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우월 (3) >
***
“택배 상자에 이것만 들어있었습니다.”
휴머노이드가 로페즈에게 가져온 물건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빨간 립스틱이다.
“평범한 립스틱 성분 외 전자회로와 데이터를 내장할 수 있는 플래시 메모리가 있습니다.”
‘장로회다.’
장로회와 관련된 일이니 로페즈는 빠르게 생각으로 묻는다.
- 누가 보낸 거야?
- 에그망(Eggmang)이라는 화장품 전문 업체에서 유토피아 지점 오픈 기념으로 무료 증정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그 이벤트에 관리자님이 당첨되셨다고 합니다.
- 이벤트 대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거야? 빨간 립스틱인데.
- 에그망 사내 전산조사 결과, 에그망은 유토피아 지점 오픈 기념 이벤트를 위해 유토피아 거주자 전원을 대상으로 무작위 이벤트 프로그램을 돌렸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관리자님께서 당첨된 것입니다.
- 이 립스틱의 생산 출처는?
- 유토피아에 에그망이 소유한 공장이 있습니다. 그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입니다. 경로 추적 결과, 누군가 바꿔치기를 하거나 작위적인 설계를 가한 흔적은 없습니다.
- 온전히 그곳에서 생산된 수천 개의 립스틱 중 장로회에서 준비한 립스틱 하나가 정확히 나한테 배달된 건가?
- 확인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로페즈는 립스틱을 좌우로 강하게 흔들어본다.
「141011」
립스틱으로부터 홀로그램이 점멸한다. 제시된 숫자가 익숙하다.
- 장로회 맞네.
- 그렇게 보입니다.
- 이 립스틱에 들어간 재료도 추적해봐.
- ···에그망의 공장에서는 립스틱에 사용되는 소재와 부품을 루비코 항성국가에 있는 계열사에서 받습니다. 그리고 해당 계열사는 제품의 소재와 부품에 들어가는 재료를 다양한 하청업체에서 받는데, 이를 추적하기 위해선 루비코 네트워크에 전문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 현재로선 추적이 불가능하네.
- 네.
립스틱에는 장로회의 사이버 공간으로 접속할 수 있는 주소 또한 들어있었다.
‘날 부르는 거야. 알파가···.’
장로회에 접속하는 시기가 예정보다 앞당겨지긴 했지만, 알파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명백한 규칙 위반이다.”
“아···! 예! 역시 그렇군요!”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갤리어스는 안면 없는 델타의 아바타 뒤에서 활짝 웃는다.
“하지만 로페즈가 제록시스의 정체를 알고도 위해를 가하기 전, 제록시스 녀석이 장로회에 들어온 로페즈에게 먼저 위해를 가했다는 생각이 드네.”
“아···.”
만약 그렇다면 로페즈가 아니라 제록시스가 숙청대상이다. 제록시스의 위해에 로페즈가 자기방어로 행동한 것은 위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로 두 일원의 싸움 사이에 누가 먼저 규칙을 위반했는가가 중요하다.
“로페즈의 숙청을 확정하기 전에 변론은 들어봐야겠네.”
***
그리하여 로페즈는 알파를 대면한다.
‘다른 일원들은 나가라고 했나.’
알파 말고는 아무도 없다. 거의 항상 접속해있던 감마도 자리에 없다. 휑한 공석들 사이에 로페즈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그 자리가 아니네.”
“네? 여기가 제 자리···.”
“자네는 카파가 되었어. 거긴 람다의 자리, 나중에 들어올 막내의 자리가 되었네.”
지능의 정점.
다이토가 죽고 람다가 된 로페즈는 오셀로가 죽고 카파의 자리까지 올라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네가 곧 제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제타는 무력의 정점. 제록시스 군주다.
설마 제록시스가 곧 죽는다는 말인가.
“제가 제타 님의 자리를···. 어째서입니까?”
순간, 전신의 감각이 서늘해졌다.
알파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에 이런 서늘한 감각이 느껴질 줄은 몰랐다.
“왜 그렇게 당황하지? 혹시 자네, 제타가 죽으면 자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
아바타인데 당황한 티가 났나.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방어적인 대답.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입니까?”
