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폭풍전야 (2) >
***
“팬입니다!”
그 순간, 카네기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한다.
“와하하하하! 회장님! 진짜로요?”
“네! 제가 그 원작자 이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저희 대주주님인 줄은 몰랐죠!”
“아휴, 이런 맙소사. 무슨 이런 엇갈림이 다 있나요?”
“아까 팬사인회 하셨다고 했죠? 이게 들어보니까 뭔가 이상한 거예요. 팬사인회가 끝난 시간대랑 주주총회 시작하는 시간대랑 바로 이어지는 것도 그렇고···. 카네기 작가님이 오셨다는데 생각해보니 주주총회에도 카네기라는 대주주님이 계시잖아요?”
“너무 웃기네요. 이건 뭐 우연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그냥 서로가 알고도 자세히 몰라서 못 만났네요. 하하하! 아, 재밌어.”
로페즈는 친근하게 웃는다.
“그러니까요.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함께하실까요? 아까 주주총회에서 말씀하신···. 아니다. 이건 변명이고요. 그냥 솔직히 비히리비엘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예! 물론이죠. 갑시다. 당장 갑시다! 하하하하!”
‘내 팬이었다니. 살다 보니 이런 로또를 다 맞아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어필 좀 할걸.’
그리고 로페즈는 아까부터 속으로 되뇌고 있다.
「관리자님.」
‘나는 카네기가 요타인 줄 모른다. 나는 카네기가 요타인 줄 모른다. 나는 카네기가 요타인 줄 모른다···.’
「? 관리자님의 뇌파 반응이 이상합니다.」
***
이곳은 유토피아의 번화가에 체인점을 차린 어느 유명 레스토랑이다.
로페즈는 카네기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엔딩 다음에 외전을 내실 생각은 없으시다는 말씀인가요?”
“네. 비히리비엘과 주인공의 향후는 보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기로 했죠.”
“아···. 너무 아쉽네요. 제가 그 책을 읽었을 당시엔 개인적으로 그 외계종족을 물리친 다음의 스토리가 조금 더 진행될 줄 알았거든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인 비히리비엘이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장면. 거기서 딱 매듭을 짓는 게 여운이 오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굉장히 뭔가···. 마지막 장면에서 승리했다는 통쾌함보다는 비히리비엘이 희생했다는 슬픔이 먼저 밀려왔어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엔딩이 됐는데 이건 뭐···. 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이고. 하하. 감사합니다.”
로페즈는 대화의 흐름을 서서히 바꾼다.
“옵시디아몬의 인공지능도 작가님의 비히리비엘을 조금 참고한 부분이 있어요.”
“하이퍼 마인드요?”
“네. 인간 우선주의라고 할까요. 인간을 위해 움직이되, 권한 있는 인간의 명령을 절대로 어기지 않는 식이죠. 이걸 권한자 개념이라고 해요.”
“아, 그건 저도 압니다. 아까 제 휴머노이드 보셨죠?”
“네. 라디에크 항성국가에서 만든 모델인가요?”
“모델도 그렇고 안에 들어간 인공지능 소스도 그렇고 다 라디에크에서 만든 겁니다. 이름은 잭(Jack)이라고 하죠.”
“짧고 간결하네요. 그런데 왜 사람 대신 휴머노이드를 쓰시는 건가요?”
“사람이면 좀 불편해서요. 남들한테 알릴 수 없는 이야기를 상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남들에게 알려져선 안 될 이야기를 발설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장로회를 말하는 건가.’
“그래서 제가 투자로 처음 성공했을 때부터 줄곧 잭만 쓰고 있습니다. 학습 기간이 길어서 웬만한 사람만큼 눈치가 좋죠.”
“학습 기간이 긴 인공지능은 항상 부럽습니다. 저희 하이퍼 마인드는 1년 조금 넘게 학습했거든요.”
“그래도 학습의 총량이 달라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하. 저는 오히려 회장님의 능력 있는 인공지능이 부럽습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졌다.
이제 카네기에게 슬쩍 빚을 안겨줄 차례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잭을 좀 업그레이드해드릴까요?”
“오···. 어떻게요?”
“학습 알고리즘을 최적화시켜드릴 수 있어요. 잭이 학습하는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겠죠. 작가님께는 무료로 해드릴게요.”
