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105화 (104/183)

< 20. 처세술 (4) >

***

사무실의 유리창 밖으로는 세를린의 경호원들이 창고를 정리하고 있다.

“자이칸 씨라고 하셨나? 저쪽에 한쪽 팔 잘리신 분.”

“예.”

로페즈와 세를린은 단둘이 사무실에 있다.

“병원 안 가도 괜찮데요?”

“자이칸 씨는 개조인이라서 괜찮습니다.”

“역시 싸우는 직업은 개조인이 편하긴 하네요. 제 경호원들도 다 개조인이거든요. 그런데 다이토 녀석 작업자들은 그냥 평범한 몸이데?”

창밖을 보던 로페즈는 세를린에게 시선을 옮긴다.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네. 진실이고 뭐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어요. 기분 상하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어차피 다 정리되었다. 이제 와서 기분 상할 것은 없다.

“괜찮습니다. 저 같아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답하자 세를린이 눈웃음을 짓는다. 로페즈도 그녀의 반응에 맞추어 가볍게 웃어준다.

「뇌파를 분석하지 않아 확정 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표면적인 분석 결과로 그녀는 관리자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금성 총수부 사람이 실종됐다고 뉴스 나오면 장로회에서 조사가 들어올 거예요. 다이토는 이곳, 가니메데에서 실종됐고 때마침 저랑 로페즈 회장님이 가니메데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장로회에서 알게 되면······.”

“피곤해지겠죠.”

“얘기가 잘 통하는 분이시네. 그게 지능의 정점인가요? 회장님은 이것도 저것도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아직 정식으로 장로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은 과찬이십니다. 하하.”

“다이토도 인조인간으로 만들면 뒤처리가 편하겠죠?”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저한테 맡기시죠.”

“좋아요. 그리고 우리 회장님한테는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네요.”

“네.”

“일단은 인조인간으로 만들어서 세간으로부터 숨기긴 숨길 건데, 장로회한테까지 다이토의 죽음을 숨기진 않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시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회장님은 그냥 당당해지셨으면 좋겠네요. 오늘 다이토를 죽인 사람은 제가 아니라 회장님인 것으로 입을 맞췄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장로회에 남아있는 일부 악감정을 다이토에게 떠넘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로페즈 회장님은 아직 장로회의 일원이 아니잖아요. 장로회에서 바깥 세계의 규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거든요. 다이토는 바깥 세계에서 바깥 세계의 인물인 회장님을 건드렸다가, 약해서 죽은 거예요.”

세를린이 다이토를 죽였다는 사실이 장로회에 알려지면, 그녀는 숙청의 대상이 된다.

「세를린은 장로회의 ‘세타’입니다. ‘세타’가 ‘람다’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은 장로회의 규칙에 위배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리자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싫다고 하면 여기서 날 죽일지도 모른다.’

다이토가 그녀의 앞에서 혀를 잘못 놀렸다가 죽은 것처럼.

지금의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다. 아까도 그녀는 선택권이 하나밖에 없다면서 그런 행동을 취했다.

‘어차피 거절은 못 해. 리스크를 감수하고 최대한 뭐라도 얻어 가는 게 나아.’

긍정적으로, 여기서 세를린과 이야기만 잘 마무리하면 매우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것이다. 사업적으로나 장로회의 접근성 측면으로나.

“···알겠습니다. 장로회에서 저와 총수님의 입장을 생각해봤을 때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네요.”

“결정이 빠르시네요.”

“대신에 저도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보죠.”

“세를린 총수님은 장로회의 세타입니다. 방금 람다가 죽었으니 총수님의 아래로는 ‘요타’와 ‘카파’만이 남은 셈입니다.”

“그 두 사람의 정체를 알려달라?”

“예. 그건 다이토의 인조인간을 만드는 것에 거는 조건입니다.”

내심 조마조마하면서 욕심을 내봤는데 세를린은 딱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 보인다.

「관리자님을 향한 세를린의 우호는 평균 이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다이토를 로페즈 회장님이 죽인 것으로 입을 맞추기 위한 조건은요?”

가장 중요한 부탁은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해야 한다.

“제가 장로회에 조금 더 일찍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큽.”

세를린은 웃음을 터뜨린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하아···. 아, 웃기셔요.”

‘하긴···. 공석인 람다 자리에 들어가겠다고 기를 쓰는 내 모습이 웃기게 보였겠지.’

그녀의 입장에선 별것도 아닌 부탁이다.

하지만 로페즈의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미래를 적잖이 바꿀 부탁이다.

로페즈는 그녀가 웃고 있어도 진지한 표정을 유지한다. 더 확실하고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부탁드려도 됩니까? 세를린 총수님. 저 진짜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큭···! 아하하하하하!”

세를린은 가까스로 심호흡을 하며 대답한다.

“후아···! 네! 그러세요! 내가 그렇게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저도 진짜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서로 싸울 일 없이 친하게 지내자고요.”

“총수님께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시는데 제가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다. 하하하.”

‘됐다.’

***

옵시디아몬의 지휘주력함이 완성되었다.