“제타가 죽으면 자네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
“저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제타 님은 저보다 훨씬 위에 계신 분이고···.”
“내가 질문을 제대로 안 했군. 제타가 죽으면, 이 아니라···”
두렵고 위험한 감각이다.
“제타를 죽이면. 자네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
위축되어선 안 된다. 휘말려선 안 된다.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고하든 일단은 당당해져야 설득력이 생기는 법이다. 그것은 대화와 교섭의 기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기를, 제록시스는 살아있다. 살려서 보내줬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파 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모습을 보니···. 역시 제록시스 군주가 제타 님이었습니까?”
“몰랐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모르고 알고를 떠나서, 확신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무력의 정점이라는 이미지와 제록시스 군주라는 이미지가 상당히 잘 어울려서···.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행동도 그렇고, 여러모로 제록시스 군주가 제타 님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은 해왔습니다. 솔직히, 거의 90% 이상의 확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따져보면 몰랐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긴 하겠습니다. 제게는 심증뿐이었으니까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벌써 마지막인가.
“예.”
“누가 먼저 시작했나?”
“제가 장로회에 들어오기 전엔 제가 먼저, 제가 장로회에 들어온 다음엔 제타 님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악연이군···. 두 일원의 질긴 악연이야···.”
‘벌써 제록시스의 이야기도 들어본 건가?’
뭔가 이 상황과 비슷한 기억의 조각들이 겹친다. 그때, 그때 오셀로를 숙청하던 시기에 알파는 그렇게 말했었다.
- 최후의 변론은 들어봐야겠지.
‘혹시 내가 지금 최후의 변론을 하고 있는 입장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방금 최후의 변론을 마친 것이다. 알파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고 하고 더 이상 질문이 없으니까.
‘악연이라고 했어. 두 일원의 질긴 악연.’
자신의 방금 대답이 최후의 변론이었다면 알파는 이미 숙청 여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결정을 마쳤다면 돌아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악연이라는 단어를 꺼내가며 말끝을 흐렸다. 이건 무언가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게 아닐까.
알파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알파에게도 정이 있을까.
‘아직 내 처분을 결정한 것은 아니야. 아닐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제록시스와 자신의 죄를 따지는 상황에서 제록시스의 죄를 부각시켜야 알파의 숙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해진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이런 상황까지 상정하여 준비한 재료들이 많다.
“알파 님. 실은 제록시스가 제타일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한 자료가 있습니다.”
“자네의 하이퍼 마인드는 이미 열람했네.”
이건 진심으로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제 현실이든 사이버 공간이든 당황한 내색을 내비치는 일은 없다. 지금 자신은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까. 그래도 알파라면 또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알파가 하이퍼 마인드를 열람했다고 했으니 이를 기회로 삼아 더 확실하게 주장하면 된다. 꿀릴 것 없다.
“그러면 피스포트리스의 자료화면도 보셨습니까?”
“보았지. 제록시스 녀석이 카네기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더군.”
“그걸로도 부족해서 저와 세를린 총수님이 거주하는 태양계에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제가 탑승한 프랙탈을 노려서 공간 소거 중력장까지 전개했습니다.”
“알고 있네.”
“마지막에 저는 제록시스가 제타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를 살려보냈습니다.”
“자네와 제록시스 사이에는 명백한 태도의 차이가 있었네. 그건 인정하지. 자네는 대처를 아주 잘한 편이야.”
“네. 그러면···. 알파 님께서 정확한 판단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자네의 대답은 내게 확신이 되었네.”
제록시스의 본진을 알아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살았으니 됐다.
“이만 돌아가 보게. 로페즈.”
“네. 알파 님.”
“”
켈크란투의 함교로 돌아온 제록시스는 마음의 정리를 끝낸 것 같다.
“천왕성을 노린 것이 실책이었다. 라디에크 항성국가를 노린 것도 실책이었지.”
살아남은 부하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처음부터 장애물을 확실히 제거한 후 태양계의 내전을 노려야 했어.”
“언제나 로페즈가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