카네기는 싱글벙글해진다.
“아휴,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잭이 질문이 많아서 좀 답답하던 참이거든요.”
“그게 어떤 논제에 대해 이해를 못한 상태라서 계속 비슷한 질문으로 물어보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해서 판단한 결과에 오차를 인식한 것이죠.”
거기까지 들은 카네기는 살짝 목소리를 낮춘다.
“···저기, 회장님.”
“네.”
“아까 사옥 앞에 그 전쟁기계 있잖아요?”
“나이트포트리스 형제요?”
“그런 비슷한 전쟁기계 어떻게 하나만 구매할 수 없을까요?”
로페즈는 일단 대답을 망설이는 듯 턱을 어루만진다.
카네기에게 전쟁기계 하나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부탁을 고민하는 내색도 없이 바로 들어줬다간, 곧 자신이 꺼낼 부탁을 하기에 불리한 입장이 될 수 있다.
“조금 곤란하네요. 그건 판매하는 병기가 아니라서요. 꼭 그게 필요하신가요?”
“저는 라디에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디에크 항성계는 행성이 많고 분쟁도 있는 국가죠.”
“분쟁이요?”
다른 항성계의 정보는 트랜센던서가 검색하기에 쉽지 않다. 인터넷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디에크에는 알 샤이탄(Al-Shaitan)이라는 테러리스트 반군이 있습니다. 거기 분위기가 요즘 심상치 않아서요. 물론 제가 사는 행성은 분쟁이 발생한 행성이랑 멀찍이 떨어져 있긴 한데···. 그래도 옵시디아몬의 전쟁기계 하나가 제 집 앞마당에 있으면 든든할 것 같습니다.”
“흠···.”
그래도 로페즈는 바로 수락해주지 않는다.
“정 그러시면 이건 어떠세요? 제 집으로는 라디에크의 유명 인사들이 가끔 방문하기도 합니다. 옵시디아몬의 전쟁기계를 앞마당에 세워두면 그 사람들한테 어필할 기회도 생기는 셈이고요. 나중에 라디에크로 병기를 수출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뜻밖의 기회까지 잡았다.
“그럼 저도 하나만 부탁하고 싶네요.”
“말씀만 하시죠. 하하.”
“저한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태양계에서 벗어나서 국가를 세우는 것이죠. 옵시디아몬이 그동안 이동식 모듈화 콜로니를 만들고 테라포밍 관련 기술을 개발했던 것들이 다 그 목표에 향하는 과정이었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네요.”
“네. 그래서 미리 테라포밍 실험도 하고 자원 개발 시범도 해보고···. 신흥국가를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아요.”
이것이 본론이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땅을 좀 알아보고 싶은데요. 이게 은하계 지도가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고 자원이 풍부한 별을 일찍이 선점하여 정착하기 위해서죠.”
“결국 은하계 지도나 괜찮은 항성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하하.”
“제가 그 분야에서 괜찮은 분을 알고 있는데, 소개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작가님을 위해서 세상에 하나뿐인 무인 전쟁기계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족보행이 좋네요. 아까 그 나이트포트리스처럼요.”
“그럼요. 포트리스 계열로 만들어드리죠. 나중에 완성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도 이 은혜는 확실하게 정산하겠습니다. 회장님.”
이제 됐다.
“앞으로 뵐 일이 많을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하하.”
그렇게 로페즈는 새로이 정착할 미개척 행성의 정보, 장로회의 요타와 형성된 친분, 언제든 필요한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는 연락망까지 단번에 얻게 된 것이다.
***
- 장로회의 요타, 카네기는 공항을 이용하여 라디에크 항성국가로 돌아갔습니다.
“계속 같이 갈 사람인 것 같아. 인맥의 정점은.”
- 카네기는 이제껏 관리자님과 접촉한 인물들 중에 가장 활용성이 큽니다.
“장로회에 들어가서도 도움이 되겠지.”
식사를 마친 다음 일정은 옵시디아몬 부지의 전쟁기계 생산시설이다.
생산시설의 격납고 앞에 병기 개발 부문의 개발자들과 자이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로페즈는 앞장서서 생산시설의 문을 원격으로 개방한다.
“어떻게 완성됐나 한번 봅시다.”
쿠우우우우···.