유토피아의 항구에 정박한 지휘주력함의 형태는 기하학적인 구조다.

- 프랙탈 구조입니다.

본사 타워에서 멀찍이 보이는 함선의 모양이 굉장히 특이하다. 뭐라고 설명하기에 복잡한 모양은 뿌리째 뽑힌 잎사귀 없는 나무를 십자가처럼 90도로 교차시켜 놓은 것 같다.

- 하부 갑판과 상부 갑판의 구분이 없습니다. 함선의 표면을 보호하는 장갑은 생물성 재생강철로 하이퍼 마인드와 연결되었습니다.

“물리적 경로로 침투해오는 해킹 공격도 막을 수 있겠네.”

- 그렇습니다. 장갑의 분자 단위로 구성된 극세사 회로는 비인가된 접촉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갑에 손상이 생겼을 경우 자동으로 복구됩니다.

“프녹스 씨가 만든 거야?”

- 그렇습니다. 그는 분자 단위의 보안체계를 고안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뚫리지 않을 보안체계. 이것이 트랜센던서의 도움을 받은 프녹스의 작품이다.

“우리의 다른 병기들에도 적용해. 이건 어디에 안 팔고 우리만 쓸 기술이야.”

- 알겠습니다.

“실드 출력은?”

- 반물질 엔진 및 제어로와 핵융합 반응로의 모든 출력을 함선 전체를 감싸는 에너지 보호막으로 전개했을 경우, 1초 동안 최대 3420메가톤의 충격을 버틸 수 있습니다.

단위가 너무 커서 실감이 안 난다.

“3420메가톤이면 어느 정도 화력인데?”

- 해당 화력의 수치를 다른 충격량에 대입할 경우 현대전에서 평균적인 위력의 핵미사일 342발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핵미사일 342발을 동시에 얻어맞아도 함선엔 아무런 피해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이야?”

- 그렇습니다. 모든 출력을 실드로 전개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면 무적 함선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 탑재된 실드는 부분 전개가 가능합니다. 보호막 형태가 아니라 작은 방벽 형태로 같은 순간에 여러 방향의 공격을 선택적으로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 함선의 방어력은 대충 알겠다.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건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다른 스펙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완성됐나?”

- 문자열로 출력해드리겠습니다.

「함명: (미정)」

「함종: 지휘주력함&기함」

「함번: ODM-C-1」

「건조: 옵시디아몬&크로노스」

「운용: 옵시디아몬」

「무게: 약 260만t」

「선폭(세로): 2.3㎞」

「선폭(가로최대): 1.5㎞」

「선폭(가로최소): 0.7㎞」

「작전범위: 은하계」

「엔진: 반물질 엔진 1기, 반물질 제어로 4기, 수소 핵융합 반응로 10기」

「무장: 초토화 분광기 1문, 256연장 플라즈마 함포 4문, 24연장 요격포 860문, 4연장 절단 레이저 방어함포 30문, 다용도 중력가속사출 발사기 30개」

- 초토화 분광기는 금성 정규 함대의 모선이었던 엑소스포터에서 사용하던 파멸 분광기를 개선한 주력함포입니다.

트랜센던서가 설명할 때마다 시야 앞에 함선의 특정 부분이 입체적으로 확대된다.

- 플라즈마 주력함포, 요격포, 절단 레이저 방어함포는 라 코만데의 지휘주력함이었던 인포시어에서 기술을 개선한 화기입니다.

- 또한 함선의 정면 돌출부에는 유토피아에서 사용하는 중력 조작 장치를 더했습니다. 측면, 후면 등 정면을 제외한 방향에서 오는 적대적 물체는 실드 한계선을 넘기 전에 중력장에 의해 일그러질 것입니다.

- 정면으로 오는 적대적 물체는 실드 한계선의 바깥 중력장까지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초토화 분광기에서 산란된 중성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목표물에 집중시키기 위함입니다.

“초토화 분광기는 정면으로만 쏠 수 있다는 거구나.”

- 그렇습니다.

그리고 옵시디아몬은 인공지능이 강점이다. 따라서 이 함선에는 트랜센던서의 소스를 활용한 인공지능을 넣기로 했다.

“그 함선에 최적화된 인공지능은 완성됐어?”

- 하이퍼 마인드 네트워크로 호출하시겠습니까?

“불러.”

이윽고 새로운 인공지능이 목소리를 낸다.

- 처음 뵙겠습니다. 관리자님. 저는 옵시디아몬의 지휘주력함에서 전략, 전술, 교전을 지원할 하이퍼 마인드 속의 상위 인공지능이자 트랜센던서 님의 하위 인공지능입니다.

여성적인 목소리의 기계음이다.

“목소리는 일부러 여자로 한 거야?”

- 트랜센던서 님은 관리자님께서 인공지능들의 구별을 쉽게 하실 수 있도록 저의 목소리를 여성으로 설정하셨습니다.

확실히 귀에 잘 들어오긴 한다. 지금까지 옵시디아몬에서 만든 인공지능들이 모두 남성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일까.

“너랑 함선의 이름부터 정해야겠어. 뭐가 좋을 것 같아?”

