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극한의 이득 (3) >
***
“재밌네요. 로페즈 씨.”
예상외의 반응이라 떨리긴 하지만 이것도 아주 생각 못한 흐름은 아니다.
“···그렇게 먼저 치고 들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어요? 로페즈 씨는 ‘지능의 정점’이잖아. 아, 이 표현은 틀렸네요. 언젠가 ‘지능의 정점’이 될 사람이죠.”
람다, 다이토는 공작의 정점이다. 그리고 로페즈는 지능의 정점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장로회의 일원들이 저마다의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자들이라는 추측이 확실해졌다.
추측하고 있던 것이니 놀랍지는 않다. 오히려 여기선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으리라.
이쪽이 쥐고 있는 정보에 허세를 더해야 한다.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그림자가 더 커 보이게 해야 한다.
“하하. 그런가요.”
“설마 몰랐다고 대답하진 않을 거죠? 진짜 몰랐으면 여기서 죽어줘야겠는데요.”
“제가 진짜 아무것도 몰랐으면 무슨 생각으로 빈센트 총수님을 뵈러 왔겠습니까. 의도도 목적도 모르는 일방적인 호출이었는데.”
“그래요. 참고로 저는 장로회에서 ‘재력의 정점’이에요.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미르니의 총수인 세를린은 재력의 정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금방 말해줘도 되는 것인가. 이미 로페즈를 장로회의 일원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인가.
‘거짓말은 아닐 거야. 이 사람이 어느 분야의 정점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보단 보이는 게 더 강해 보일 테니까.’
「세를린은 관리자님과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나를 아래로 깔려고 하는 거라면···. 내가 아래에 깔리기 전까지 이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잡힐 때까지 귀를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로페즈 씨? 대답이 늦으시네요.”
하지만 얕보이는 것은 금물이다. 금방 아래로 깔려줬다간 그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수준이 낮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뭘 하든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진다.
비공식 시가총액 860조의 거대기업 미르니.
미르니의 총수 빈센트 세를린은 확실히 위에 있는 인물이다.
‘내가 당신보다 아래는 맞지만,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야.’
“너무 압박하는 식으로는 하지 맙시다. 무섭잖아요. 하하.”
무섭잖아요. 내가 당신보다 밑에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짓누르진 맙시다. 그런 의도다.
“보기보다 강단이 있으신 성격이네.”
“제가 좀 그런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당해주는 성격이 아닙니다. 당해 주지 않을 근거가 있고, 그 근거로 앞서 그런 발언을 내뱉은 것입니다. 그런 의도다.
“그런데 상대를 봐가면서 그러세요. 손발 묶여서 죽을 때까지 쥐어짜이고 싶지 않으면.”
항상 대화에서 우위에 있었다. 우위가 없을 땐 여유가 있거나 확실한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모든 순간에 그랬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제는 대화 자체가 도박이 되었다.
「세를린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어 정확한 분석이 어렵습니다. 뇌파 탐지를 허용하시겠습니까?」
「왼쪽 뺨: 거부」
「오른쪽 뺨: 동의」
로페즈는 자신의 왼쪽 뺨을 살짝 긁는다.
트랜센던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인 로페즈는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악의가 느껴진다.’
“네. 상대는 확실히 구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무래도 세를린은 다이토의 이간질에 완전히 넘어간 것 같다.
「관리자님. 위험한 상대입니다. 어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그녀는 옵시디아몬이 라 코만데를 흡수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플래닛 웨폰을 악용한 줄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옵시디아몬에는 ‘제타’의 가이우스를 내쫓고 ‘제타’가 의도하려던 전쟁을 망친 세력이라며 장로회에서 미운 털이 다소 박혀 있다.
사실은 대부분 뉴소사이어티가 저지른 일이다. 뉴소사이어티가 제타의 전쟁을 망친 주범이고 뉴소사이어티가 라 코만데를 약화시키기 위해 바빌로니아 플래닛 웨폰을 악용한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라면 많다. 증거라면 얼마든지 가져다 보여줄 수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내게 악감정을 갖고 있다는 거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싫은 사람이 주장하는 결백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악감정부터 지워야 해.’
한번 싫어진 사람이 더는 싫지 않게 만드는 방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 어려운 일을 빠르고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한 가지 수가 떠오른다.
“세를린 총수님은 다이토를 얼마나 신뢰하시나요?”
