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우리는 개척자인가 아니면 파괴자인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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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 쌍성계에 착륙한 후 226시간이 지났다.
옵시디아몬이 이 행성에서 10일간 계획한 과제들은 순조롭게 완료되었다. 이제는 평탄한 착륙지를 중심으로 도로와 건물들이 뻗어있어서 자그마한 마을이라도 형성된 것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는 1개 함단급의 군대와 350명의 사원들이 머무를 것이다.
로페즈가 그토록 경계했던 장로회의 위협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없었다.
오후 2시 6분. 행성의 시간으로는 이제 막 아침이 되었다.
방호복을 입은 로페즈, 자이칸, 프녹스는 착륙지를 걸어 다니며 이곳에서의 일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체류할 인원들과 귀환할 인원들이 정해졌습니다.”
“프녹스 씨는 어떠셨어요? 지난 10일.”
“미지의 세계라고 해서 처음엔 좀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서운 것보다 궁금한 것이 더 많아졌네요. 하하하.”
“제가 말했잖아요. 프녹스 씨라면 처음에 무서워도 나중에 호기심이 이길 거라고요.”
“하하. 회장님은 저보다 제 성격을 더 잘 아시는 것 같네요. 이제 곧 화성으로 출발하겠지만 벌써 이곳으로 돌아올 날을 손꼽고 있습니다.”
“자이칸 씨는요? 어땠어요?”
무뚝뚝한 자이칸은 정말 눈에 보일 듯 말 듯 할 정도로 한쪽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린다.
“재미있었습니다.”
“뭐가요?”
“그냥, 모든 것들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태양이 두 개나 떠오른다는 것도 그렇고 매일 볼 때마다 발전하는 이 착륙지의 모습도 그렇고···. 뭐든지 뚝딱뚝딱 만드는 저 기계들도 그렇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로페즈는 착륙지를 돌아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짓는 미소다.
“꿈에 다가서고 있어요. 이제는 진짜 손에 잡힐 듯하네요.”
“하하. 그렇죠.”
“작은 월세 빌딩으로 출퇴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센던서와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 덕분이겠죠. 사실 저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경험도 한참 모자라죠.”
솔직히 트랜센던서가 없었다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일이다.
그리고 트랜센던서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트랜센던서는 이를 부정한다.
- 그것은 관리자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트랜센던서는 자이칸과 프녹스에게도 들리도록 방호복의 장치를 통해 음성을 낸다.
- 관리자님이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관리자는 한참 전에 사망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관리자님이 관리자님이어서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프녹스는 동의한다.
“맞습니다. 회장님이라서 가능했던 일들이죠.”
- 그간의 모든 위기를 극복하시고, 위협적인 변수를 통제하시고, 최선과 최고의 결과를 내시고, 항상 저보다 몇 수 앞의 복잡한 상황들을 고려하셨습니다. 간혹 도박적인 선택도 있었지만 결과는 대체로 성공이었습니다.
자이칸도 동의한다.
“회장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회장님이었다면 아직도 토로스 구역에 머물면서 암시장에 재래식 무기나 팔고 있었을 겁니다.”
“저였으면 화성 정부한테 호되게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거나···. 집에 작업자가 들어왔을 때 죽었을 것 같네요. 트랜센던서한테 들었어요. 거기서 총알을 담요로 막는다는 발상은 도무지···. 하하.”
‘그래도 당신들이 없었다면 난 죽었어.’
이 두 사람은 로페즈가 의식을 잃고 입원했을 때 전력으로 그를 보호했다. 프녹스는 로페즈에게 안락사를 넣으려던 프레드릭을 막으려다 흉기에 찔렸고, 자이칸은 그런 프레드릭을 순식간에 제압하여 상황을 정리했다.
프녹스는 로페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무기인 트랜센던서의 성장을 가속하였고 자이칸은 애초에 로페즈가 토로스 구역의 범죄조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이 되어주었다.
