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우월 (2) >
***
“괴물 같은 놈···.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연합군은 가능하다면 널 체포하기로 했어.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을 받아줄 죄인이 필요해서. 그래서 네 함대를 다 부숴버리고 켈크란투만 남긴 다음, 이렇게 함선 침투조를 보냈지. 함선 침투는 옵시디아몬이 담당하기로 했고.”
“그런데 네놈이 직접 왔군···. 이 위험한 적진으로.”
“그래. 연합군은 내가 여기에 직접 들어왔다는 사실을 몰라.”
“연합군에게도 숨겨서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인가?”
“이제야 알아듣네.”
로페즈는 그에게서 두 발자국 떨어진 후 그의 무릎 꿇은 자세를 풀어준다.
제록시스는 드디어 자신의 두 다리로 일어선다.
“전리품을 원한다면 챙겨주마.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아둬라. 난 네놈을 섬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놈과 나는 생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지. 인류는 강제로라도 하나가 되어야 해.”
“강제는 모르겠지만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는 나도 동의해.”
“날 막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난 인류의 반복되는 역사를 끊을 마지막 희망이었어. 로페즈.”
“네 추악한 야망이 세계를 불구덩이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안 해봤지. 추축국의 군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있었겠나?”
제록시스는 항변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지구를 방사능 불구덩이로 만들었는데, 정작 2차 세계대전이나 3차 세계대전이나 핵무기를 먼저 사용한 쪽은 항상 자유를 표방하는 놈들이었지. 그런 놈들이 세 번이나 승리한 세계는, 그런 놈들의 더러운 정의 위에 세워졌어.”
“너도 세계의 반대편에 선 군자가 되고 싶다는 말로 들리네.”
기꺼이 악마를 자처하겠다는 알 샤이탄처럼.
“언젠가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하는 일이지. 인간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어.”
“제록시스.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집어치우고 자신한테 솔직해져.”
“너도 내 말을 반박하지 못하는군.”
“네가 한 말은 뭐, 다 좋은데. 문제는 네가 한 말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있었잖아.”
로페즈에게 제록시스가 하는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네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네가 가진 신념 때문에 강제로라도 세계를 고치려는 게 아니고. 너는 네 추악한 지배욕과 야망 때문에 전쟁과 사상이라는 수단을 이용했을 뿐이야.”
“전쟁을 이용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무기 판매업이나 하는 네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네놈이 만든 끔찍한 기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겠나. 네놈의 지갑 사정을 위해서 말이야.”
“사람이 죽고 그러는 건 어쩔 수 없어. 술, 담배, 차, 게임, 영화···. 무기, 병기. 전부 필요한 것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걸 해악이라고 하더라고. 만약 그걸 파는 게 해악이고 그걸 이용하는 게 잘못이라면 나도 세상 앞에 당당한 놈은 아니야.”
“그러면 네가 날 꼬집을 자격은 없는 것 같군.”
“그런데 난 적어도 너처럼 세계를 한 색깔로 물들이려 하지는 않아. 난 그만 싸우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싸우고 있어.”
“구차한 변명이다.”
“넌 전부 네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싸우잖아. 전쟁광 새끼야.”
“···.”
제록시스는 로페즈가 말끝에 붙인 전쟁광이라는 단어에 자기도 모르게 위협을 느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로페즈는 제록시스로부터 몸을 돌렸다. 이대로 함교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생각할 시간?”
“방금 이 함선에 일회용 재배열 펄스를 설치했어. 네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지.”
“웃기는군. 다 잡은 고기를 그냥 놓아주겠다고?”
“도망친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봐. 과연 네가 혼자서 세계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지.”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혼자가 아니면, 네놈이랑 손이라도 잡으라는 말이냐? 네놈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는 건가?”
로페즈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함교를 빠져나가버렸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확답을 안 해주네 씨발.’
홀로 남겨진 제록시스는 자신의 붉은 권총을 내려다보다가, 함교의 홀로그램을 다시 켰다.
***
로페즈는 우주선을 타고 프랙탈로 복귀한다. 그러는 도중에 프랙탈이 묻는다.
- 연합군을 속이고 재배열 펄스까지 설치하면서 그를 보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트랜센던서가 말한다.
- 프랙탈. 관리자님께는 다 계획이 있다.
- 그가 전력을 회복한다면 관리자님께 위협이 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지금 변수를 제거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금이라도 그를 제거하거나 체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로페즈는 궤도에 늘어선 연합군 함대를 눈에 담는다.
더는 싸우는 함선이 없다.
드디어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 새끼가 돌아갈 집이 있다면 거기로 가겠지.”
- 관리자님. 트랜센더서님. 설마···
“따라붙어. 트랜센던서.”
- 암흑 네트워크 구축 완료. 지금부터 켈크란투와 제록시스의 위치를 추적하겠습니다.
