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15화 (114/183)

< 22. 멈출 수 없는 급류 (4) >

***

- ···그쪽에서 작업한 거 아니었어요?

“네?”

- 나는 회장님한테 왜 그랬냐고 화내려고 전화한 건데···?

세를린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한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오리온이 뉴소사이어티의 이중 의뢰를 받았으니까 그에 대한 보복으로, 회장님이 한 짓 아니었냐고.

“저 아닙니다. 아무리 다이토가 남긴 것들이 싫어도 태양계에 살면서 그 정도 분간은 합니다. 그리고 다이토는 이미 죽었는데 무슨 감정이 더 남아있겠습니까.”

- 나도 아니고 회장님도 아니면···. 누가 한 짓이에요?

“···.”

「태양계 바깥에서 들어온 작업일 확률이 높습니다.」

뭔가,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제타 님이···.”

가이우스를 만들고 태양계에 전쟁의 불씨를 심어 세계적으로 확대하려던 무력의 정점. 장로회의 제타가 의심스럽다.

“오리온과학수호협회의 존재의의는 태양계 수호, 무력 충돌의 억제입니다. 그런 협회의 협회장과 부협회장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제타 님 말고 떠오르지 않습니다.”

- 하···.

제타를 막아야 한다.

전쟁의 참혹함이라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보았다. 태양계에서 2억 3천만 명이 산화하고 도시가 추락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다. 같은 태양계 사람들이면서 서로를 죽이고 파괴하는 광경은 우주에서 목숨으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참담했다.

누군가는 집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삶을 잃어버렸다. 또 누군가는 부모를 잃고 누군가는 자식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가슴 속에 묻어서 절규했다.

전쟁은 그 모든 불안과 슬픔, 폭력과 공포, 갈등과 불화를 가져오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이벤트다.

의식이 제대로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을 보고 당연히 느꼈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그것도 자국을 지키기 위해 자의로 벌인 전쟁이 아니라, 생판 남인 강자들의 손에 의해 터지는 전쟁이라면 그보다 큰 비극이 있을 수 없다.

“총수님. 혹시 제타 님의 정체를 아십니까?”

- 저도 알고 싶어요.

“모르십니까?”

- 몰라요. 모른다고요. 하여튼 그 인간···. 저번부터 낌새가 이상하긴 했어요. 내가 태양계에 있다는 걸 알고도 계속 그렇게 제멋대로···.

“태양계에서 전쟁이 터지면 저와 총수님은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그건 장로회의 규칙에 위반되지 않는 겁니까?”

-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누가요?”

- 알파 님께서 그랬죠. 그러면 저나 나머지 일원들이 할 말이 있나요. 알파 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세를린의 언행에서 느껴진다.

이건 복종이다.

그녀는 알파를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알파가 없는 자리에서도 알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자신이 아무리 싫어하는 일이라도 알파가 그럴 수 있다고 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세를린이 아주 거대해 보였다. 그녀는 미르니의 총수, 재력의 정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알파가 있거나 알파의 이야기만 나오면 누구든지 이렇게 한없이 작아 보인다.

물론 기술적 특이점이라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 책 한 권을 꽉 채워도 될 만큼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파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해서 이런 일까지 눈 감고 참아야 하는가.

알파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아니, 그 누구에게도 이럴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건 알파가 그 위치에, 그 힘에, 아무런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원하는 제타에게 마땅히 제재를 가해야 한다.

“알파 님께 항의해야겠습니다.”

- 뭐라고요?!

“제타 님이 제게 위해를 가하고 있다고 말할 겁니다.”

- 관두세요. 제타가 했다는 확신도 없고 설령 제타가 했더라도 규칙 위반이 아니라고 하실 거예요.

“···입이 뚫려있으면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무례하시네요.

“총수님은 뭐가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제타가 태양계에 자꾸만 위해를 가하는데 우리가 말도 못 합니까?”

- 말은 이미 해봤다니까요.

“그건 저번이고, 이번엔 또 모르지 않습니까.”

- 정말 뭘 모르시네요. 그만하세요.

“그만해야 하는 건 제타입니다. 그런 제타의 행동을 용납하는 알파 님도 그만해야 하고요. 그리고 총수님···. 저 총수님 그렇게 안 봤습니다.”