그러니까 계속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받은 것 이상으로 보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잘 해나가리라.
갑자기 말이 없어진 로페즈를 본 프녹스는 안절부절한다.
“회장님? 혹시 제가 실언이라도···”
“···하.”
로페즈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 담긴 무거운 한숨이 아니라 아주 가볍게, 후련하게 내쉰 한숨이었다.
“이제야 좀 사는 맛이 나네요. 이제야.”
- 성취감은 좋은 원동력이 됩니다.
“슬슬 화성으로 돌아가죠.”
“네. 회장님.”
“예.”
그렇게 세 사람은 착륙지의 중심, 함선이 착륙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하지만 비극은 그 순간에 터졌다.
콰콰콰콰아아아앙!!!!!!
함선 중심의 아랫면과 윗면이 부서지며 뜨거운 화염을 토해낸다. 거칠게 찢어진 윗면의 장갑에서 솟구치는 물체가 파괴적인 굉음을 퍼뜨린다.
콰콰콰콰콰콰!!!!
뱀처럼 극단적으로 벌어진 턱에서 안쪽으로 회전하는 분쇄기들이 이빨처럼 달려있다. 그 분쇄기의 크기 하나하나가 웬만한 자동차 정도로 크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병기가 착륙지의 함선을 파괴한 것이다.
- 매복입니다.
“뭐?!”
“뛰십시오! 빨리!”
자이칸은 프녹스와 로페즈의 등을 떠밀고 그 자리에 남아서 권총을 뽑아든다. 그가 잽싸게 뽑아든 권총은 폭발하는 에너지탄을 연사할 수 있는 화기다.
쿵! 콰지직···!
하지만 지금 들고 있는 자그마한 화기로는 저 거대한 병기를 도무지 막아낼 수가 없을 것 같다.
- 자이칸 님도 피하십시오.
- 프랙탈에서 착륙지의 모든 인원에게 알립니다. 착륙지의 함선에 적대적 병기가 출몰했습니다. 해당 병기를 상대로 건물이나 엄폐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가용한 이동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최대한 신속히 착륙지를 이탈하시길 바랍니다.
키이이잉! 카드드득!
정체불명의 거대한 병기는 함선 위로 나와서 분쇄기를 갈아댄다. 함선의 견고한 신소재 장갑이 그 가공할 위력의 분쇄기들 사이에서 종잇장처럼 찢긴다. 긴 몸통에 세 쌍의 다리가 달린 기괴한 생김새다.
쿠웅!
병기는 도망치는 로페즈를 즉각적으로 인식했다. 녀석은 명확히 그를 죽일 기세로 함선에서 뛰어내려 돌진한다.
쩌어엉!!
테슬라포트리스가 방패로 녀석의 돌진을 저지한다.
쿵쿵쿵쿵쿵!
촤아아아···.
녀석은 세 쌍의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테슬라포트리스는 두 다리로 버틴다.
두 거대한 병기가 힘 싸움에 돌입하자 두 병기의 발밑을 포장한 아스팔트가 깨지고 흙먼지가 일어난다.
- 이 병기를 파괴하라!
테슬라포트리스의 웅장한 외침이 착륙지 전체에 퍼져나간다.
- 명령을 확인했습니다.
- 이동하겠습니다.
- 목표를 탐색합니다.
착륙지에 산개했던 군체 휴머노이드, 체인트루퍼, 로보버그들이 순식간에 집결하기 시작한다. 드론 하이브들도 전술적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저마다 위치를 찾아간다.
같은 순간, 샌디는 연구소 밖으로 뛰쳐나왔다.
“카일···!”
- 관리자님. 연구소 주차장의 차량을 이용하여 최대한 멀리 벗어나십시오.
샌디는 그게 아니라며 소리친다.
“로페즈 씨는?! 로페즈 씨는 어디에 있어?!”