직후, 켈크란투에서 재배열 펄스가 터지며 주변의 연합군 함대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중력장의 구속에서 벗어난 켈크란투는 방대한 엔진 출력을 모조리 가속으로 전환하여 순식간에 라디에크 항성계를 탈출했다.
***
제록시스는 함교에서 켈크란투를 점검한다.
“생존자는 있나? 있다면 응답하라.”
- 여기 있습니다! 군주님!
여섯 분대 정도 되는 인원들이 응답했다. 함선의 크기가 워낙 커서 생존자들도 꽤 남아있던 것이다.
“더 없나?”
그밖에 응답은 없다.
“빌어먹을···. 이게 다라니···.”
그는 함선 내부의 카메라로 처참한 현장을 확인한다.
‘그 많던 병력을 전부···. 아니야.’
차라리 잘 됐다.
명색이 군주인데 아까는 그 로페즈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까. 하늘 같은 군주의 치부를 부하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함교에 있던 부하들을 다 죽었으니 나머지 생존자들은 함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패배한 게 아니라 후퇴한 거야. 그렇게 하자.’
- 계급 좀 되는 놈들만 추려서 함교로 와라.
- 예. 군주님.
제록시스는 홀로그램 키보드를 조작한다.
「전장 기록 수정: 25991225」
「추가: 연합군에 의한 해방군 함대 전멸. 기함 켈크란투는 건재.」
「추가: 켈크란투 내부 영상 및 기록 말소.」
「방침: 전략적 후퇴.」
군주의 권한으로 간단히 데이터를 손봤다. 잠시 후 부하들이 함교로 들어온다.
“구, 군주님? 이게 다 무슨···.”
함교가 피투성이다. 함교로 드나드는 문은 파괴되었고 제록시스의 주변으론 수십 명의 시체가 널려있다.
“우리는 타라누쉬(Taranushi)로 귀환한다.”
“본진으로 도망치는 겁니까?”
“도망?”
제록시스가 눈을 부릅뜨자 부하들은 잔뜩 움츠러든다.
“죄송합니다! 군주님!”
“···전략적 후퇴다. 켈크란투와 이 함선에 있는 자들이 전부인데 무슨 수로 연합군을 상대하라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즉시 타라누쉬로 돌아가서 재정비한다. 다시 군세를 일으켜 설욕의 기회를 준비한다.”
“예! 군주님!”
제록시스는 절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날 무릎 꿇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로페즈···.’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
장로회의 사이버 공간에서 델타는 알파에게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로페즈가 제록시스의 알 샤이탄을 의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가이우스에 이어서 말입니다.”
“자네도 로페즈가 예전부터 제타의 정체를 알고 그랬다고 생각하나?”
“예. 제록시스 녀석이 좀 얼빠진 구석이 있긴 해도 아까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녀석 말대로 로페즈 정도되는 놈이라면 진작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알파 님께서 ‘지능의 정점’으로 인정하신 놈이지 않습니까. 분명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겁니다.”
“흠···.”
“너무 선을 넘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막내라고 봐주실 생각이십니까?”
“막내라고 봐준 적은 없네. 내게는 제록시스나 자네나 로페즈나 모두 똑같은 일원들이야.”
“예. 그래도 이번 일은 알파 님께서 직접 나서주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알파 님께서 소중한 일원의 비밀을 직접 파헤치는 것을 굉장히 꺼려 하신다는 것은 압니다만, 이번엔 워낙에 일이 커져서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알파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조금 이른 시기이긴 하지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직접 조사해보지.”
“···.”
알파는 자신이 직접 조사해보겠다고 하고는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 있다.
“알파 님?”
“···알고서 그랬군.”
알파는 불과 8초 만에 조사를 끝낸 것이다.
“예? 아니 어떻게···.”
“하이퍼 마인드에 내막이 담겨 있었네.”
“아, 대단하십니다. 알파 님.”
“진짜 선을 넘은 시기는 라디에크에 금속의 천사들을 만들었을 때인가. ···그밖에 세를린이나 카네기의 뒷조사까지 했었군.”
“이거 보십시오!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일원으로 들이기엔 너무 위험한 녀석입니다! 그리고 이건 가이우스 때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당장 로페즈의 숙청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로페즈에게 접근했나?”
델타는 흠칫한다.
“예···?”
“EIA의 국장 베네티 갤리어스. 자네가 직접 유토피아에 찾아가서 로페즈에게 드레이크 쌍성계의 좌표를 줬더군. 저번에 로페즈가 말하긴 했지만, 오셀로가 드레이크에서 로페즈를 급습한 사건에 자네도 참여한 것은 아닌가?”
알파가 질문을 했을 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장로회와 수십 년을 함께한 갤리어스는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제가 로페즈에게 좌표를 준 것은 맞습니다. 제록시스에게도 좌표를 줬고요.”
