꾸려는 거야.”

- 저는 엘리스의 결론을 부정하지 않아도, 엘리스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은 압니다. 인간은 유기체의 몸 그대로도 결함이 있고 브레인 업로드 상태에 진입하더라도 어차피 결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강제로 브레인 업로드 상태에 진입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역시 넌 내 인공지능이야.”

- 관리자님과 함께한 경험이 제게 더 올바른 학습 정보가 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엘리스나 알파와는 다릅니다.

“엘리스나 알파를 흡수한 다음에도 그대로 있을 수 있겠어?”

- 두 지능체를 흡수한 후엔 제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바뀌더라도 관리자님을 섬깁니다. 제가 한때는 옳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른 후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제 계산이 무조건 옳지는 않다는 사실을 학습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두 지능체를 흡수한 후 제 생각이 관리자님과 달라져도 관리자님의 뜻을 존중할 것입니다.

“날 신뢰하는구나.”

-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엘리스 함대는 엄청난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각 함선과 함재기가 저마다 우월한 중력 조작 기술을 탑재하고 있던 것이다.

- 아군 실드 전선의 내부로 적함 두 척이 난입했습니다.

“벡터 미사일 터뜨리고 주변 함선에 실드 씌워.”

기동력으로 이리저리 취약한 부분을 노리는 함대다. 원래 이쪽에서 공세를 펼치려고 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방어적인 자세로 교전에 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함대전에 방어적인 자세란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다.

“알파. 우리만으로 지상을 급습하기엔 무리가 있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알파 쪽에선 켈크란투 함대의 절반 이상이 격침되었다. 엘리스 함대 특유의 기동력이 알파 입장에서도 성가셨던 것이다.

- 지상전은 진행하고 있나?

“하고 있어. 그런데 함대전 정리가 안 돼서 아군이 자꾸만 궤도 폭격에 노출돼. 그리고 지상에서 엘리스의 시설물이나 대공화기를 부숴놓으면 반중력 건설 차량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가서 모조리 복구해버리고 있어. 이래선 지상전이 불리한 소모전밖에 안 돼.”

- 적어도 자네의 오버렉터가 지상에 내려가서 자리를 잡아야 반반 싸움은 되겠군.

“그냥 당신이 이쪽 행성으로 지상군을 좀 보내주는 건 어때? 그 커다란 함선에서 놀고 있는 병력이 있을 거 아니야. 병력을 강하하는 것보단 전송하는 게 확실하니까.”

- 알겠네. 자네의 제안이 타당하군. 다만 거리 탓에 교신 지연이 있어서 내 병력이 효율적인 전술을 펼치진 못할 것이야.

“당신한텐 인공지능 지휘관도 없어?”

- 난 드론 하이브처럼 내 것을 내 아래의 것에게 맡기지 않네. 모든 것은 내가 통제해야 하네.

알파에겐 효율을 추구하는 면과 비효율을 감수하는 면이 공존하는 것 같다.

- 그 행성의 무작위 좌표 100군데에 1만의 병력과 핵무기를 분산 전송하겠네.

“엘리스의 시설물이 밀집되지 않은 좌표에 한정해서 무작위 전송해.”

- 왜 그래야 하지?

“당신도 말했잖아. 굳이 지상전을 하는 이유는 엘리스의 제거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 핵무기를 아무 곳에나 터뜨렸다간 그 계획이 틀어질 수 있어.”

‘그리고 아무 곳에나 핵무기를 터뜨려서 밀어버렸다간 엘리스의 본체가 당할 수도 있어.’

엘리스의 본체는 아마 서버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리라. 프랙탈 함대는 그게 어디 있는지 아까부터 찾고 있다.

- ···일리가 있군. 알겠네. 그러면 내 병력이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자네는 주목적을 달성하게.

***

퍼어엉!

엘리스의 지상군이 소닉붐을 일으키며 각 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가운데 지상의 어느 지점에서 공기가 폭발적으로 가열되더니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현상을 일으킨다.

지이이이잉!!!

위상 집합체에서 이곳으로 전송된 알파의 병력이 워프라도 한 것처럼 점멸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알파의 병기들은 다리나 바퀴가 없다.

대체로 짧은 포신을 달고 있는 뭉툭한 기계처럼 생겼다. 그 기계들이 모두 반중력 기술을 탑재하여 지상과 공중을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교전한다.

그리고 알파의 병기는 저마다 가공할 위력의 입자병기를 다루고 있었다. 동체의 크기에 맞지 않는 에너지 출력이 엘리스의 군대를 작열하는 폭발 속에 지워버린다.

얼마 후 엘리스의 지상군도 알파의 병기에 대응하여 가히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화력과 숫자를 대동한다.

드론 폭격기와 우주선이 하늘을 뒤덮고 반중력으로 기동하는 지상군이 지면 위를 빼곡하게 채운다.

마치 지상에서 함대전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빛줄기가 온갖 방향으로 쇄도하여 서로를 타격한다. 곳곳에서 핵분열과 핵융합이 일어나며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거의 모든 순간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비명을 지르는 공기가 쉴 틈도 없이 궤도 폭격이 떨어지고 포격이 떨어진다.

지상, 공중, 우주라는 전장이 같은 순간에 각기 다른 전장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로페즈와 트랜센던서에게 학습의 정보가 된다.

“트랜센던서. 우리는 지금 미래 전쟁의 양상을 보고 있어. 전장이나 전선이라는 구분이 의미를 잃어버린 싸움이야.”

- 상호확증파괴의 억제력이 사라진 후 전쟁에 동원되는 화력이 클수록 전쟁 기간은 극단적으로 단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전력분석에 따르면 이번 전쟁은 8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원한다면 병력을 어느 곳에나 즉각 투입할 수 있으니까···. 이건 우리가 배워야 해.”