“뭐라고요?”
더 싫은 사람을 만들어버리면 된다.
이것이 굳이 살려둔 다이토의 마지막 이용 가치다.
“공작의 정점. 엔리코 다이토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잘 아시는지 여쭙고 싶네요. 어째서 다이토가 ‘공작’의 정점인지, 장로회라면 저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지금 이간질하는 거예요? 이 상황에?”
“진실을 모르신다면 이간질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간질을 하는 쪽이 어디인지 한 번쯤은 고민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를린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드디어.
「미소가 지워졌습니다. 관리자님의 방금 발언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더 해보세요.”
이번엔 로페즈가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는다.
“공작의 정점과 지능의 정점. 어느 쪽이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고 어느 쪽이 더 거짓말을 자주 했을 인물인지···. 어느 쪽이 더 장기적으로 총수님과 장로회 구성원분들께 ‘이익’이 될지. 그걸 깊게 고민해주시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재력의 정점이라면 ‘이익’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으리라.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라면 제시해드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이토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주장만 했겠죠.”
“그러는 로페즈 씨도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요.”
“지금 보고 싶습니까? 제가 다이토를 상대로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다이토와 ‘다이토가 소속되었던’ 비밀스러운 집단이 장로회를 대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요.”
“보여주시죠.”
“싫습니다.”
세를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듣기 싫은 욕설이라도 들은 사람의 반응이다.
“지금은 싫습니다. 총수님께서 지금 저한테 가진 그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제가 무슨 이성적인 말을 해드려도 총수님께서는 믿어주시지 않을 것 같네요.”
“장난치세요? 나도 사리분별은 똑바로 하는 사람이에요. 람다··· 아니, 다이토에 대해서 말할 게 있으면 지금 말해보라고요. 들어주겠다니까?”
‘먹혔다.’
여유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솔직해진 그녀의 반응은 여러 사실들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방금 로페즈의 머릿속에서 조립된 사실들은 트랜센던서 역시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다.
「빈센트 세를린은 뉴소사이어티에 대해 모릅니다. 다이토가 공작의 정점인 이유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따라서 그녀는 다이토의 지하정보기관인 콜렉퍼레이션의 구조도 자세히는 모를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알고 상대는 모르는 것.
이것이 정보 우위다.
“총수님.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총수님께서 그 소식을 접하시고 기분이 언짢아지셨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면 좀···”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홀로 싸워야 했던, 지금도 총수님과 장로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억울한 적개심을 받아내고 있는, 제 입장도 좀 헤아려주세요.”
“···.”
“계속 이러시면 저도 더는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망가져버리는 수가 있다고요. 저는 다 같이 잘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저 하나만 억울하게 잘못된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 잘못 행동하면,
“그때는 사업이고 뭐고 다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장차 장로회에서 지능의 정점이 될 일원이 자폭할 것이다. 그 자폭의 여파는 당신에게도, 장로회에도 분명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럴 정보가 있고 능력이 있다.
“알겠어요. 로페즈 씨.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제게 다음이 있습니까?”
“네. 약속드려요.”
“아니요. 람다와 제타의 이야기를 듣고 태도를 결정하시겠죠. 저를 묻을지 안 묻을지.”
“하,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말하라니까 싫다면서요. 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짐작하니까 당장 들어줄 생각이 있다니까요?”
“말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겠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봐도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증거요.”
“네?”
“그간 벌어진 사건들은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듣는다고 바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사건들도 아니고요. 전쟁 전부터 복잡하고 길게 얽혀있습니다. 당연히 그중에는 다이토, 저, 장로회가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쟁 전까지 돌아가야 돼요?”
‘궁금하고 답답하겠지. 지금까지 태양계가 자기 손바닥 위에 있는 줄 알았을 거야. 손등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뭔지도 모르고.’
“네. 그래서 제가 총수님을 설득할 준비를 하는 동안, 제 신변을 보호할 장치를 하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뭔데요?”
“제 회사, 옵시디아몬. 총수님의 회사, 미르니. 이 두 회사가 일종의 사업적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태양계에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그러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는데 세를린이 먼저 입을 연다.
“일이 잘못되면 같이 자폭하기 쉽게?”
“네. 맞습니다.”
“제가 뭐 하러 그런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죠?”