가로 20m, 세로 20m의 강철 문이 좌우로 갈라진다. 격납고 안의 어두운 실내에 일제히 조명이 들어오면서 이번에 생산된 전쟁기계를 내리비춘다.
개발자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개한다.
“카일포트리스(Kylefortress)입니다.”
사족보행의 하체 위에 사람 같은 상체가 붙은 전쟁기계다. 머리는 망원경을 앞뒤로 길게 잡아뺀 것처럼 생겼고 양손으로는 웬만한 장갑차보다 무거워 보이는 저격총을 들고 있다.
“본체는 신장 17미터, 중량 120톤, 소형 유도미사일 백팩과 다리에 부착된 다목적기관포 네 정으로 무장했습니다.”
기관포라면 물리적인 총탄을 쓴다는 말인데, 보통 기관포의 아래에 늘어뜨리는 기다란 탄창이 보이질 않는다.
“총알은 어디에 넣었죠?”
“다리 하나에 180발씩, 22구경 지능형 에너지탄 720발입니다.”
카일포트리스가 하체비만처럼 보이는 이유였다. 네 다리를 합친 두께가 상체보다 훨씬 두꺼운 것이다.
어쨌든 소형 유도미사일이든 기관포든 전부 카일포트리스의 본체에 붙은 무장이다.
중요한 건 지금 카일포트리스가 들고 있는 저 커다란 저격총이다.
길이가 9미터는 될까. 대물 저격총 이상의 파괴력이 느껴진다. 총열의 무게감이나 길이만 보면 어느 전차의 화포라도 떼어온 것 같다.
다만, 총구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상의 병기나 가우스 병기처럼 무언가를 발사하는 구멍이 없다. 대신 총구가 있어야 할 부분의 살짝 안쪽에 전극의 단말 같은 것이 촘촘하게 붙어있다.
“저기 손에 들고 있는 화기는 구성이 어떻게 되죠?”
“곡사와 직사로 격발 방식을 전환할 수 있는 초장거리 인공하전입자병기입니다. 대기권의 목표물을 노리면 발사궤적이 노출되는 대신 플라즈마화로 화력을 더할 수 있고, 대기권 밖의 목표물을 노리면 입자병기 기반의 방어함포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아광속으로 발사되는 야전포네요.”
“화력은 야전포지만, 인공지능이 내장되어 있어 엄청난 정확도로 초장거리의 목표물을 ‘저격’할 수 있습니다.”
「카일포트리스의 화기는 행성에서 곡사로 사용되었을 때 코리올리 효과와 경사도를 무시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이는 행성의 특정 지점에서 행성 반대편의 특정 지점까지, 포물선 궤도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행성의 한쪽 대륙에서 반대편 대륙의 목표물까지 ‘저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엄청난 정확도를 하이퍼 마인드의 연산이나 보정에 의존하지 않고, 전쟁기계 본체에 내장된 인공지능이 수행할 수 있다.
하이퍼 마인드의 네트워크가 닿지 않는 영역에서도 본래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샌디의 2번 인공지능이 내장되어 이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전원은 꺼져있는 거죠?”
“예.”
“켜보세요.”
한 개발자가 격납고로 들어갔다. 그러자 몇 초 후 카일포트리스의 망원경 같은 머리에 초록색 불이 안광처럼 들어온다.
“카일포트리스.”
키잉···. 키이잉···.
전원이 들어온 카일포트리스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여기야. 아래.”
두리번거리던 고개가 그제야 로페즈를 찾아낸다.
이어서 약간 높은 음의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
“시야가 높아졌습니다.”
“어때?”
카일포트리스는 고개의 각도를 더 아래로 꺾어서 자신의 다리 쪽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다시 로페즈를 쳐다보며 망원경 같은 머리를 앞뒤로 길게 늘려본다.
철컥. 철컥. 철컥.
반투명한 렌즈처럼 생긴 안면 안쪽에서 외눈처럼 빛나는 안광이 빨강, 초록, 파랑으로 전환된다.
철컥.
그러다가 처음의 초록색 안광으로 되돌아왔다.
그제야 카일포트리스는 깨닫는다.
“···제게 몸이 생겼습니다.”
행성 전체와 대기권 바깥까지 타격하는 최강의 저격수가 탄생한 것이다.
< 21. 폭풍전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