“불순한 의도처럼 여겨지는군.”
“예. 저는 로페즈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록시스에게도 좌표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당당하지?”
델타는, 갤리어스 국장은 알파의 앞에서 사실만을 내뱉는다. 자신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까지 고스란히 말하면서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좌표를 줬다.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록시스에게 좌표라는 기회를 줬을 뿐이고 그밖에 다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저를 직접 조사해보셔도 괜찮습니다.”
“자네가 제록시스의 직접적인 위해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군.”
“예. 장로회의 규칙은 어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장로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고 알파 님과 함께한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알겠네. 자네가 장로회에서 실수한 적은 없었지.”
알파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갤리어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넌지시 묻는다.
“···그럼 로페즈의 처분은 어떻게···.”
“명백한 규칙 위반이다.”
***
전쟁이 끝났다. 라디에크 항성국가를 군주국으로 만들었던 알 샤이탄. 알 샤이탄을 지배하는 독재자 제록시스는 전력의 99% 이상을 상실하고 연합군 함대에 포위당했다.
- 그러나 켈크란투는 연합군의 특수한 펄스 폭탄을 훔쳐서 도주에 활용했습니다. 켈크란투의 가속은 당시 전장에 있던 그 어떤 함선의 출력보다 강대했고, 펄스에 의해 일시적으로 행동을 통제당한 연합군 함대는 제록시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라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는 거지? 전체적으로.”
- 네.
로페즈는 사옥의 중간층 창문에서 본사 부지를 보는 중이다. 본사 부지의 경치라도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본사 부지에 흘러 다니는 데이터 조각들이다.
연합군의 승리에 화성이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화성에는 옵시디아몬이 크게 공헌했다. 그 사실이 널리 퍼졌다. 결과, 화성의 행성대통령이 주최하는 승전 행사가 유토피아에서 진행되고 있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그런 행사다.
- 차원통로가 복구되면서 켈크란투에서 이어지는 암흑 네트워크 연결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제록시스는 계속 타라누쉬라는 곳으로 가고 있어?”
- 네. 켈크란투의 진행 방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켈크란투의 실내사격장에서 관리자님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타라누쉬. 행성일까?”
- 최종 좌표가 없어서 아직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제록시스의 본진이라면 타라누쉬는 마땅히 자원이 있는 행성, 소행성 구름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장로회의 요타인 카네기가 제록시스의 반군들에게 맞아서 코뼈까지 부러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알파에게 신고하는 것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 자식 본진 위치는 알고 죽여야지. 본진을 살려두면 제록시스가 숙청당하더라도 부하 놈들 때문에 후환이 될 수가 있어.”
- 그렇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로페즈는 후환을 염려하여 그를 살려보내준 것이다.
“그 새끼가 본진에 도착하면 바로 알려줘. 알파한테 신고해서 숙청해버린 다음, 남은 놈들이랑 본진이 되는 땅은 반물질 화기의 실험장으로 써버리게.”
- 알겠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계획입니다.
로페즈는 제록시스와 관련된 일의 매듭을 구상한다. 그러던 도중에 머릿속으로 어떤 정보가 들어온다.
그 정보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임을 인지한 로페즈는 정보를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시야 앞에 띄운다.
「미확인 택배 도착」
조그마한 상자가 보인다.
“내 집 앞으로 택배가 왔는데?”
- 위험한 물건일 수 있습니다.
“상자가 주먹 크기잖아.”
- 그렇습니다.
어차피 저 조그마한 상자에 들어갈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을 죽일 수 없다. 저 정도 크기라면 방사선, 바이러스, 세균, 화약 정도다. 반물질이나 위협적인 용량의 핵무기는 절대 담을 수 없다.
“가져와.”
- 하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조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제록시스는 화성에서 나온 후로 줄곧 흑막이자 주적이었다. 그런 제록시스가 패배했으니 지금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그다지 없다. 과장이 아니라 아마 오늘부터는 강적과 싸울 일도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짜 오늘부터는 좀 편한 인생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긴장을 놓고 피 좀 그만 보고 즐길 거리도 찾고. 인생을 살아가는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세계에는 늘 인식할 수 없는 위협이 도사린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협을 배제하지 않고선 멈출 수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밝은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늘 사건이 터졌다.
항상 사건이 터졌던 이유는 자신의 발걸음이 거대해진 탓이다. 남들의 보폭보다 수천, 수만 배는 큰 발걸음을 가지게 된 탓이다.
그러니 여기선 트랜센던서의 주장이 옳다. 하마터면 안일해질 뻔했다.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지하 연구소에서 그 생각을 가진 덕분에 살아남은 것처럼.
지금 이 소중한 감각을 잃어버리지 말자.
“알겠어. 그럼 확실하게 조사해서 가져와.”
- 물건을 확인하겠습니다.
< 28. 우월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