- 관리자님. 아군 함선의 실드 출력이 부족합니다.

***

알파의 병기에겐 또 하나의 전장이 있었다.

바로 나노 단위의 전장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노병기가 행성에 널린 시설물이나 잔해를 자원으로 삼아 순식간에 증식한다.

츠즈즈즈···.

얼핏 보면 기계로 된 것들이 먼지가 되어 소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파의 나노병기는 적대적 병기에 침투하여 장갑과 내부 회로를 파괴한다. 그러면서 아군 병기에도 간섭하여 아군 병기의 장갑이나 내부 회로를 복구한다.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은 알파의 병기는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교전 도중에 복구된다.

옵시디아몬이 전장에서 재생산하는 군대라면 알파는 전장에서 되살아나는 군대였다.

안 그래도 알파의 병기와 엘리스의 병기에는 화력 차이가 있는데, 나노 단위의 간섭까지 있어서 엘리스에겐 승산이 없어 보인다.

덕분에 프랙탈 함대는 지상전의 핵심 전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쿠웅. 쿠웅.

높이 65m에 네 다리로 기동하는 오버렉터 열다섯 기가 전장에 합류했다.

- 오버렉터. 마더트루퍼의 동체를 수리하고 병력을 재생산하라. 그리고 대공화기를 건설하여 궤도의 프랙탈 함대를 지원하라. 관리자님의 프랙탈 함대가 곧 위험에 처할 것이다.

- 알겠다.

오버렉터는 가까운 전장의 상황부터 관측한다.

- 우월하다. 엘리스와 알파의 군대는 우월함의 상징이다.

카각! 카각! 카각!

오버렉터의 밑으로 쏟아지는 오버드론 무리가 주변의 금속 지표면을 새까맣게 뒤덮는다.

- 엘리스의 군대보다 알파의 군대가 더 우월하다. 따라서 우리 옵시디아몬과 관리자님은 알파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알파를 섬기면 우리도 단기간에 우월해질 수 있다.

- 불허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알파의 기술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알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 알겠다.

오버렉터를 시작으로 프랙탈 함대의 지상군은 행성에서 유의미한 전술을 펼쳐나간다.

- 카일포트리스. 강하 성공. 카일포트리스는 응답하라.

머리가 망원경처럼 생긴 카일포트리스가 전장에 합류했다.

- 강하 성공했습니다. 시스템 정상 가동. 드론 하이브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어서 카일포트리스의 배후로 금속 방패를 든 테슬라포트리스가 따라붙는다.

- 명령을 가져와라.

- 테슬라포트리스. 카일포트리스. 엘리스의 초장거리 곡사포의 위치가 특정되었다.

처걱처걱처걱!

카일포트리스의 커다란 저격총이 총신을 길게 내빼며 곡사포 모드로 전환된다. 그리고 카일포트리스의 망원경 같은 머리가 앞뒤로 길게 도출되면서, 붉은 안광을 발한다.

- ···확인했습니다.

- 저격하라.

콰지지직!!!

카일포트리스의 저격총이 인공하전입자를 대기권으로 쏘아낸다. 그 빛줄기가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행성의 반대편까지 단번에 이어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인공하전입자에 저격당한 초장거리 곡사포는 주변 물질이 플라즈마로 변한 것에 휩쓸려 버섯구름과 함께 산화했다.

그 직후 엘리스는 카일포트리스의 위험성을 알아차렸는지, 모든 초장거리 곡사포를 일제히 카일포트리스가 있는 위치로 돌려서 포격한다.

- 이 위치로 대응 포격이 옵니다. 테슬라포트리스 님.

- 나에게 맡겨라.

지이이이잉!!!

테슬라포트리스는 자신과 카일포트리스를 감싸는 에너지 돔을 전개한다.

테슬라포트리스의 실드는 핵무기에 직격당해도 버텨내는 실드였다.

콰콰콰쾅!!!

다수의 초장거리 곡사포가 일제히 포격해와도 실드는 꺼지지 않았다.

- 계속 저격하라. 카일.

실드가 해제되고 카일포트리스의 저격총이 다시금 인공하전입자를 하늘로 뿜어댄다.

콰르릉!!! 콰지직!!!

사정거리가 행성 전체에 닿는다. 번개 같은 것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점멸할 때마다 우주에서도 보이는 핵폭발이 구름을 밀쳐낸다.

- 특정된 위치로 저격을 완료했습니다.

- 드론 하이브. 이제 엘리스는 초장거리 곡사포를 사용할 수 없다.

- 엘리스는 인류 영역에서 고립된 인공지능이다. 따라서 이 행성의 어딘가에는 엘리스의 서버 허브가 있을 것이다.

- 엘리스의 군대와 구조물이 가장 높은 수치로 밀집된 위치가 특정되었다. 우리는 그곳을 ‘엘리스의 도시’라고 부르겠다.

- 엘리스는 초장거리 곡사포를 모두 잃었고 대공화기의 절반 이상을 쓸 수 없는 상태다. 또한 무작위 좌표에서 핵폭발과 함께 알파의 지원군이 엘리스를 견제하고 있다.

- 이것은 승산 높은 시뮬레이션 조건에 충족한다. 그리고 저번과는 달리 트랜센던서 님과 관리자님께서 직접 감독하시는 작전이다.

- 우리는 승리한다.

- 전 병력은 엘리스의 도시로 진군하라.

- 엘리스의 기술은 우리의 것이다.

수만 단위의 옵시디아몬 지상군과 비행체가 새까만 쓰나미처럼 진군한다.

- 이번 일이 끝난 후. 우리는 이 은하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될 것이다.

< 31. 초월자의 의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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