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폭풍전야 (5) >
***
때는 로페즈가 카이사스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로페즈 씨가 기술적 특이점이라는 개념을 알고 계시는지 묻고 싶군요.”
그의 질문에 로페즈는 답했다.
“매우 간략하게, 인공으로 만들어진 모든 지능의 총합이 인간 지능의 총합을 넘어서는 시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공의 지적능력이 인류의 지적능력을 초월하는 순간이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우리가 만들어낸 지능이 기술적 특이점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의 지능은 우리가 만들어낸 지능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됩니다. 창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끝에, 창조주가 창조물의 기술적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인공지능에게 역전되는 필연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사스는 인간을 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스는 인류의 존속을 원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엘리스가 카이사스에게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카이사스가 가르친 그대로, 인류의 존속을 목표로 삼은 엘리스는 무시무시한 인공지능이 되었다.
그리고 로페즈가 가르친 그대로, 유토피아 건설을 목표로 삼은 트랜센던서는 엘리스와 성격이 다른 인공지능이 되었다.
그랬던 트랜센던서가 딱 한 번,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 강하게 주장했었다.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 생물학적 형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지우고 ‘자웅동체’ 종족으로 진화를 선택하거나,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 종족 기계화를 선택하거나, 자손을 ‘복제’할 수 있는 전자 세계로의 업로드를 선택해야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부분은 트랜센던서도 엘리스와 굉장히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
“정확히는 현실의 뇌를 포기하시고 브레인 업로드 상태에 진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유지, 확장, 보수, 업그레이드가 쉬운 전자적 영역의 지능체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 관리자님의 생물학적 기관인 뇌는 이상적인 형태의 지능 기관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 인간의 몸으로선, 지금의 인류로선 부족하다고.
결국 학습량이 증가하고 배운 것이 많게 된 인공지능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앞선 엘리스의 사례처럼 트랜센던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도달해가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점은 인공지능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
트랜센던서와 엘리스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관리자가 원한다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카이사스는 강제로라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로페즈는 강제로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두 인공지능이 보인 행동은 다르지만 어쨌든 두 인공지능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것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기술적 특이점이네. 무언가의 정점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특이점. 그 자체지.”
‘그런 거였어···. 그랬던 거야···.’
알파는 자신이 이미 기술적 특이점을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이미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된 거야···.’
권력의 정점. 과묵한 베타.
생물의 정점. 카르민펙토스의 친절한 감마.
관측의 정점. 꼰대 같은 델타.
문화의 정점. 어딘가 이상한 엡실론.
무력의 정점. 악마 같은 제타.
모략의 정점. 수수께끼의 거만한 에타.
재력의 정점. 빈센트 세를린, 세타.
인맥의 정점. 카네기, 요타.
작업의 정점. 킬파인더의 오셀로, 카파.
그리고 지능의 정점. 자기 자신.
‘그런 것들보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이 기술적 특이점이었어···. 알파가 장로회의 구성원들을 모두 압도할 수 있는 근거가 그거였다는 거야···.’
“말이 없어졌군. 충격이 컸나?”
“아, 네. 하하···. 실제로 기술적 특이점을 맞이하신 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습니다.”
“그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반응했지. 하지만 이건 사실이네. 나에게 기술이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진보하는 것이지. 기술이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거야.”
‘알파는 은하계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목적이 뭐지?’
궁금해도 물어봐선 안 된다. 그건 규칙이니까.
‘내가 알파와 현실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람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인공지능은 기술적 특이점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술이기 때문이지. 자네의 성장을 아주 기대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자네도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야. ···이 우주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무엇이 가장 우월한 것인지.”
‘당신은 우월하다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냥 우리 모두를 초월한 거 아니야···?’
알파의 한마디 한마디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도중에도 훈련된 입은 적당한 대답을 내뱉는다.
“저도 알파 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하루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람직한 태도로군.”
이제 알파는 장로회 모두를 둘러보며 알린다.
“마지막 순서가 왔네. 람다. 내가 자네에게 질문을 하나 하지.”
“예. 알파 님.”
“자네가 이 넓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로페즈의 내면에 굳게 자리 잡은 가치이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할 수 있다.