- 저와 함선에 이름을 붙이시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르기 쉬우려고.”

- 그렇다면 구별하기 쉽고 지칭하기 쉬운 이름이 좋을 것입니다. 저의 여성적인 목소리나 함선의 형태에서 착안하여 이름을 고려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로페즈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여성의 이름···. 인공지능에 그러긴 싫은데.’

왠지 엘리스가 생각난다.

“아, 알겠다.”

- 생각난 이름이 있습니까?

“프랙탈(Fractal).”

- 함선의 형태에서 착안하셨습니까?

“함명도 프랙탈로 하고 너도 프랙탈로 하자.”

- 함선과 저의 이름을 동일하게 지으시면 오히려 구분점이 흐려집니다.

“너랑 함선을 굳이 구분할 생각이 없어. 이렇게 같은 이름으로 하면 뭔가···. ‘의식’이 있는 함선 같아서 좋잖아.”

- 관리자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전자 세계에 있는 저를 현실 세계의 함선에 적용하여 인식하려는 것입니까?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보니 맞는 것 같다.

“어···. 응.”

- 그렇다면 저는 이제부터 옵시디아몬의 지휘주력함 ‘프랙탈’로서 관리자님을 사령관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좋지. 그런데 네 사령관은 내가 아니야.”

이날 화성의 PP인 베르도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로페즈, 엑스턴과 나란히 섰다.

세 사람은 각자 악수를 나누었고 베르도는 국민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프랙탈이라는 함명을 발표했다.

다른 국가의 외신들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함선의 건조에 이목을 집중했고 이는 화성의 군사력에 영향을 미쳐 외교적 이점을 가져왔다.

여담이지만 목성에서는 프랙탈보다 더 큰 함선을 건조하고 있다며 기습 발표를 했다.

옵시디아몬의 막강함의 상징이 된 프랙탈.

태양계 사람들은 프랙탈을 화성의 창, 유토피아를 화성의 방패라고 표현하는 식으로 별명을 붙였다.

***

적갈색의 원목 의자와 테이블. 보석 박힌 샹들리에.

11개의 의자들 중 8개가 공석이다.

장로회의 사이버 공간에 감마, 제타, 세타가 앉아있다.

“감마 님께서는 카르민펙토스 재단을 다시 만드실 건가요?”

“비슷한 것이 많아서 또 만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제타는 대뜸 묻는다.

“그나저나 세타 님. 로페즈는 어떻게 됐습니까?”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말씀드리려고 접속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은 두 분밖에 없네요.”

“로페즈가 죽었다는 소식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미르니와 옵시디아몬이 사업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이라고 보면 됩니까?”

세타의 아바타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꼬며 뜸을 들인다.

“···오해가 있었어요. 저랑 로페즈 씨랑.”

로페즈 때문에 전쟁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제타는 살짝 발끈한다.

“오해? 오해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저번에 람다와 현실에서 만난 것은 아시죠?”

“압니다.”

“람다가 멋대로 제 충고를 무시하고 함정을 팠어요. 로페즈를 죽이려고요.”

“그래서요?”

“람다가 역으로 당했습니다. 로페즈가 다이토를 죽였어요.”

“예?”

“금성 총수부 소속의 다이토입니다. 다이토가 죽었다는 뉴스는 없었는데요.”

“다이토는 인조인간으로 교체됐어요.”

“아이고······.”

감마는 아바타의 안면을 붙잡고 탄식한다. 그리고 제타는 세타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다이토가 죽을 때 세타 님은 뭘 하셨습니까? 어떻게 같은 장로회의 일원을 돕지 않고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세를린 총수!”

“날 함부로 세를린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뭐라고요? 이런 위아래도 없는···”

감마는 이번에도 마찰을 중재한다.

“자, 자. 뭔가 이유가 있었겠죠. 지금부터 들어보면 됩니다. 그렇죠? 빈센트 총수님.”

“네. 다이토가 죽은 다음에, 저는 로페즈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어떤 영상을 가져왔죠.”

“무슨 영상이요?”

세타는 테이블 위에 손짓하여 준비한 영상을 홀로그램처럼 띄운다.

“다이토는 공작의 정점이죠. 저는 그 힘이 콜렉퍼레이션에서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다른 힘이 있었어요. 다이토가 그걸로 ‘같은 장로회의 일원’인 제타 님을 방해한 겁니다.”

“갑자기 뭔···. 람다가 나를 방해하다니, 이 영상이 뭔데 그럽니까?”

“뉴소사이···”

- 알파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그 알림을 듣는 순간 세 사람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이다. 아, 베타는 없네.”

안면에 기호 ‘α’가 새겨져있는 그림자 아바타다. 감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제타는 쭈뼛거리며 감마를 따라 한다. 세타는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다.

“오셨습니까. 은하계 업무가 생각보다 금방 끝나셨군요.”

“아, 알파 님···?”

“오셨습니까. 알파 님.”

알파의 목소리에는 어조나 억양이나 감정이 티끌만큼도 없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인데 인간답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등장만으로 이 세 사람을 일어서게 만드는 존재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나누고 있나?”

< 20. 처세술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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