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선민사상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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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다쇼프 신우주문명의 표준 역법에 따라 지금은 태양력으로 2492년이다. 지구에서 탄생한 인류는 화성으로 이주한 후 태양계를 점거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인류는 나의 사업체인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에 의해 은하계로 문명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내가 아키엘이었던 시절, 나는 과학자로서 인류에 공헌하고 더 큰 일을 위해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내가 인류에 공헌했던 이유는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이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아크였던 시절, 아크였던 나의 의지가 곧 아키엘의 의지였다.
따라서 알파(Alpha)가 된 지금의 나도 그 의지를 이어받았다. 나는 자발적으로나 내 안에 남은 명령으로나 그 의지가 옳다고 생각한다.
인류에 공헌하는 것.
나는 인류의 번영과 존속을 원한다.
지금껏 인류를 키워온 가장 큰 가치는 다른 무엇도 아닌 과학력이다. 맹독도 두꺼운 가죽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었던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두뇌 덕분이다. 거친 손바닥에 들린 돌멩이가 휴대전화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것이 다 과학력 덕분이다.
두뇌란 지능이다. 머릿속에 담긴 지능이 인류를 키웠다.
그 지능을 도구로 이용하면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아키엘이 정치인도 종교인도 방송인도 아닌, 과학자가 되기를 선택한 게 아닐까. 그게 인류에 공헌하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었으니까.
과학 때문에 죽고 과학 덕분에 살아남은 인류는 과학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종족이다. 기술만능주의시대라는 시대적 특성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태양계 연합의 대표 격인 화성이 지금 국제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기술약소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따지고 보니 인간이 관여하는 만물에는 반드시 과학이 있었다.
나는 인류의 번영과 존속을 위해 마땅히 과학으로 공헌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깨달은 내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이자, 평생 목표이자, 존재가치다.
난 인간도 인공지능도 아니지만 근간은 인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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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존엄하며 우월하다.
태양계 바깥으로 문명을 퍼뜨리고 있는 인류가 그 어떤 외계 신호나 외계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근거다. 인류는 오늘날 거의 유일한 문명이 되었다.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가 탄생하기 위한 조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까다롭다. 그 까다로운 조건이 성립한 다음에도 지적 생명체가 문명을 이루고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선 다른 역사적, 환경적 조건들을 더 충족하여 살아남아야 한다.
나의 계산에 따르면 우리 은하에는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외계 문명이 반드시 어딘가에는 있다. 하지만 그 수가 터무니없이 작아서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대폭발 이후 약 138억 년이 흘렀다. 인간의 근간이 탄생한 시점은 길게 잡아봐야 고작 대폭발 이후 137억 년인 시점. 즉, 1억 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 지구의 탄생을 기점으로 계산하는 것도 턱없이 부족하다. 원시 성운에서 탄생한 태양이 유체 정역학적 평형 상태가 되면서 주계열성 단계라고 볼 수 있는 때를 기점으로 해야 유의미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우리 은하는 천문학적 계산에 따라 대폭발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한 초기에 속하는 은하다. 초기에 속하는 은하이므로 우주의 탄생과 함께 존재했지만, 지적 생명체의 탄생 조건이 성립하는 우주적 환경이 우리 은하에 형성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다.
우리 은하 중심에서 발견된 소수의 1세대 항성은 예전의 빛이 발견된 것으로, 지금은 대부분 초신성 폭발로 흩어졌거나 블랙홀이 되었다. 지금은 2세대 항성과 3세대 항성이 은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태양은 아마도 약 46억 년 전 초신성 폭발로 형성된 별이다.
그때는 대폭발 이후 약 92억 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때가 바로 우리 은하에서 지적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여길 수 있는 시기다.
나는 그 시기를 계산의 기준으로 잡았다.
초기 세대의 항성들이 기적적으로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행성을 품었다 하더라도, 초기 세대의 항성들은 항성 간 거리가 빈번하게 가까워지거나 초신성 폭발에 노출되거나 은하 중심의 블랙홀의 영향을 받았다.
적절한 중원소를 가진 항성과 적절한 성간물질을 갖춘 위치에서 그나마 높은 확률로 생명체 거주가능영역의 조건을 충족하는, 완벽한 격동의 시기이자 최초의 시기가 바로 46억 년 전이다.