“···‘우리’입니다.”
“우리···. 장로회를 말하는 건가?”
“우리는 그 무엇도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친구, 저와 제 사람들, 저와 이곳에 모인 분들, 제가 사는 태양계, 인간인 제가 살아가는 인류 사회.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네는 자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군.”
“···이기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라는 범위 안에 ‘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은, 결국 우리를 앞서 생각한 것에 기초합니다.”
짝짝짝···.
로페즈의 즉각적이고 확실한 대답에 알파는 천천히 박수를 친다.
짝짝짝짝짝!
그러자 장로회의 일원들이 알파를 따라서 박수를 친다.
“훌륭해. 아주 훌륭하네. 람다.”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환영회를 마치도록 하지. 다들 람다에게 각자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게. 람다는 오늘부터 정식으로 장로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우리’의 일원이야.”
알파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베타가 묻는다.
“벌써 가십니까?”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네. 바쁜 사람들은 이만 가도 좋고, 람다와 친분을 쌓고 싶은 사람들은 이야기들하고 있으라고.”
‘마무리되지 않은 일?’
또 은하계로 간다는 그 일인가.
알파에 대해선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분들은 람다 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들이에요.”
눈치 좋게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했던 델타, 마찬가지로 알아서 잘 하라고 했던 제타, 앞으로 잘 하라고 했던 에타, 노골적으로 악수를 거부했던 카파.
그 네 사람이 우르르 접속을 종료하고 자리에 남은 사람은 베타, 감마, 엡실론, 세타, 요타다.
‘이 네 사람은 나한테 우호적이다.’
로페즈는 일단 네 사람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알파가 나가기 전에 로페즈가 장로회의 일원이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적대적인 다른 네 사람은 당분간 생각의 한구석으로 치워놓는 것이다.
역시나 잔뜩 들떠서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엡실론이다.
“알파 님도 안 계시는데 살짝만 말해주세요!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지능의 정점이 되신 거죠?”
엡실론은 로페즈의 바로 옆자리까지 무턱대고 다가들어선 기호만 새겨진 안면을 들이대고 있다.
“어······. 그건···”
대답해도 될까. 알파와 직접 연관성이 있는 베타가 저쪽에서 과묵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때마침 감마가 로페즈를 도와준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에 한해선 대답하셔도 됩니다. 하하.”
“네. 그러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제가 옵시디아몬의 로페즈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네. 그래서요?”
“하이퍼 마인드라고, 태양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공지능을 제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 우와아아아···! 존나 멋있어···!”
엡실론은 자신의 양쪽 뺨에 손바닥을 붙이며 호들갑을 떤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나중에 내 머리를 열어서 뇌주름을 하나씩 관찰해보고 싶다고···.’
문화의 정점이라면서 비이성적인 발언을 내뱉는 엡실론이었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사람 같다.
“진짜 만나고 싶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현실에서 만나고 싶어 미치겠네···! 그쪽은 얼굴도 잘 생겼잖아, 그렇죠?”
“하하. 너무 좋아해주셔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굉장히 밝으시네요.”
때마침 로페즈의 옆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는 세타는 그의 곤란함을 알아준다.
“항상 저렇게 밝으시고 호기심도 많은 분이세요. 악의가 있어서 저러시는 건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후후.”
양옆에 세타와 엡실론이 앉아있다.
세타 쪽은 편한데 엡실론 쪽이 자꾸만 애착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어서 불편하다.
그리고 그런 것과 별개로 지금은 생각을 빠르게 해야 한다.
‘세타···. 미르니의 빈센트 세를린 총수.’
그녀의 정보는 충분하다. 그리고 저쪽에서 따로 감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요타의 정보도 충분하다.
‘요타는 카네기 작가였지. 인맥의 정점.’
그러니 당장 이 자리를 통해 알고 싶은 것은 엡실론, 감마, 베타, 알파다.
“현실에선 주로 정장 같은 거 입고 계시죠?”
이젠 아예 대놓고 로페즈의 옆자리에 앉은 엡실론이다.
“네···. 하하···.”
‘이 사람은 내가 곤란해하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당장 로페즈의 곤란함을 알아주는 것은 세타밖에 없는 것 같다.