- 보조 권한자님은 적대적 병기에 쫓기고 계십니다. 보조 권한자님의 현재 위치는 적대적 병기로부터 80미터 떨어진 위치입니다.
샌디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욱한 흙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도한다. 그 속에서 기계들이 충돌하는 굉음이 들려온다.
“너도 가서 도와줘! 당장!”
카일포트리스는 망원경 같은 머리를 앞뒤로 살짝 늘리며 노란색 안광을 발한다.
- 저의 임무는 관리자님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것입니다. 저는 관리자님과 함께 착륙지를 벗어나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마!!!”
- 제 판단이 틀립니까?
“가서 그 병기를 무찌르라고! 가서 함께 싸우라는 명령이야!”
- 알겠습니다.
“트랜센던서! 내 목소리 듣고 있지?”
그러자 샌디의 휴대전화에서 트랜센던서가 응답한다.
- 듣고 있습니다.
“카일을 써!”
- 알겠습니다. 카일에게 전술 상황에서의 명령체계를 입력하겠습니다.
- 드론 하이브다. 카일포트리스는 내가 알려주는 위치로 이동하여 적대적 병기를 조준하라.
- 알겠습니다.
키이이잉!! 카가가각···!
체인트루퍼와 군체 휴머노이드 무리가 착륙지의 중심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카일포트리스는 오른쪽으로 뜀박질을 시작한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 충격으로 도로에 균열이 생긴다. 근처에 정신없이 지나가는 체인트루퍼들도 속도를 최대한으로 가속한 탓에 도로에 기다란 칼자국을 내고 있다.
- 카일포트리스. 그 위치다.
카일포트리스는 자신의 저격총을 조준한다. 망원경 같은 머리에서는 계속 노란색 안광이 나오고 있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을 적외선으로 식별한다.
하지만 사선에 테슬라포트리스가 있다. 두 병기가 거칠게 근접 난투극을 벌이고 있어서 조준이 쉽지 않다.
- 대기하라. 하위 인공지능 병력들이 테슬라포트리스를 도울 것이다.
군체 휴머노이드가 달려가 총구의 불을 뿜고 체인트루퍼들이 마찰로 불꽃을 일으키며 전장에 가세한다.
***
“허억···! 허억···! 허억···!”
배후에서 거대한 병기들이 충돌하고 있다. 폭발적인 공기가 등을 밀친다. 정면에서는 발사체와 투사체가 쇄도하고 있다. 몇 걸음 앞에는 프녹스가 있고 옆에는 자이칸이 함께 뛰고 있다.
- 계속 이동하십시오. 관리자님은 아군의 총격에 절대 피격당하지 않습니다.
- 관리자님께서 그곳을 벗어나셔야 적대적 병기에 효과적인 화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우주 쪽은?! 그냥 행성에 매복한 저 새끼가 끝이야?!”
- 궤도에 배치된 프랙탈 함대에선 지상의 해당 병기를 제외하고 아무런 적대적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로페즈는 뛰면서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떠올린다.
만약 자신이 여기에 올 것이라는 걸 알고, 만약 저 병기가 자신을 인식했고, 만약 저 병기를 다루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저딴 매복보다 더 확실한 수가 있지 않았나.
“트랜센던서!”
- 예. 관리자님.
“핵폭탄! 저게 핵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어!”
급박한 상황에서 번개처럼 떠올린 생각이다.
그리고 트랜센던서는 이미 그러한 상황조차 상정하고 있다.
- 핵무기의 사용에 필요한 에너지 활동이 감지된다면 그 즉시 가용한 모든 화력을 동원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하여 착륙지의 모든 인원이 화력에 휩쓸리더라도 관리자님의 뇌는 보존해보겠습니다.
끔찍한 이야기다.
“그런 방법밖에 없는 거야?!”
- 그렇다면 다른 방향을 검토하겠습니다.
트랜센던서는 반박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빠르게 답한다.