로페즈는 즉시 네 손가락을 펼쳐 보인다.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말하는 도중에 하나씩 생각해둔 것이다.
“첫째. 총수님께서 감당하시는 리스크보다 더 큰 리스크를 이쪽이 감당해왔고, 하고 있으며,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폭을 했을 때 덩치가 큰 쪽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만 작은 쪽은 소멸할 것입니다.”
“네.”
“만약 제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자폭이라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제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서 총수님이 저를 해치고 싶어지신다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시면서 저를 해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약지를 접었다. 이제 손가락 세 개를 펼친 채다.
“계속 해보세요.”
“둘째. 총수님의 미르니는 광물자원 플랜트를 주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중엔 채굴하고 싶어도 채굴할 수 없었던 환경들이 있었겠죠. 저희에겐 방사능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신기술이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표면적으로나마 협력하게 된다면 이건 미르니에 사업적으로 아주 큰 이익이 됩니다. 그동안 눈여겨봤지만 방사능 때문에 채굴하지 못한 환경의 광물들을 모조리 손에 넣으실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세를린은 입을 다물고 있다.
로페즈는 중지를 접는다.
“셋째. 저는 진심으로 장로회의 일원이 되기를 예전부터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로회에 지능의 정점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세를린 총수님과도 친구 같은···. 좋은 관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같은 태양계 출신이기도 하고요.”
“별로 구미가 당기진 않네요.”
로페즈는 엄지를 접는다. 이제 검지만 펼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이 제안을 받아들여주신다면 태양계의 사람들, 각 정권의 지도자들과 수많은 권력자들이 모르는 비밀을···. 총수님께서는 저번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실 겁니다.”
“지어내는 말은 아니고요?”
“이건 ‘제타’님께서도 궁금해하실 내용입니다. 그리고 장로회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기도 하죠. 지금 제 입장상 장로회에 이걸 알리기에는 애매하니, 총수님을 통해 알려드리는 것이 저에게나 총수님에게나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
오후 7시. 옵시디아몬의 사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시간대다.
로페즈는 유토피아의 중앙에 있는 사무구획으로 돌아왔다. 이전과 같이 평탄한 초원으로 복구된 옵시디아몬 부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시간은 벌었어.”
- 돈도 벌었습니다. 관리자님은 위험한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셨습니다. 훌륭합니다.
“진짜 조마조마했지.”
- 이제 하이퍼 마인드로 가서 다음 과정을 준비하면 됩니다.
오늘은 조금 늦게 퇴근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참이다.
지이잉···
「샌디 옵시디언 별동연구소장의 전화입니다.」
“받을게.”
- 아, 회장··· 로, 로페즈 씨. 지금 이쪽으로 들어오셨죠?
“네. 무슨 일이시죠?”
샌디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느낌이 있다.
- 그···. 연구소 팀원들은 다들 퇴근하긴 했는데요. 따로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뭔가요?”
「관리자님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 제 36종류 인공지능 중 2번 인공지능이 요청을 해서요.
“2번 인공지능의 요청이요?”
- 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로페즈 씨 혼자서만 잠깐 연구소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관리자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전화로 해결해도 되는 일입니다. 샌디의 2번 인공지능이 병기로 업로드되어 그녀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2번 인공지능이라면 샌디가 만든 두 번째 인공지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함께한 학습 기간이 길었을 테니 사람처럼 요청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권한자를 지키려고 스스로 병기화를 원하는 2번 인공지능이라···’
흥미롭다. 어쨌든 옵시디아몬의 하위 인공지능은 종류가 많을수록 전술적 다양성도 많아지는 법이니 허락 못해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다 왔으니까요. 본사로 들어가기 전에 샌디 씨 쪽으로 들를게요.”
- 헤헤···. 오셔서 2번 인공지능이랑 대화 한번 해보세요. 재밌을 거예요.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본사에서도 통신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죠.”
- 네! 기다릴게요.
로페즈는 자기 시야에만 보이는 허공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 트랜센던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 관리자님. 2번 인공지능의 병기화는 제가 샌디와 의논한 후 직접 준비하겠습니다. 관리자님은 서둘러 하이퍼 마인드로 올라가 빈센트 세를린과 엔리코 다이토에게 대응할 계획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야.”
- 네. 관리자님.
“너 왜 그러냐?”
< 19. 극한의 이득 (3) > 끝