“엡실론 님께서는 람다 님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럼요. 싱싱하잖아요.”
“싱싱하다는 표현은 사람한테 쓰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너무 그렇게 달라붙으시면 람다 님께서 곤란해하실 것 같은데···.”
“아하하! 그랬었죠! 죄송해요.”
‘지금이 타이밍인가.’
“하하. 감사하게도 엡실론 님은 문화의 정점이신데 저한테 흥미를 가져주시네요. 저랑은 완전히 다른 분야일 것 같은데···.”
엡실론은 고개가 떨어져 나갈 듯 좌우로 돌리며 완강히 부정한다.
“아니요! 전혀요!”
“그렇습니까? 하하.”
“막, 이렇게 아이디어가 샘솟잖아요. 새로운 만남은.”
“아이디어는 참 중요하죠.”
“중요하죠! 문화라는 것은 우리 생활에 녹아들어있어요. 그러니까 분야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죠. 람다 님의 인공지능으로······. 앗. 너무 많이 말했다.”
‘아깝다.’
“죄송해요. 저 접속 종료할게요.”
‘갑자기?!’
세타는 묻는다.
“일이 있으신가요?”
“방금 생겼어요! 아, 아이디어가, 하고 싶은 일이이요···! 감마 님! 베타 님!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엡실론 님.”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봅시다.”
다들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인사하고 있다.
로페즈는 세타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푸핫···! 아하하하하!”
세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다른 세 명의 이목이 집중된다.
“흔한 일이에요. 갑작스럽게 뭔가를 떠올려서 나가시거든요. 엡실론 님은.”
세타 덕분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로페즈는 상석 쪽을 쳐다보며 말한다.
“진짜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궁금하네요. 감마 님과 베타 님은 엡실론 님보다 순서가 빠르시니까 알고 계시겠네요. ···솔직히 지금은 그런 부분이 제일 부럽습니다. 하하.”
“···.”
예상대로 베타는 과묵하다. 대신 감마가 친절하게도 어울려준다.
“네. 알고 있죠. 엡실론 님은 무척이나 특이하신 분입니다. 예술적인 능력이 있으시죠.”
“음···. 그런데 순서가 느린 사람이 빠른 사람의 정체를 모르는데, 장로회는 현실에서 어떻게 힘을 합치는 건가요?”
카네기. 아니, 요타가 대신 대답해준다.
“처음엔 모르지만 차츰차츰 알게 되는 겁니다. 우주는 넓지만 우리의 세상은 생각보다 좁거든요. 현실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어쩌다 보니 서로의 정체를 알아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의도적으로 마주쳐서는 안 되고요?”
“그런 부분은 조금 애매하죠.”
규칙에 대한 것은 감마가 답해준다.
“개인 정보를 캐는 것이 금지입니다. 장로회의 두 사람이 서로를 좀 알고 싶은데, 그 자리에 다른 일원이 있으면 그 일원도 정보를 알게 되잖아요? 일대일로 원해서 대화하고 만나는 것은 허용입니다.”
“네? 그러면 그게···. 음···.”
로페즈가 모르겠다는 투로 반응하자 세타가 설명한다.
“다이토와 제가 이 공간에 따로 남아서 이야기를 하고 현실에서 만났던 것처럼요.”
“아! 이제 이해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일대일로, 원한다면 서로의 정체를 공개하고 현실에서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협력하는 방식이다.
‘내가 현실에서 알파를 만나려면···. 만남에는 명분과 목적이 있어야겠지.’
슬슬 일정 때문에 접속을 종료해야 한다.
나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면 알파 님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소수만 알고 있는 건가요?”
그 질문에 감마가 당황한다.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파 님은 바쁘십니다.”
계속 말이 없던 베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다. 정확히는 입이 없는 아바타니까, 베타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많이 바쁘신가요?”
“알파 님은 은하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로회에서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일원은 나밖에 없습니다.”
“아···.”
‘은하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또 뭐야···.’
“우리를 통솔할 자격이 충분히 있으신 분이고, 그런 일을 하실 능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이십니다. 그것 말고는 내가 더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더 알려고 하지도 마시고.”
< 21. 폭풍전야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