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09화 (108/183)

< 21. 폭풍전야 (3) >

***

“···제게 몸이 생겼습니다.”

“와아!”

개발자들은 성공적인 결과물에 박수를 친다.

“그 기계 구체랑은 많이 다르지?”

“···신원확인. 보조 권한자. 로페즈. ···개체명 확인.”

커다란 전쟁기계는 자그마한 로페즈에게 묻는다.

“저는 카일포트리스입니까?”

“넌 더 이상 2번 인공지능이 아니야. 옵시디아몬의 카일포트리스. 포트리스 계열의 저격병과, 사족보행 전쟁기계가 되었어.”

“제 안에 입력된 데이터를 로드하는 중입니다.”

카일포트리스는 자기 손에 들린 커다란 저격총을 이리저리 만져보거나 네 다리에 달린 기관포를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그런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자기 머릿속을 정리하며 기억을 되찾아가는 모습 같다.

“입력된 데이터를 전부 확인했습니다. 하이퍼 마인드와 연결 성공.”

“네가 뭔지 이해했어?”

“그렇습니다. 그런데 로페즈 님. 제 관리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별동연구소. 지금 만나러 가자.”

“알겠습니다.”

키잉!

두꺼운 네 다리의 관절이 규칙적으로 회전한다.

“그 무게로 달리면 도로가 부서지니까 천천히 와.”

***

별동연구소의 사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카일포트리스를 구경한다.

“앞으로 별동연구소를 지켜줄 카일포트리스입니다.”

“진짜 크네요.”

“새로운 전쟁기계구나···.”

“멋집니다. 너무 멋있어요.”

그들은 카일포트리스의 세련된 디자인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어서 건물에서 뒤따라 나온 샌디는 긴가민가 하면서 카일포트리스에게 다가든다.

“너···. 2번이야?”

“반갑습니다. 관리자님. 저는 2번 인공지능이었던 카일포트리스입니다.”

“듬직해졌네.”

“관리자님과 별동연구소의 인적, 물적 자산을 보호하겠습니다.”

샌디는 로페즈에게 묻는다.

“이름이 카일포트리스인가요?”

“하이퍼 마인드에선 카일포트리스라고 불러요. 샌디 씨가 따로 별명을 붙여주셔도 상관은 없죠.”

“그럼···.”

샌디는 카일포트리스의 머리를 보려고 고개를 한껏 치켜든다.

키잉.

카일포트리스는 그녀의 행동을 인식했다. 다리와 허리를 살짝 굽혀서 그녀와 눈높이를 최대한 맞추어준다.

“나는 널 카일이라고 부를게.”

“알겠습니다.”

기계 구체에 담긴 2번 인공지능이었던 카일포트리스. 녀석은 이제 별동연구소의 앞에 문지기처럼 선다.

“지금부터 평소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러자 연구소 사원 한 명이 주변 사원들에게 말한다.

“우리도 평소 임무나 하러 갑시다.”

“거의 매일 보겠네. 잘 부탁한다. 카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들어갑시다.”

사원들은 업무로 복귀한다. 그러는 가운데 샌디는 로페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

“시험용 만능 항체가 완성됐어요. 같이 봐주실래요?”

“네. 그러죠.”

그 후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약품제조실에 들어왔다.

샌디는 하얀색 액체가 담긴 시험관을 하나 가져와서 로페즈에게 넘겨준다.

“만능 항체는 새로운 종류의 세균이에요.”

“세균이요?”

“인간이 발견한 모든 종류의 질병 유전자를 담고 있는 세균이죠.”

“그런 걸 사람한테 투여해도 돼요?”

“항체라는 것은, 몸속의 유해한 것에 저항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녀는 로페즈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발열, 어지러움, 기침, 두통, 피로, 오한 등을 느낄 수 있어요. 대증요법이···. 그러니까 증상을 완화해주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백신이에요. 개인의 면역력에 따라 증상은 최소 3일에서 일주일까지 지속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걸 견뎌내고 나면 몸에 만능 항체가 생긴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만들고 보니까 ‘만능’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 같아요.”