- 위협적인 에너지 활동이 감지된다면 테슬라포트리스를 희생하여 폭발의 화력을 에너지 돔으로 가둘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게 가장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
“그렇게 해! 만약에 저게 자폭한다면!”
-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로페즈는 생각한다.
‘날 무조건 죽이려면 시작부터 핵폭발을 일으켰을 거야···!’
시작부터 핵폭발이 터지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의뢰다···! 의뢰로 누군가 이 일을 준비한 거야···! 의뢰주한테 내 시신을, 내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 착륙지로 전폭기와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계속 이동하십시오.
“저 새끼는 그것도 알고 있을 거야, 알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자가 있다면 무조건 만반의 준비를 해뒀을 것이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거듭하고 전략을 짰을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우주를 경계했다. 베니스의 안내자들이 떠날 때가지 그들을 감시했다. 도착해서도 행성의 내외부를 경계했다. 드레이크 쌍성계에 접근하는 물체는 없는가, 이 행성에 접근하는 물체는 없는가, 위협적인 자연재해는 없는가, 궤도, 하늘, 지상, 바다, 인접한 위성과 별의 반응까지 모조리 경계했다.
당연히 지하도 경계하는 범위에 있었다.
지각이 단단한지, 지하에 인공적인 움직임은 없는지, 지뢰라도 있는 건 아닌지, 표준 함량 이상의 금속물질이 탐지되지는 않는지, 에너지 활동이나 모종의 전파 신호가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경계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땅을 헤집어 엎기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사전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
무언가의 부지를 건설하기 위해선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쏟아서 단단한 토대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 토대의 표준적인 깊이를 그들이 계산했다.
그래서 이쪽이 건물을 세우려 땅을 파고도, 잠들었던 병기의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저 병기는 며칠에 걸쳐서 정확한 깊이에 묻힌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병력이 프랙탈 함대에 올라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이 순간, 내부적인 경계가 허술해진 바로 이 순간을 노리려고.
그러니까 다 계획된 것이다.
지하에 매복한 병기의 습격.
고작 이게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질 않는다.
콰콰콰콰콰아아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 직후, 몇 걸음 앞에서 뛰던 프녹스의 코앞이 폭발했다.
착륙지의 땅을 채우던 콘크리트와 도로를 이루던 아스팔트가 거대한 파편이 되어 튀어 오른다. 그 속에서 병기가 출몰한다.
처음에 출몰한 거대한 병기와 비슷한 형태지만 그 크기가 작은 녀석이다.
콰앙! 콰왕! 콰앙!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진다. 가로등이 떨어지고 도로가 폭발한다. 더 있었다. 매복한 병기가 더 있었다. 똑같은 종류의 병기들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또 엄습한다.
앞서 달리던 프녹스는 뒤로 몸을 돌린다.
“회장님······!”
느릿한 시간 속에서 로페즈와 프녹스의 시선이 교차한다.
“놈들이 사방에서···”
거기까지 말을 잇던 프녹스는 배후에서 돌진하는 병기에게 물리고 말았다.
“안 돼······.”
작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포식자처럼, 벌어진 금속의 턱이 프녹스를 물어올린다.
자이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댄다.
동시에 로페즈는 절박하게 소리친다.
“안 돼, 하지 마!!!”
“아아···! 아아아···!”
으드득!
“끄아아아아아아!!!! 살려주세요!!!! 살려줘!!! 살려줘요···! 너무 아파!! 나 좀 빨리 꺼내···”
익숙한 목소리의 처절한 비명이 악몽처럼 귓가에서 맴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어찌 손쓸 틈도 없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로페즈는 그 처참한 광경을 두 눈동자에 가득 담는다.
“···.”
옵시디아몬을 처음 차렸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해온 프녹스가,
쿠드득···!
회전하는 분쇄기 속에서 산 채로 으깨지는 모습을 말이다.
< 23. 우리는 개척자인가 아니면 파괴자인가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