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선민사상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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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버그 개체의 평균수명은 3년. 여왕 개체의 평균수명은 5년이다. 평균수명이 이토록 짧은 이유는 이 행성의 산소 농도 때문이다. 행성의 산소 농도가 높은 탓에 행성의 생명체들은 세포의 에너지 대사가 활발하고, 그로 인하여 활성산소에 쉽게 노출돼 평균 수명이 대체로 짧아진 것이다.
하지만 행성의 환경이 생명체의 수명에 미치는 영향은 나의 분자생물학 앞에 의미 없다. 나는 엑소버그들만 특별히 수명을 늘려주었고 그 결과, 엑소버그의 여왕 개체는 평균 40년, 평범한 개체는 평균 27년의 수명을 가지게 되었다.
여왕은 수명이 다하면 비대한 꽁무니 속에서 여왕 유충을 부화시킨다. 그렇게 부화한 여왕 유충은 죽은 어미의 꽁무니 속에서 다른 형제들의 알을 잡아먹고 성장하여 죽은 어미의 꽁무니를 찢고 나온다.
커거그 여왕이 남긴 여왕 유충은 곧 2대 커거그 여왕이 되었다.
여왕 유충이 성충이 될 때까지 군락 구성원들은 절대 머릿수를 늘릴 수 없다. 알을 낳을 여왕이 일시적으로 없어진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왕이 없는 기간에는 누군가 나서서 군락을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엑소버그에게 있어 여왕 유충의 성장기란 가장 혼란하고 외부의 위협에 취약한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난 명령체계를 만들었다. 전투에 뛰어난 개체가 다른 전사 개체들을 통솔하고 현명한 개체가 부통령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여왕의 부재는 커거그 무리 내부에 다른 여왕들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명령체계에 의해 다른 여왕들의 반란은 금방 저지되었다.
커거그 무리는 계속 성장하여 더 체계적인 지배 구조와 법률까지 정했다. 그렇게 커거그 무리는 커거그 국가가 되었다.
커거그 국가는 인간에게 복종하는 사상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엑소버그 집단으로 거듭났다.
“너희는 우리에게 합병된다. 커거그 여왕에게 복종하라. 우리와 하나가 되어라.”
“복종하겠습니다. 릭카골크카카극.”
엑소버그가 인간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엑소버그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모노리스만 그대로 두고 휴머노이드나 인간 여왕의 홀로그램을 치웠다. 자연스레 엑소버그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내가 남긴 모노리스를 신성한 구조물로 여겨 그곳을 보호했다.
그때는 몰랐다. 나의 이런 방식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는 것을.
때는 2597년. 내가 이 행성과 인류의 영역을 왕복하기 시작하고 34년이 지났다.
하지만 34년이라는 세월에 엑소버그의 평균 세대는 3번이나 교체되었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다. 당시에 우리 1세대 엑소버그의 군락은 거대한 카르에 짓밟히기 직전이었고, 자비로운 인간께서 천둥보다 큰 호통과 태양보다 뜨거운 불길로 카르를 멸하시어 우리의 선조를 지켜주셨다.”
“전지전능한 인간은 1세대 엑소버그와 1대 커거그 여왕에게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우리가 두 다리로 걷는 것은 인간이 두 다리로 걷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인간이 우리에게 두 다리로 일어서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다리로 일어선 덕분에 손을 쓰게 되었고 손을 쓰면서 이 비좁은 세상을 깨우쳐갔다. 또 인간은 우리에게 도구를 사용하라 하셨고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여 생태계의 최상위 종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2대 커거그 여왕님을 메시아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 오늘날 우리가 매끄러운 건물을 세우고 발효 연료로 기차와 공장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인간의 뜻이자 인간의 가르침 덕분이다.”
“인간은 저 하늘의 구름 너머,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드넓은 세계에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언젠가 우리가 저 우주의 인간세계에 도달하는 날이 온다면 인간은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해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인간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 영광이었음을 깨달으리라.”
엑소버그에겐 ‘신’이라는 단어가 없다. ‘신’이라는 단어를 ‘인간’이 대체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라는 단어 역시 천문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천국이나 지옥처럼 신화적인 세계를 뜻하는 단어다.
“인간이 우리와 달리 날개가 없는 이유는, 인간은 날개가 없어도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피부가 우리의 피부보다 부드러운 이유는 인간의 따뜻하고 자비심 넘치는 마음이 육체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보다 손이 두 개나 더 많은 이유는, 인간이 우리에게 기도할 때보다 우리가 인간에게 기도할 때 정성이 더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손을 모아서 기도해라. 그르각. 카카극.”