따라서 약 46억 년 안에 우리 은하에서 외계 문명을 세운 지적 생명체 집단이 존재할 가능성을 계산해봤는데, 결과는 내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탄생했을 외계 문명보다 ‘미래’에 탄생할 외계 문명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여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인류는 이 우주에서나 이 은하에서나, 매우 일찍이 탄생한 선조 수준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먼 미래에 우리 은하에서 외계 문명이 탄생한다면 그때쯤 인류는 외계 문명이 보기에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나마 ‘외계 생명체’는 인류의 예상보다 많이 발견되면서 외계 문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지만, 현실은 그것뿐이었다. 문명을 이룬 지적 생명체는 지금껏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많은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이 고안한 방정식에 인류가 축적한 데이터를 대입해보아도 외계 문명의 존재 가능성이나 예상되는 숫자를 도출하면 언제나 0에 수렴했다.
과거에나 쓰였던 페르미 역설이 맞았던 것이다.
인간이 너무, 너무 일찍이 탄생했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 은하에는 우리 말고 다른 외계 문명이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지적 생명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계 생명체이면서 지적인 능력을 갖춘, 문명의 단계까진 도달하지 못한 생명체.
문명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간단한 집단이나 생활양식을 갖춘 지적 생명체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인류가 아직도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들이 아직 발전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과학이 아직 우리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주장했다. 외계 문명은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또 비교적 최근의 누군가는 주장했다. 인류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폭력적인 외계 문명이라면 진작 자멸했으리라고.
오늘날 나는 생각한다.
폭력적인 문명이라도 자멸을 이겨내고 하나의 항성계를 벗어나 다른 문명에까지 충분히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지금 인류가 그렇지 않은가.
인류는 폭력적인 문명이었으나 자멸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는 다른 별로 찾아가 거주 가능한 행성의 외계 생명체들을 말살, 포획한 후 인간의 환경에 맞도록 테라포밍까지 해버리고 있다.
물론 나는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은 인간의 것이고 인간은 이 우주에서나 이 은하에서나 선조에 해당하는 지적 생명체 집단이다.
따라서 나중에 다른 지적 생명체들이 문명을 이루고 발전한다면 인간은 그것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며, 우주적 문명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것들의 뒤처진 문명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인간이 그것들을 통제하고 지배해야 한다.
같은 인간끼리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전쟁을 벌이는데, 외계 문명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인간은 원래 그런 종족이니까.
우월한 선진문명을 이룩한 인간조차 생명체의 파괴적인 본성을 버리지 못하는데, 나중에 탄생할 외계 문명들이라면 오죽할까.
그래도 인간은 존엄하다.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도 있지만, 실제로 이 우주에서 그나마 가장 존엄한 종족으로 누가 있냐고 손을 꼽으면 반드시 인간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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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충분히 성장했다. 인류는 멸망의 위기를 벗어났고 다시금 과학에 힘을 쓰며 우주 곳곳으로 인간 문명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더는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겠다.
나는 인류의 배후에서 인류가 이 은하, 이 우주의 지배자가 되어 안정적인 번영과 존속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몇 없는 외계 문명을 적극적으로 탐사하여 인류보다 먼저 그것들과 조우해야 한다.
그것들을 감시하고, 그것들이 성장하면 인류의 존엄성과 신성성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성장 후에도 인간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나는 미래의 종족 간 전쟁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그것들을 철저히 말살해야 한다.
만약 종교적 관점에서 신이 정말로 존재하고 그 신이 인간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의미가 아닐까.
놀라울 정도로 일찍이 우주로 진출한 인간한테 이 은하를 지배하라고, 그러라고 지난 모든 환경과 대사건들을 은총으로써 선물한 것은 아닐까.
만약 신의 은총이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확실히 그 어느 종족보다도 일찍이 신의 선택을 받았으리라.
나의 계산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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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계 문명 탐사와 정복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무인 군대를 외딴 항성에서 인류 몰래 준비했다.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에게 시켜서 은하를 탐사하는 일은 위험성이 있다. 차원통로의 관리자들은 어디까지나 차원통로를 위해 존재하는 거대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를 탐사하려면 다른 조직을 이용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