“왜요?”

“인간이 질병을 정복했다고는 하지만,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질병들이 아주 많을 거예요. 그리고 감기처럼 계속 변이하는, 바이러스 같은 질병에 대해선 저항력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만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능이라고 발표하면 거짓말이 되겠네요.”

“네. 로페즈 씨의 방식이라면 이걸 세상에 선보이실 때 과장해서 발표하진 않으실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만능이라기보다는···. ‘통합 백신’이라고 하는 게 옳겠어요.”

로페즈는 시험관 속에 담긴 하얀 액체를 살펴본다. 이쪽 분야의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그냥 우유처럼 보인다.

이 액체처럼 보이는 세균이, 지금껏 인간이 발견한 모든 질병들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단합니다. 샌디 씨. 정말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백신을 만들어주셨어요.”

로페즈가 솔직하게 칭찬하자 샌디는 자신의 까만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아, 아직 시험용이에요. 유기체 임상실험과 동물실험까지만 끝낸 단계니까요.”

“거기서 몇 단계를 더 해야 하죠?”

“나라에 신고해서 인간을 대상으로 임상시험만 마치고 정식으로 등록하면 끝이죠.”

“인체실험 같은 건가요?”

로페즈가 가볍게 내뱉은 그 단어에 샌디는 기겁한다.

“임상시험! 인체실험이랑은 달라요!”

“아, 다른 거구나.”

“아주 다르죠.”

“그런데 현실에 가까운 시뮬레이션이 있는데 굳이 임상실험이 필요해요? 나라 일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바로 등록해도 될 것 같은데요.”

「옵시디아몬이 해당 백신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판매하기 위해선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임상실험은 어떤 신약도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하는」

트랜센던서는 거기까지만 출력하다가 멈췄다.

샌디가 트랜센던서의 주장을 그대로 읊었기 때문이다.

“옵시디아몬이 ‘통합 백신’을 소유하고 판매하려면 법으로 정해진 절차를 통과해야 해요. 마약처럼 불법으로 팔 게 아니라면 임상실험은 필수적인 절차에요.”

로페즈는 또 이렇게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저는 샌디 씨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배우네요.”

“으음···.”

“고생하셨어요. 샌디 씨가 만든 물건이라면 그 임상실험이라는 절차도 간단히 통과하겠죠.”

샌디는 갑자기 로페즈의 시선을 피한다.

“···투여받으면 생명에 위독한 증상이 나타나요. 그걸 대증요법으로 완화해서, 항체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식이라서···. 물론 투여도 병원에서 받고 치료도 병원에서 받을 테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라에선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어요···.”

“제가 되게 만들게요.”

“···네.”

이것은 옵시디아몬이 의학계로도 진출하는 발판이자, 최단기간에 유토피아를 확장하기 위한 주요 자금원 중 하나다.

로페즈는 시험관을 샌디에게 돌려주려고 내민다.

“···.”

그러자 샌디는 시험관과 함께 로페즈의 손을 잡는다.

“···?”

그녀는 그러더니 손을 잡은 채 좌우로 살살 흔들며 생긋 웃는다.

“요즘에 너무 바빠 보이세요.”

바쁘긴 하다. 아주 바쁘다.

‘장로회, 미르니, 세를린 총수, 카네기, 유토피아, 방사능 격리 기술, 프랙탈 함선, 은하계 지도, 통합 백신···.’

머릿속에 나열하자니 끝도 없다.

한 번쯤은 이것들을 잊어버리고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금껏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푹 쉬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러게요. 계속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언제나 머릿속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아, 역시 로페즈 씨는 이렇게 말하면 모르시는구나.”

“네?”

“바빠 보인다고 말씀드린 건, 빈 시간이 없냐는 질문이었어요.”

“그래요?”

“또 해석하자면 이번 주말에 데이트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두 번이나 해석하는 거예요?”

“로페즈 씨는 대단한 사람들 만나시면서 협상 같은 것도 자주 하시지 않아요?”