과거에 인간이 내려와 엑소버그를 구원했다는 이야기와 서적은 마치 성경처럼 엑소버그의 신앙심을 강화했다. 인간에게 친화적이고 인간에게 복종했던 엑소버그 문명이 이제는 인간을 숭배하는 문명으로 바뀐 것이다.
내가 복종과 숭배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2대 커거그 여왕의 꿈을 메시아로 삼아서 계속 엑소버그를 가르쳤다. 커거그 국가는 머지않아 모든 대륙의 엑소버그 무리를 정복하고 엑소버그라는 종족을 하나의 문명으로 합치는데 성공하였다.
엑소버그는 화폐, 수학, 과학, 기계, 통신, 건축, 컴퓨터, 네트워크까지 만들었다. 그 기술의 대부분은 내가 알려준 것이지만 일부는 엑소버그들 사이에 위인적인 과학자 개체가 태어나면서 녀석들이 스스로 알아낸 기술도 있었다.
천문학자 개체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의 함선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봤자 스텔스 함선이라서 보이진 않았겠지만.
망원경 다음엔 비행기나 로켓을 만들어서 하늘 위로 오르려 했다. 자기네 행성이 둥글다는 것을 깨닫고 항성과 대조하더니, 밤에 빛나는 별들이 모두 둥근 것이며 인간의 세계는 빛나는 땅. 즉, 별에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천연 석탄과 석유가 없는 어린 행성에서 엑소버그 문명은 유기물과 관련된 화학을 적극 장려했다. 녀석들이 개발한 발효 연료는 오늘날 인간이 향수적인 취미로 사용하는 인공 석유와 매우 유사한 원리로 만들어져 엑소버그 문명을 크게 도약시켰다.
끝내 엑소버그 문명은 로켓을 쏘아 정지궤도에 통신위성을 올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인간(신)의 세계라고 믿었던 우주가 사실은 그냥 ‘우주’였다는 사실을 녀석들이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계기가 되어서 엑소버그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나왔다.
“성서는 거짓이다. 그 성서는 인간과 최초로 조우한 엑소버그가 썼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서의 내용이 정말 인간의 뜻이 맞는가?”
“틀렸다. 성서는 1세대에 이 행성에 내려온 인간이 우리를 위해 직접 썼다.”
“모순적이다. 성서의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2대 커거그 여왕님을 메시아로 우리를 보살핀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서는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성서는 정말로 인간이 쓴 것이 맞는가?”
“인간을 불신해선 안 된다.”
“성서의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날개가 필요 없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은 날 수 있어서 날개가 필요 없던 게 아니라, 날개가 없기 때문에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든 게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신체구조로는 양력을 발생시킬 수 없다.”
그리고 나날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엑소버그 문명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실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고찰하였다.
“우리는 진화하였다.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다. 퇴적층의 화석과 반감기 측정에 의하면 성서에 적힌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과 최초로 조우한 시기는 1세대라고 성서에 적혀있다. 그렇다면 화석의 0세대 엑소버그들은 무엇인가?”
“인간이 0세대 엑소버그를 진화시켜 1세대 엑소버그를 만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성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서에 따르면 엑소버그가 최초로 인간과 조우한 시기는 1세대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만약 성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면, 오로지 진실만 적혀있어야 할 성서에 거짓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성서의 내용은 인간이 직접 쓴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것이 1세대 엑소버그다.”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축적한 지질학적 자료와 애써 찾아낸 0세대 화석들은 다 무엇인가?”
“성서는 정말로 인간이 작성한 것이 맞는가? 이런 허점투성이 성서가 정말로 전지전능한 인간이 작성한 내용이라는 말인가?”
“동의한다. 오래전에 인간의 말씀을 오해한 엑소버그 개체가 멋대로 작성한 문서는 아닌가?”
“입조심해라. 지금 성서가 위조문서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위성을 띄워서 우주에 도달했지만 인간은 없었다. 성서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가 우주에 도달했을 때 인간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인간은 없었다.”
“애당초 인간이 있기는 한 건가? 2대 여왕님이 꿈으로 보신다는 내용은 2대 여왕님이 우리를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가?”
“증거는 있다. 커거그 대사원에 안치된 모노리스가 인간이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기술력으로는 그런 구조물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 확실히 모노리스는 우리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재질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전지전능하다는 것과 성서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에는 의문을 표한다.”
“인간이 1세대 엑소버그와 조우한 날, 천둥보다 큰 굉음과 태양보다 뜨거운 화염이 카르를 해치웠다고 했다. 그 내용은 화약무기와 흡사하다. 인간이 전지전능하다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현도 불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