- ···.

“저는 총수님이 누구를 상대로든 하실 말씀 다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자를 상대로는 한없이 작아지시네요.”

- 하···! 웃기네···.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말의 어디에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나온다는 말인가.

“아무튼 총수님께서 목소리를 합쳐주시든 방관하시든, 저는 항의할 겁니다.”

- 회장님.

“네.”

- 회장님 진짜, 기술적 특이점이라는 게 뭔지는 알아요?

“압니다.”

- 1초 만에 안다고 대답하는 거 보니까,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

- 신한테 기도해본 적, 있어요?

어렸을 때 몇 가지 종교를 겪어봤다. 기도한 경험이라면 당연히 있다.

“그게 지금 주제랑 관련이 있습니까?”

-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졌어요?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기도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건 자신이 노력했거나 운이 좋아서 됐던 일이에요. 신이 이루어준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환경이 이루어준 것이죠.

그래도 의지는 얻지 않는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지 않는가. 아니 그보다 이 생뚱맞은 이야기는 왜 꺼내는가.

‘알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신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어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 신은 그저 지켜볼 뿐이에요. 아니, 지켜보고 있는지 무시하고 있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고 신은 신이니까. 신은 우리를 이해하고 있어도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 없죠. 이해할 수 없다고요.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말을.

- 세상에 온갖 좆같은 일들이 왜 있겠어요? 진짜 천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착한 사람들이 왜 이용당하고 슬픔을 겪겠어요? 당장 우리를 봐요. 회장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밟으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왜 아무도 우릴 벌하지 않냐고요.

“그러니까 지금 그런 쪽 이야기가 왜 나오냐는 겁니다.”

- 당신이 신한테 항의를 하든 소리를 지르든, 간절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디서 뭘 하고 얼마나 노력하든.

“···.”

-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말고는.

이제야 알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파 님이 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 신인지 뭔지 몰라요.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능력. 그렇지, 전지전능하다···. 전지전능한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에요?

‘알파의 힘을 겪어본 건가?’

아무리 그래도 전지전능하다니, 말이 안 된다.

“도대체 뭘 보신 겁니까?”

- ···.

세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멀쩡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 나도 내가 본 것이 뭔지 몰라요. 그게 현실인지 내 기억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고 그냥, 그냥 알파 님께 대항하려거나 항의하려거나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래도 굳이 하고 싶다면 알아서 하세요. 나는 안 도와줘요. 못 도와주니까.

“예. 아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대로 통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그녀 쪽에서 아무 말 없이 통화를 계속하고 있다.

- ···두 번째 이야기도 있었어요.

“···?”

- 분위기가 왜 이렇게 돼서···. 아, 어색하네.

갈등으로 빚어진 어색한 분위기는 한쪽이 양보를 하면 금방 풀리기 마련이다.

아주 간단한 원리이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에겐 웬만해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어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를린 총수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선 안 됩니다.」

다행히도 로페즈는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할 줄 아는 부류의 사람이다.

“괜찮습니다. 총수님께서 뭔가를 보셨고 저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의사결정회에 임원으로 들어오실래요?

“주주총회 같은 그거요?”

- 네. 요즘 의사결정회 돌아가는 상태가 영 이상해서요.

미르니의 사업적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를 선뜻 내어주겠다고 한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거기 들어가려면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긴 한데 회장님은 그냥 꽂아드릴게요.

“왜죠?”

- 의사를 결정하는 의사결정회거든요. 최근에 플랜트 부문 사업이 크게 확장되면서 의논할 일이 많아졌는데, 임원들이 의견을 합치지를 못해요. 저는 정답을 원하는데 정답이 안 나오는 것 같다는 말이죠.

“그걸 제가 도와드리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 네. 임원급 배당금도 드릴게요. 한번 해보실래요?

“괜찮은 제안이네요. 하겠습니다.”

***

루비코의 수도 행성인 세라리코의 궤도에 표준 규격 이상의 함선이 정박한다.

킬파인더의 사무실에서 알림음이 울린다.

삐이익···.

삐이익···.

···쿵!

오셀로는 사무실로 후다닥 들어와서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버튼부터 누른다.

“예! 오셀로입니다.”

- 오리온과학수호협회는?

낮은 음성의 남자 목소리다.