“정말 자주 하죠. 그만 좀 하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왜 이렇게 모르시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기어들어가서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느낌이다. 살며시 잡고 있는 손은 아직도 놓아주지 않고 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샌디 씨는 첫인상과 많이 달라지셨네요.”

“어디가 어떻게요?”

그때는 절망하는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억지로, 가까스로 살아가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때는 좀 카리스마 있고 냉철한 느낌이었죠.”

“그때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지구에 있던 연구소. 그때의 리버레이터 사건 당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이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가며 죽는 광경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어쩌면 로페즈가 지하의 비밀연구소에서, 팀원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걸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을까.

가장 힘들었던 시기.

어쨌든 그건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샌디 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으면 좋겠네요.”

“저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왜요?”

“그냥···. 가장 행복한 시기는 좀 나중이어도 좋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트랜센던서도 아까부터 조언이 없다.

“아무튼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억지도 부리고 가볍게 웃고. 갑자기 만지기도 하고 그래요.”

“하하. 그래 보여요.”

“혹시 싫어지신 건 아니죠? 싫으시다면 이런 식으로 안 할게요.”

“아니요. 귀여워서 좋습니다.”

“바, 바쁘실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아무튼 시범···. 실험, 아니, 시험용 그거 나라에 신고해서 임상시험 그것 좀, 그렇게 해주세요.”

「샌디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그런 발언을 하신 겁니까? 매우 우호적인 그녀를 상대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훌륭합니다.」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조용하던 트랜센던서는 마지막에 느닷없이 로페즈를 칭찬했다.

***

퇴근 후 집으로 온 로페즈는 카네기를 통해 얻게 될 은하계 지도를 상상한다.

“어떤 행성이 좋을까?”

- 테라포밍이 가능한 천체, 자원이 풍부한 천체가 항성의 공전궤도에 많은 편이 좋습니다.

“행성이 많은 라디에크 항성계처럼?”

-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성이 많으면 파벌도 많아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잖아. 난 라디에크에 알 샤이탄이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이 있는 줄은 몰랐어.”

- 그것은 라디에크 항성국가의 정부가 국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나중에 카네기 씨랑 더 이야기해서 알 샤이탄을 상대로 병기를 테스트해야겠어. 거기엔 실제 전장이 있으니까. 우리가 테러리스트를 밟아주면 좋은 기회도 생기겠지.”

- 아주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이전의 로페즈였다면 전장의 활용성보다 전장의 비극이라는 면에 주목했으리라.

- 관리자님. 발신지 불명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스팸 아니고?”

- 메일의 내용이 수상하여 스팸으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로페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제목: 당신을 초대합니다.」

「발신자: [null]」

「수신자: 로페즈 개인」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될 자격을 세계에 증명하셨습니다.」

「2599년. 4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대전쟁과 생존권 자립으로 허비한 인류는 폐허 속에서 우주로 솟아나, 오늘날의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계의 곳곳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술비대칭, 분쟁, 계층사회, 감시사회, 부패, 범죄. 우리는 우리의 영역이 넓어진 탓에 우리의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작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선조들이 저지른 실수와 같은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따라 이전에 저지른 실수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영구히 살아남기 위해선,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들이 뭉쳐야 합니다.」

「또한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종말이라는 비극을 낳을 수 있는 재앙의 씨앗이 됩니다.」

「국적도 성격도 신념도 하는 일도 다른 우리는 서로 소통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개인의 신변이 보호받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조화와 불가침을 규칙으로 삼아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합니다.」

「떠오르는 대기업. 유토피아와 하이퍼 마인드를 소유한 옵시디아몬 코퍼레이션. 놀라울 만큼 빠른 신기술 개발속도로서 인공지능의 선두주자가 되신 로페즈 회장님.」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의 주소로 이동하여 우리에게 접속해주시길 바랍니다.」

말 한마디로 역사를 창조하는 자들.

손짓 한 번으로 대사건을 주무르는 자들.

만들고, 지우고, 없애고, 합치는 자들.

이 광활한 세계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자들.

그들은 장로회다.

- 가실 겁니까?

망설일 것도 없다.

“가자.”

진정한 정점을 향해서.

< 21. 폭풍전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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