오셀로는 상대가 앞에 있지도 않은데 고개를 숙이며 굽신거린다.

“흔적 없이 잘 처리했습니다.”

- 그렇군. 잠깐 이쪽으로 좀 오지.

“예. 방금 우주선 준비했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올라가겠습니다.”

***

세라리코에서 킬파인더의 용병선 한 대가 궤도로 오른다. 그러자 아까부터 궤도에 정박해있던 커다란 함선이 내부의 착륙장을 개방한다.

까만 타일의 바닥에 빨간 카펫이 일자로 깔려있다.

어둡게 붉은 색깔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넓은 공간의 중심에 서있다. 턱 아래까지 살짝 닿도록 기른 머리칼이 붉다.

그의 배후로는 비슷한 색깔의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무표정으로 대열을 갖추고 있다. 조명이 은은하게 어두워서 공간 전체가 그림자에 물든 것 같다.

곧 그의 공간으로 오셀로가 들어온다.

“먼 길 행차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셀로는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이 오셀로는 제록시스(Xeroxis) 군주님께 오늘 주어진 삶의 불꽃을 바칩니다.”

“일어나게.”

“예.”

“내 성의를 받지 않는 라디에크의 얼간이들.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했겠지?”

“예. 덕분에 알 샤이탄은 라디에크의 수뇌부와 의형제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디에크에선 알 샤이탄이 테러리스트 반군이라고 하지만, 알 샤이탄은 자기네가 저항군이라고 믿고 있네.”

“예.”

“알 샤이탄은 나의 가호 아래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어. ···내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라디에크 정권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지.”

“결국 라디에크 전체가 군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알 샤이탄을 도구로, 라디에크를 도구로 삼아서 전쟁에 쓸 말을 준비한 것이야. 하지만 이걸론 부족하네. 현대에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충돌해야 제4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어. 누가 악당인지 알 수 없도록.”

“태양계는 다수의 행성국가로 구성된 별입니다. 내분을 일으키기에 그보다 좋은 곳이 없습니다. 마침 오리온과학수호협회의 머리를 제거했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봅니다.”

“자네가 저번에 보고했었지. 옵시디아몬이 자네의 킬파인더에 의뢰를 했다고.”

“예. 콜렉퍼레이션 해체를 도와달라는 의뢰였습니다.”

제록시스는 오셀로에게 다가가 그의 양 어깨를 붙잡는다.

오셀로는 본능적으로 위축되어서 침을 꿀꺽 삼킨다.

“로페즈···. 로페즈가 문제야. 무슨 말인지 아나?”

“예. 로페즈가 문제입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면서 무력을 사용하는, 정의로운 척하면서 비겁한 술수를 쓰는 이중적인 놈이야.”

“군주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기에 앞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놈입니다.”

“로페즈가 자네에게 콜렉퍼레이션 해체를 의뢰했네. 하이퍼 마인드로 태양계를 집어삼키려는 것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놈이 태양계를 집어삼키면 태양계에서 일을 추진하는데 문제가 생기겠지. 그러니까···”

제록시스는 오셀로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오므린다. 손등에 드러난 힘줄, 핏줄이 천천히 주먹을 쥐는 손아귀의 움직임에 맞추어 흉포하게도 일그러진다.

“내가 기껏 알 샤이탄을 키워서 라디에크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태양계의 내분을 일으키는데 실패하면 모든 것이 허황된 꿈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이네.”

“저번과 같은 일이 발생하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가이우스 때와 다를 것이야. 아주 극명하게···.”

“예.”

“그래. 자네는 언젠가 라디에크의 통수권자가 될 몸이네. 그렇다면 그에 마땅한 공로를 세워야, 나의 군대가 자네를 인정하겠지.”

“숙지하고 있습니다.”

“알 샤이탄이 성장해서 라디에크에 혁명을 일으키기까지는 한 달 정도가 소요될 것이네. 그러니까 그전에 태양계에서의 준비는 마쳐야 해”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카파. ‘작업’의 정점인 자네에게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주겠네.”

제록시스는 검지로 바닥을 가리킨다.

“로페즈를 죽여라. 킬파인더의 오셀로 대표.”

“알겠습니다. 군주님.”

< 22. 멈출 수 없는 급류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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